퀵바

이 곳에 오면 당신은 설 것이다.

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1,663
추천수 :
8
글자수 :
279,336

작성
23.01.31 09:16
조회
35
추천
0
글자
21쪽

7. 아카데미의 흑막 (2)

DUMMY

"용사!"


"커업!"


교장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옷이라는 천에서 금방 찢고 나올 듯 묵직한 가슴 두 덩이가 달려올 때의 탄력을 받아 내 얼굴을 파묻었다. 빠져나오려고 해도 몸 뒤를 양손으로 꽉 끌어안고 있어서 오히려 더 파묻혀 들어간다.


늪에 빠지는 게 이런 느낌일까?


얼굴과 가슴깨가 압착되면서 순식간에 산소가 결핍되었다.


결국 나는 살기 위해 양손으로 가슴을 잡아 끌어내리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푸하! 헤이즈. 몇 번이나 말했지. 이렇게 갑자기 막 끌어 안으면 숨 막히니까 하지 말라고."


"그랬나? 아, 맞아. 그랬다! 미안."


그러면서 히히 하고 방실 웃는다.


파티에 있을 때도 이렇게 주의를 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잘 때, 위험할 때, 놀랐을 때, 주의를 아무리 줘도 시도 때도 없이 일단 달라붙어서 으스러질 듯이 껴안고 본다. 이 정도면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천연스러운 미소를 보여주는데 내가 여기서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리오.


그냥 하여튼 천진난만 해가지고.


"교장님하고 무슨 얘기 했어?"


"응? 아아."


나는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 말 안 했어."


내가 교장과 나눈 얘기는 남에게 함부로 얘기할 만한 게 아닌 것 같다.


그럴 게 나한테 하는 의뢰라는 게.


"아카데미를 부숴주세요."


라니. 반 세기 동안 아카데미의 교장직을 맡고 있던 사람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아니다.


나를 입학시킨 장본인이 입학한 곳을 부수라는 건 무슨 궤변인가?


하지만 내 입장을 알고 나를 이용할 줄 알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마냥 헛소리를 내뱉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이 발언은 교장인 그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발언인데 이런 말을 내게 전한 목적이 뭐지?


그녀의 말에는 달리 속뜻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속뜻을 꼬은 의뢰일수록 거미줄처럼 복잡한 일들이 얽혀 있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정황상 이 아르토리아 아카데미는 보기와는 달리 여러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헤아리면 되나?


그것도 그녀 선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그걸 나한테 해결해달라고 하는 거고.


"···입학하자마자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됐네."


용사니까 받고 싶지 않은 일까지 다 받아야 되나.


계약서도 안 쓰고 이런 일을 떠맡게 되는 건 질색인데.


국왕한테 사례금 받을 때 덤으로 받아야겠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왜 여기 있어? 공주 전하랑 쉐릴을 반까지 안내해줘야 하잖아."


"응? 그치만 나도 막 와서 여기 길을 모르는걸? 연구소 가는 길만 알지. 선도 위원 사람한테 부탁했어."


"뭐? 그러면 너, 여기에서 반으로 가는 길은 알아?"


"아니?"


실화냐.


///


불행 중 다행으로 반으로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벽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상세하게 알려주는 지도나 천장 측에 안내 팻말이 걸려 있던 덕분에.


교내의 인프라가 잘 설계되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 넓은 곳에서 반 하나 찾으려면 한참 걸릴 뻔했네.


그런데······.


"이 미천한 평민 주제에 어디 고귀한 귀족에게 말꼬리를 늘여? 다 죽고 싶어?"


"개소리 처하고 있네. 아르토리아 아카데미는 평민과 귀족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는다는 방침을 알면서도 그딴 소리를 지껄여?"


"하! 그딴 개소리를 잘도 믿다니, 가축이라 머리에 든 것도 없는 거냐? 너희들과 우리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모르나?"


"모르는데? 어쩔?"


"뭐라고! 그럼 당장 여기서 보여주지!"


"해 봐! 들어와! 들어와!"


여기는 또 왜 이래?



