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아크레 10-1 >
"그래, 자네는 필리프의 말에 대회에 참가했을 뿐이다. 필리프는 자네가 우승한다면 영지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함구하라고 했다. 이거지?"
류의 말을 듣던 리처드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턱 끝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테라스의 창가에 손을 얹고 아크레의 전경을 바라봤다. 때마침 노을이 져가며 어스름이 찾아오고 있었고 시내에는 경기의 열기가 식지 않은 듯 술에 취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증명할 길은 없군. 랜포트. 현재 우리 병력은?"
"오늘 아침 기준으로 약 구천 명 정도 됩니다. 방어를 위해 배치한 병력을 빼고도 오천 명은 당장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 만약 필리프와 싸운다면 그쪽 편을 들 병력은 얼마나 될까?"
"아벤 백작과 플랑드르 백작의 병력 삼천 명은 전부 그쪽으로 설 거라 생각됩니다. 구호기사단과 레반트 병력 칠천 명은 중립. 템플 기사단은 반절 정도 넘어갈 거라 보면 팔백 명. 합치면 한 사천 명 되겠네요. 아, 샹파뉴 백작께서는 양쪽 모두 사촌 형님이라 빠지겠지요. 거기다가 필리프의 직속 병력은 삼천 명. 적은 전부 칠천은 될 겁니다."
"싸우면 가뿐하겠군."
"그렇죠. 전하께서 앞장서시면 몇 시간 내로 끝나겠죠. 아마 도망친 녀석들을 잡아 죽이는 데 더 걸릴 겁니다. 그런데 이 난리를 살라흐앗딘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줄까요? 그리고 유럽 쪽과 교황의 반응은요?"
묻는 리처드나 답하는 랜포트나 답은 알고 있다. 지금은 전면전을 벌일 수 없었다. 리처드는 빠르게 결정 내렸다.
"그래, 관두자. 어차피 한번 전투이었을 뿐. 음험하고 전쟁에 익숙지 못한 자가 자기 자신만의 전쟁을 벌인 거다. 그러니 다음 기회를 노리자. 제대로 남자답게 싸울 기회가 또 오겠지. 어차피 이곳이 정리되면 붙게 될 거야."
그 말에 랜포트와 다른 기사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이들은 전쟁터에서 피를 빨아먹어야만 클 수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때는 베르트랑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이번에는 양보해드렸으니 말입니다."
랜포트의 말에 제임스와 윌리엄도 떠들며 프랑스의 이름있는 기사들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필리프는 저에게 주십시오."
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방안이 조용해졌다. 영국 왕과 프랑스 왕의 불화도 이제야 알았다. 감히 자신을 체스판의 말로 보고 움직인 것이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리처드가 돌아보고 웃었다.
"싫은데? 필리프는 내 거야. 그리고 넌 내 봉신도 아니고, 영국의 기사도 아니다. 안 그런가? 지금은 그냥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류는 고개를 떨궜다. 맞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필리프가 약속했던 숲이 둘러싸인 작은 영지는 꿈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허탈했다. 결국, 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 모래더미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때 류를 지켜보던 리처드가 웃으며 말했다.
"너 말이야. 필리프를 맡길 수는 없어도 나한테 잡아 오는 일 정도는 시켜줄 수 있어. 묶어서 바닥에 질질 끌면서 말이야. 그거라도 해볼래?"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랜포트는 웃었고, 다른 기사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류가 알아듣지 못한 거 같아 보이자, 리처드가 말을 이었다.
"내 봉신이라도 하라고. 영지가 필요하다며. 나도 남는 땅이 있으니 줄게. 내 근위 기사라도 하라고."
머리를 두들겨 맞은 느낌이다. 리처드는 호감 어린 눈으로 류를 바라봤다. 당황스럽다. 대답을 차마 못하는 류를 본 리처드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코끝을 매만지며 지나가듯 말을 했다.
"로베르가 템플 기사단으로 빠져나가서 말이야. 한 명이 비어. 그러니 네가 그 자리를 메꾸라고."
리처드의 말에 류는 결심했다. 재미있는 왕이 관심을 보인다. 그 옆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봉토도 준다고 한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결정이 나버리자, 가만히 있던 윌리엄이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후하게 류에게 손을 내미는 리처드에게 질투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왕이시여. 뭐 네 명이나 필요합니까? 셋이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솔직히 전하는 근위 기사 같은 건 필요 없잖아요."
"됐어. 내가 딱 서면 좌우로 둘씩 수가 맞아야 멋있지. 뭔가 모자란 거 같잖아. 로베르는 템플 기사단의 단장으로 갔으니 그 정도 급이 들어와야. 오오···. 역시 영국 왕의 기사들은 대단해 이런 얘기가 나올 거 아니야. 알고 보면 허접쓰레기들이지만 말이야.“
”전하!“
항의하듯이 제임스와 윌리엄이 외쳤지만, 랜포트는 수긍한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전하, 이렇게 저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뭐지요? 의도한 바는 아니나 저는 당신의 목숨을 노린 사람입니다.“
류의 말에 리처드는 테이블로 다가가 과일을 조그만 단도로 갈라 입에 넣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단도에 얹어진 과육이 상큼해 보였다. 우물거리며 리처드가 단도로 윌리엄을 가리켰다.