강당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 안에 들어서자마자 평민과 귀족들이 서로 파벌을 형성해 반반씩 앉아 있었다.



아니, 저걸 앉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나? 의자에 다리 한쪽만 걸치고 당장에라도 들고 일어설 것처럼 발진 준비를 끝마친 모습인데.


평민과 귀족 사이가 안 좋은 건 하루이틀 일은 아니니까 하하호호 화기애애한 게 더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입학 첫 날인데 신입생들끼리 얌전히 있을 수는 없나?


이런 골칫덩이들 담당하는 담당 교수님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인데.


그런데 이 반을 담당하는 교수님이 누구지? 수업 시간 지난지 좀 됐는데 정작 말려야 할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응?"


문득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뒤를 돌아보는데 헤이즈가 슬금슬금 교탁 위로 올라선다.


네가 왜 거기로 가?


"여,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 오늘부터 이 반을 담당하게 된 헤이즈라고 합니다. 담당하는 과목은 단일마법이에요.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너였냐?


나는 벙 쪘다.


아니, 저 녀석이 담임을 맡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헤이즈는 대인기피증이 있으니까.


원정대 초창기에는 나를 제외한 다른 원정대 대원들에게도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중증이었다. 그나마 여행을 하면서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혼자서 자기 속옷도 사러 가지 못하는 녀석이 어떻게 담임을 맡아?


강사직이야 단일 과목만 담당하면 되니까 그나마 낫지 앞으로 반을 책임져야 하는데 감당 가능한가?


봐. 자기보다 작은 교탁에 몸을 숨겨가면서 겨우겨우 말을 내뱉는데 잘도 통솔이 되겠다.


"엘프다."


"진짜 엘프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던 분위기가 헤이즈의 등장에 빠르게 식는다.


용사인 내가 등장했는데도 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모두의 이목이 쏟아지자 헤이즈는 우우,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교탁 아래로 쪼그려 앉는다.


눈물 글썽이면서 나한테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것도 안 도와줄 거야.


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담임을 맡은 거지?


아니면 강사가 담임을 맡아야 할 정도로 교수진 쪽에 인력풀이 부족한 건가?


음.


이 와중에 조용해진 평민과 귀족 쪽을 바라보자 두 측의 반응이 처음으로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의외.


하지만 이내 하찮은 것을 볼 때 낮게 깔리는 시선, 귀족 쪽은 한 층 더 나아가 역겨움과 혐오감 어린 표정으로 변한다.


이게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그것도 그럴 게 이 대륙에서 엘프라고 하면 노예, 혹은 창녀라는 인식이 강한 종족이니까.


수백 년 전, 마왕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엘프는 위대한 숲, 알레론의 잎사귀에서 태어난 고귀한 숲의 종족으로서 상위 종족으로서 여겨져왔다고 한다.


하지만 마왕이 등장한 뒤, 마물들이 알레론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엘프는 인간의 땅으로 건너왔고.


처음 그들과 마주한 사람들은 엘프의 수려한 외모에 넋이 나갔다.


그들은 인간의 왕에게 새로 발견한 종족에 발견했다고 보고 했고 인간의 왕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보고 넋이 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는 대로.


인간의 왕은 군대를 끌고 남은 알레론 숲을 전부 태워버린 뒤 엘프들을 포획해 자기의 것으로 삼았다.


반항하는 엘프는 죽이고 순종적인 엘프만 남겼다.


엘프와 인간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이 점은 그야말로 인간의 유흥거리에 이점으로 작용되었기에 귀족들에게 노예로 팔려나갔고 귀족들의 손에 버려진 엘프들은 사창가로 스스로 들어가서 몸을 팔았다.


이제 와서 엘프는 귀족들의 애완용이며 값싸게 엉덩이를 들이대는 천한 종족이라는 인식으로 전락했다.


실제로 더 얘기를 풀어보면 잔혹사가 더 많기는 한데 아무튼.


그런 천한 인식을 가진 엘프가 이 유서 깊은 아카데미의 강사로 채용되었으니.


이쯤 설명하면 지금 저 두 쪽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겠지?


짐작컨데 아마 귀족 자제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서 헤이즈를 가리키면서 이런 대사를 내뱉지 않을까?


도저히 역겨워서 참을 수 없군. 하찮은 노예 엘프 따위가 감히 아르토리아 아카데미의 교편을 잡다니!



"도저히 역겨워서 참을 수 없군. 하찮은 노예 엘프 따위가 감히 아르토리아 아카데미의 교편을 잡다니!"



봐, 역시나.



고마워, 귀족 사상에 찌들어서 나대는 오만한 귀족 A.




"언제부터 아르토리아 아카데미가 창녀를 담임으로 두게 되었지? 이 아카데미는 도대체 어디까지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만들어야 속에 시원한 거지! 엘프 면상만 봐도 역겨운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군!"



"힉! 미, 미안해요. 그래도 오늘은 목욕 두 번 하고 향수도 뿌렸는데!"



지금 말하는 냄새가 그 냄새는 아닌 것 같다, 헤이즈.



"평민도 참아가면서 겨우 봐줄까 말까인데, 하물며 감히 창녀 주제에 귀족에게 마법을 가르치려 들다니! 사창가에서 가랑이나 벌리던 년이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거야!"


"우으··· 아니야. 나는··· 나는 창녀가 아니야."


원정 초중반기 시절의 열정적이었던 나였다면 이 타이밍에서 분을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겠지.



그 입 닥쳐! 헤이즈는 더럽지 않아! 엘프가 더럽다는 건 너희들의 편견일 뿐이야! 엘프가 그런 인식을 가지게 된 건 인간 때문이라고!


이런 말을 하면서 옛 인간과 엘프의 역사를 언급하며 그들의 마음을 돌리거나 최악의 경우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서지 않는다.


이제는 알지, 그건 그저 치기 어린 호소에 불과하다는 걸.


인간의 고정관념을 되돌리는 건 내게 돌아오는 보상보다 훨씬 더 귀찮고 시간이 많이 들며 성공 확률이 낮다.


오히려 반박하는 그 말 자체가 분쟁의 씨앗을 만들고 가장 큰 반발을 일으키는 사람을 처단해도 남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한 앙금이 남지.


여기에서 풀어야 할 과제는 엘프는 천한 종족이 아니라는 걸 설득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헤이즈를 이 반을 통솔할 수 있는 담임으로서 자연스럽게 녹여들게 만드는 거 아니겠어?


"닥쳐라! 창녀 주제에 귀족에게 말을 걸다니!"


"와. 아까부터 말 존나 심하게 하네."


"뭐라고?"


내가 툭 던진 말에 귀족 A가 나를 노려본다.


나는 일부러 열받게 찡얼거리는 말투를 쓴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사람 면전에 대고 그렇게 말하냐.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 모르냐. 개새끼한테 개새끼라고 하면 빡치는 것처럼 창녀한테 창녀라고 하면 상처 받는 거 모르나. 지금 다들 생각만 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급발진 해서 나불대는 거 보면 분노조절장애에 다른 사람들한테도 창녀, 창녀 거리는 입 싼 귀족인 듯. 크크루삥뽕."


"뭐, 뭐?"


"계속 창녀, 창녀 거리는 거 보면 아카데미 오기 전에도 사창가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값싼 허벌남 귀족이셨던 듯 함. 그 나이 먹도록 사교계에서 한 번도 귀족 영애랑 손 잡고 춤 춰 본 적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몽정충 아다였다가 아다 떼려고 사창가 간 거 아닌가? 아닌가아?"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건 뭐다?


정치질.


"아르토리아 아카데미의 강사진 커트라인이 얼마나 빡센지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렇게 천대 받는 엘프가 여기 들어올 정도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모르고 그러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아카데미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지 않을 정도로 열정 없는 귀족인 건가. 여기 들어와서 마법을 가르치려고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생각도 못한 거 보면 뇌물 주고 들어온 거 빼박인 듯."


이 말을 들은 평민들이 헤이즈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귀족과 달리 평민은 재능이 있어도 이렇다 할 백도 없어서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수많은 사전조사와 피나는 연습을 한다.