”윌리엄, 레스터 백작의 작은 아들. 레스터 백작은 아버지의 충신이었지. 몇 번의 전투 중에 날 죽일뻔한 적도 있다.“
윌리엄은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시 과일을 잘라 입에 넣고는 제임스를 가리켰다.
”저 녀석은 제임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동생이지. 사생아라 이름도 못 올리던 동네 한량이었다. 힘만 쓸 줄 알지. 사실, 문제만 일으키는 말썽꾸러기지.“
제임스도 민망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마지막으로 랜포트.
”이 녀석은 아버지의 근위 기사 중 한 명이었지. 실력만으로 올라와서 말이야. 전투 중에 나에게 창을 꽂은 유일한 녀석이었어.“
천 옷을 들어 옆구리의 흉터를 보이는 리처드. 그는 웃으며 그들 모두를 돌아봤다.
”내가 너희들에게 매번 하던 말이 뭐지?“
”충성을 바친다면, 신분이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중용하겠다.“
언제나 얘기했던 것이었던 듯 모두 한입으로 말했다. 류는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래서 이들이 강하고 유대감이 가득하구나 하고 말이다.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된다니 행복했다.
”저를 그리 생각해주신다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뭐, 눈에 들어오기는 하더라. 여길 점령할 때 열한 명을 베더군. 아주 유려한 솜씨였다.“
아크레를 쳐들어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도 수많은 적에 둘러싸여 정신없었을 텐데.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열셋이었습니다.“
그 말에 리처드는 키득거렸다.
”난 세는 걸 버린 지 오래됐어. 세는 것보다 베는 게 빠르거든.“
***
그때 한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조용히 예를 표하고 랜포트에 귓속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모르느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입이 무겁다. 그냥 얘기해.“
퉁명스러운 리처드의 말에 젊은 기사는 당황해 어버버 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랜포트가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왕이시여. 어려운 분이라 입이 열리지 않나 봅니다. 소년은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들어오지. 뭣하냐?“
그 말에 랜포트는 눈짓했고 기사는 나갔다가 병사 몇과 함께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조그만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천이 덮여있는 들것을 본 류는 숨이 턱하고 막혔다. 천을 젖히니 소년의 주검이 있었다.
”입을 막은 거 같습니다.“
랜포트는 침울한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류는 다가가 소년의 모습을 살펴봤다. 움켜쥔 손에는 류가 주었던 동전이 아직도 있었다.
”필리프 녀석······.“
낮게 가라앉은 리처드의 말에 류는 부르르 떨었다. 류는 소년의 눈을 감아줬다.
***
수뇌부들이 다시 모였다.
어제 있었던 일은 모두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류는 달랐다. 잔뜩 날카로운 눈빛으로 필리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음. 어제 대회가 끝난 이후로 소란이 겨우 가라앉았군. 이보게 레반트의 류. 자네의 실력에 솔직히 감동했네. 그 모자란 시돈의 마론보다는 자네가 낫더군.“
필리프는 아는지 모르는지 류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은근슬쩍 리처드의 성질을 긁으려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리처드는 못들은 체 딴청을 부렸다. 류는 한참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래서, 이번에 내 기사들로 초빙하고 싶다네. 자네가 우리 프랑스를 위해 서준다면 내가 고마울 것 같아.“
필리프의 말에 여러 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리앙은 자기 일인 것처럼 얼굴에 웃음을 가득 채우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하지만 류는 느낌이 왔다. 영지를 미끼로 입을 막으려는 수작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레반트 기사단을 맡고 있어서 말입니다.“
류의 말에 필리프는 발리앙의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눈을 돌렸다. 발리앙은 감지덕지한다는 표정으로 필리프의 눈길에 웃으며 답했다.
”저희도 류 경을 놓치면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래도 큰일을 하겠다는데 보내줘야지요. 모두 축하할 것입니다.“
발리앙의 말에 필리프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날 선 목소리가 나갈 수밖에 없다.
”전하, 전하의 말씀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에게 자리를 제안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려 합니다.“
류의 말에 필리프의 인상이 찌그러진다. 리처드는 히죽거리며 술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무···. 무슨? 어느 영주가 프랑스 왕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한단 말이냐?“
”가슴에 용기가 가득한 자. 눈에 거짓이 없는 사람. 그리고 친구처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분입니다. 전하께서도 존경할만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저는 그분의 손길을 마다할 이유가 없네요.“
필리프를 추어올리는 말투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간다는 말이다. 순간 필리프의 얼굴은 벌게지다 못해 퍼레지기 시작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화가 치밀어오르는 게 분명했다.
류는 걸어서 리처드의 등 뒤에 섰다. 필리프의 눈에는 핏발이 가득 서기 시작했다.
”알았네. 영국 왕이라 하면 모실만한 분이지. 잘 모시도록 하게나.“
필리프의 목소리는 떨렸으나 힘이 가득했다. 류는 필리프의 눈 밖에 난 게 분명했다.
- 작가의말
퇴고가 늦어져 두시간이나 늦어버렸습니다. ㅠㅠ
일요일 분량은 제 시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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