평민은 귀족보다 태생적으로 잠재된 마력이 크게 적다는 것도 한 몫 할 거고.


근래 아카데미 입학 비율이 귀족 7.5, 평민 2.5면 노력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대강 알 만 하지.


하물며 노예 종족인 엘프가 아카데미의 강사진 자격을 얻었다?


그것만으로 헤이즈는 평민들에게 존경 받을 자격을 얻은 것이나 다름 없다.


···아니, 얘는 솔직히 마왕 토벌 원정대 멤버 자격으로 들어 온 것 같기는 한데.


사실이 뭐가 중요해, 지금이 중요하지.


반면 귀족들도 귀족 A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게 변했다.


"아니, 그게······."



내 말에 말문이 막혀서 반박을 못하니까 점점 내 말에 신빙성이 생기는데 반해 귀족 A에게는 의문점이 생기고 이미지가 떡락을 하는 거지.



각 국 주요 인사들이 졸업한 학교에 다니는 그들의 자제가 아카데미를 낮잡아 보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니까.



이 타이밍에서 헤이즈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내용물은 썩 못 미더워도 일단 우리 헤이즈, 얼굴은 끝내주게 예쁘답니다?


"헉!"


어때. 천한 종족이지만 아카데미에 들어올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다는 걸 깨닫고 나니 헛숨을 들이킬 정도로 예쁘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강사님을 괴롭히다니.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이건 좀 해명이 필요할 듯. 아버지가 귀족 노예로 팔려가서 고문 당하다가 죽고 어머니는 사창가에서 몸을 팔다가 병들어 죽은 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음."


"요, 용사아. 그건, 말하지 않기로 했잖아. ···히잉. 후에에엥."


"아, 울렸다. 고귀한 귀족이 여자 울렸다. 여자 울리는 남자는 상놈의 새끼보다 못한 버러지 새끼죠? 쓰레기죠?"


"바, 방금 그 여자를 울린 건 용사 당신이잖아!"


아, 얘도 이제 창녀라고 말 안 한다.


근데 어쩌라고, 정치질 시작했으면 누구 하나 뒤질 때까지 밑바닥 파고 들어가는 거야.


"네, 또 시작했습니다, 남탓. 지금까지 창녀라고 하면서 이 애 꼽 줬던 게 누구시더라?"


이제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귀족 A를 불결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아무리 그래도 울릴 것까지는 없었는데."


"나도 딱히 엘프한테 창녀라고 말한 적은 없어."


"다시 보니까 노력도 많이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엘프가 불쌍해."


"사교계에서 춤 한 번 안 춰본 찐따 아다여서 사창가 간 게 맞는 거 아냐? 저 성격이면 그럴 만 해."


요거지.


정치질은 요 맛에 하는 거지.


내가 물고 늘어지는 놈 주변사람들이 알아서 바짓가랑이 내리는 맛.


귀족 A는 당황, 난처한 표정으로 주변의 힐난 어린 시선을 보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이, 이익!"


그러더니 왜 자기가 당한 걸 깨닫고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거리는데.


갑자기 내 얼굴에 장갑이 날아온다.


녀석이 끼고 있던 장갑 한쪽이다.


"겨, 결투다! 결투다, 용사! 나에게 창피를 준 것을 후회하게 해주지!"


어쭈?


얼척이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네.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귀족님?"


"무, 물론이지! 족보도 없는 평민 주제에 감히 용사를 자칭하다니 분에 겨운 소리를 하는구나! 여기에서 네놈을 분질러 놓으면 내가 용사보다 강한 거 아냐!"


충동적으로 한 행동에 말 더듬어가면서 정당성 부여하는 거 봐라. 추하려면 한없이 추해지는구나.


잠깐 내 손에 쥐어진 장갑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저 정도 급이라면 그냥 이 장갑을 이 자리에 던져서 얼굴에 맞추는 걸로 기절 시킬 수도 있다.


아니면 곧장 뒤쪽으로 도약해서 뒤통수를 후려서 참교육을 가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최선인가?


아니.


"엑스트라 귀족님, 기회를 한 번 줄게."


"에, 엑스트라? 감히 나를 엑스트라라고?"


나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아직 울고 있는 헤이즈의 뺨에 장갑을 들이댄다.


"패앵!"


근데 얘는 그걸로 코를 풀고 앉았네. 티슈 준 줄 알았나.


"느낌 이상해."


종이가 아니라 면인데 당연하지.


"갸악! 새로 산 고급 장갑이!"


"자식, 장갑 하나에 얼마나 한다고 귀족이 쪼잔하게. 어쨌든."


나는 축축해진 장갑을 들고 있는 헤이즈를 가리킨다.


"얘랑 한 판 떠."


"후에?"


"뭐?"


둘 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 녀석이랑 싸워서 이기면 내 모든 발언을 철회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과할게. 넌 손해보는 거 없을 텐데?"


"흐, 흥! 어쩔 수 없지. 수락하겠다."


그래. 마왕을 토벌한 용사 보다야 아카데미 강사가 허들이 낮지?


꼴에 쫄린 주제에 센 척 하기는.


"그러면 조만간 하인을 보내지. 그 동안 패배할 날만을 기다리며 후회하는 게 좋을 거야!"


"조만간은 무슨 조만간이야?"


"응?"


"떠. 지금 여기서."


어딜 어물쩍 넘길라고 하고 있어.


"지, 지금?"


"왜. 쫄?"


"쫄, 쫄기는 이 어리석은 녀석! 이런 비좁은 장소에서 어떻게 대결을 하라는 거야! 신성한 대결을 물로 보는 거냐!"


신성이고 나발이고 둘러대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현상복구의 진."


내 발바닥 아래에서 현상복구를 뜻하는 푸른 색 룬문자가 나타나더니 반 전체를 아우르는 마법진이 확장하듯 형성된다.


"아니. 이, 이건!"


"고위급 결계?"


"용사가 결계를 사용할 수 있다고? 검만 휘두르던 게 아니었어?"


왜. 용사가 결계 쓰면 안 되냐?


"여기서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모든 게 원상복구 되고 밖에도 피해가 가지 않으니까 파손될 걱정일랑 말고. 이제 시작하지? 더 추해지기 전에."


이게 다 필요한 일이라서 하는 거지, 나도 솔직히 애들 싸움에는 끼기 싫다.


엑스트라 하나가 분량을 얼마나 잡아먹고 있는 거야.


"으윽, 조, 좋다! 그렇게까지 굴욕을 맛보고 싶다면 응해주지!"


귀족 A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서 억지로라도 텐션을 끌어올려서 의욕을 낸다.


반면에 문제는 헤이즈 이 녀석인데.


"요, 용사. 정말로 해야 돼?"


나는 자신없어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의 등을 탁하고 쳤다.


나는 왜 그녀가 이렇게 자신없어 하는지 알고 있다.


"저질러 버려."


"하, 하지만······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데. 주, 죽을 수도 있어."



"그 때는 그 때 가서 생각하지 뭐."



"뭐어?"



"자, 그럼 결투 시작!"



헤이즈가 내 얼굴을 보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이, 나는 멋대로 시합을 시작한다.


"분수를 알아라! 라이자블 아르가!"


그 때, 이미 체내에서 마력을 주입해두었던 귀족 A가 곧바로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마법을 날린다.


"오오."


조금 놀랐다.


과연 귀족의 자제라고 해야 할까. 시작과 동시에 날린 마법은 4서클에 달하는 중위급 원소 마법이었다.


여행하면서 우리 원정대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4서클 전기 마법.


그의 지팡이 끝에서 뻗어 나온 커다란 번개가 헤이즈를 집어 삼킬 것처럼 순식간에 뻗어 나간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냐.


"느려."


귀족 A는 화들짝 놀라서 등 뒤로 몸을 돌린다.


어느새 귀족 A의 등 뒤에 헤이즈가 있었기에.


"크억?!"


몸을 돌린 보람도 없이 귀족 A의 얼굴에 마법진이 생기더니 강력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짓이긴다.


그 사이에서 귀를 찢는 파열음.


귀족 A는 그 상태로 풍압에 날아가 반의 책상 몇 개를 무너뜨리고는 결계에 몸을 들이 받는다.


헤이즈의 주 마법 성향은 관통.


반면 지금 그녀가 사용한 마법은 1서클에 해당하는 공기 원소 마법, 에어다.


얇은 마법을 형성해 잠시 뜰 수 있거나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본 중의 기본 마법인데.


그녀는 이걸 막으로 만들어 밀치는 용도로 사용했다.


관통 계열 마법을 사용하면 정말로 죽을까봐.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헤이즈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막는다.


"어, 어떡해. 괜찮아?"


또 한 번 성장했구나.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녀의 공격 스펙트럼을 넓혔다고 생각해봐도 좋을까?


귀족 A는 목이 한쪽으로 꺾인 채 쓰러져서는 게거품을 물고있다.


결계의 효과로 다친 곳은 원상복구 되겠지만 그 충격은 머릿속에 뼈저리게 남을 테지.


헤이즈.


그녀는 일대일 대결이라면 원정대 내에서도 나 이외에는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단일마법 실력자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마력이 작았지만 모든 원소 계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마력이 필요하고 마법 방정식을 풀이한 영창을 외쳐야 한다. 서클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마력의 양이나 영창 시간도 불어난다.


반면 대부분의 1서클 마법은 원소의 기초이기에 끌어오기만 하면 돼서 영창이 매우 짧거나 필요없다.


왜, 사람들이 담배에 불 붙일 때 손가락에 불 붙이고 피우곤 하잖아. 그것도 1서클 마법의 일종이다.


헤이즈는 그 점과 자기만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정말 피가 나도록 노력하고 마력 소진으로 생명력 마저 깎을 정도로 노력한 끝에.


무영창으로 1서클 마법의 밀도를 최대로 높여서 방출할 수 있는 마법을 습득했다.


단 한 사람을 대상이라면 무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다.


나조차 이 녀석을 상대하면 가끔 빡셀 정도인데 하물며 4서클 마법을 쓰는 귀족 자제면 말 다 했지.


그러게 깝칠 상대도 봐가면서 했어야지.


"우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정말로 엘프가 귀족을 이겼어!"


"넌 헤이즈 강사님 움직임 봤어?"


"아니, 못 봤어."


"헤이즈 선생님 엄청 강해!"


이 해프닝으로 얻을 건 다 얻었다.


헤이즈의 강사로서의 위상.


그리고 엘프로서의 위상.


부가적으로 평민과 귀족들 사이에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벽이 약간 허물어졌고.


앞으로는 헤이즈 하기 나름이겠지.


"헤이즈 선생님 존나 예뻐요!"


"헤이즈 눈나 가슴 존나 커요!"


그만 해, 이 새끼들아.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카데미 은퇴 용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 15. 흑막 사냥을 나선다 (4) 23.02.08 31 0 13쪽
14 14. 흑막 사냥을 나선다 (3) 23.02.07 27 0 17쪽
13 13. 흑막 사냥을 나선다 (2) 23.02.06 28 0 11쪽
12 12. 흑막 사냥을 나선다 23.02.05 32 0 15쪽
11 11. 왜 다 옷부터 벗어재껴 23.02.04 37 0 18쪽
10 10. 휘둘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2) 23.02.03 42 0 13쪽
9 9. 휘둘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23.02.02 35 0 18쪽
8 8. 아카데미의 흑막 (3) 23.02.01 35 0 16쪽
» 7. 아카데미의 흑막 (2) 23.01.31 36 0 21쪽
6 6. 아카데미의 흑막 23.01.30 34 0 11쪽
5 5.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5) 23.01.29 34 0 10쪽
4 4.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4) 23.01.28 46 0 15쪽
3 3.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3) 23.01.27 78 0 18쪽
2 2.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2) 23.01.26 156 3 15쪽
1 1.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23.01.25 294 5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