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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話者) 님의 서재입니다.

무사, 기사 되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대체역사

완결

화자(話者)
작품등록일 :
2018.04.09 10:01
최근연재일 :
2018.10.11 15:10
연재수 :
2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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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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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04,559

작성
18.08.30 21:12
조회
2,668
추천
74
글자
9쪽

< #15. 아크레 5-1 >

DUMMY

"그럼 자네도 새로 온 동료들을 맞으러 나가게나."


간단하며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류는 천막 밖으로 쫓겨났다. 아리송한 얘기였지만 무언가 꾸민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하나씩 풀어 얘기하는 필리프의 말은 중요한 것은 빼버리고 있었다. 흡사 컴컴한 동굴을 횃불 하나 없이 지나는 것 같았다. 바로 벽을 더듬으며 걷는 그런 찝찝한 느낌말이다.


'어쨌든 약속한 대로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제가 하지요. 하지만 반드시 약속은 지키셔야 할 겁니다‘


류는 필리프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과정이 어떻든 그 끝에 주겠다고 한 것은 너무 달콤해 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텅 빈 푸른 눈동자가 멍하니 류를 꿰뚫어 볼 때는 신통력이 대단한 무당이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래, 네가 앞날을 그리 예견한다면 말이야. 네 말대로라면 말이야. 내가 따라주지. 하지만 중간에 하나라도 삐끗거리면 나도 손을 놓겠다.‘


그렇게 류는 다짐했다.


때마침 해안가를 향해 달려가는 병사들 너머로 수평선에는 커다란 배들이 줄지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배를 향해 아크레에서 견제하기 시작했지만 이번 함대는 커다란 투석기를 설치한 배들이 몇 척 섞여 있어서 맞대응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아크레에서는 닿지 않는 불덩이와는 달리 함대에서 쏘아낸 것은 성벽을 넘어 도시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필리프의 예언이 생각났다.


'어째서 왕이신데 지휘는 하지 않으십니까? 모두 당신의 입을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어차피 이길 거야. 그러니 내가 나설 필요는 없어.'


'지금은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단언하시죠?'


'괴물이 오거든. 그 녀석이 정리할 텐데······. 그러니 뭐하러 내가 들러리 노릇이나 하겠나? 그럴 땐 한발 물러서서 구경이나 하는 게 최고일세.'


병사들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류도 새로 온 병사들이 어떨는지 궁금해서 해안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아크레에선 쏘아 올린 불덩이보다 더 많은 불이 날아오자 대응을 중지했다. 그렇게 조용해지자 커다란 배에선 자그마한 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걸 나눠타고 병사들이 해안가를 향해 오기 시작했다.


프랑스 왕의 군대처럼 깔끔하게 닦여진 갑옷은 아니었다. 흠집이 가득하고 녹이 슬어버리기 시작한 투구에 군데군데 수선한 자국이 널린 겉옷, 무기들도 모두 오래 사용하던 것처럼 보였다. 떨어지던 불덩이 속에서도 열과 오를 맞추던 프랑스의 보병들도 대단했지만, 이 무질서해 보이는 병사들은 베테랑들이었다.


상처투성이에 잘 단련된 근육. 병사들의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날것 그대로만 따진다면······. 다섯 달 전에 왔던 프랑스군이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이었다고 한다면 이들은 자비라는 단어는 모르는 야만인 무리 같았다.


"왕께서는 어디 계신가?"


달려온 발리앙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안가를 두리번거리며 병사들에게 물었지만, 병사들은 묵묵부답에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병사들의 반응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발리앙이 불쌍하다는 듯이 한 기사가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전 랜포트라고 합니다. 병사들이 모두 배운 게 없는 무지렁이들이라서요. 게다가 규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죠.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랜포트 경. 왕께서는? 혹시 병사들만 보내신 건가요? 아직도 키프로스에서?"


"아. 리처드 전하요? 그 엉덩이 무거우신 왕께서도 한 달이나 신혼여행을 즐기다가 지겨우신지 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랜포트라는 기사는 눈 위에 손을 올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리처드의 배를 찾았다. 잠시 찾던 그는 혀를 차더니 포기한 듯 말을 뱉었다.


"또 어디로 샜나 봅니다. 뭐, 근방까지는 같이 왔으니까 길을 잃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하하"


류조차도 황당한 표정이었다. 리처드라는 왕을 맞으려 십자군의 수뇌부가 모여들고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가 없다. 그들은 오랜만에 깔끔한 정복을 차려입고 새로운 왕을 맞으려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랜포트는 조금 멋쩍은 듯이 작은 배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동료 기사에게 물었다.


"어어이! 윌리엄! 리처드 왕은?"


"몰라, 아까 조그만 배로 갈아타더니 먼바다 쪽으로 나가던데······."


"젠장, 어디에다가 여자라도 숨겨놨나······. 긴장감이 없어요. 긴장감이···."


둘의 대화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과 상관없이 이어졌다. 류는 참다못해 키득거렸다.


"류, 그만······."


씁쓸한 표정으로 내뱉는 발리앙의 만류에 겨우 웃음을 참으며 류는 눈가를 손으로 닦았다.


"아니. 저들의 얘기가 재미있지 않으십니까? 자신의 주군인데 저리 편하게 말하다니. 다른 왕이었으면 아마 호되게 매질 당하거나 기사직을 박탈당했을 겁니다."



***



모두 한참을 해안가에서 이리저리 살필 때, 윌리엄이라는 기사가 배를 발견했다.


"저기 있다."


그 소리에 해안가에 있는 모두 눈을 돌렸다. 저 멀리에서 작은 배 한 척이 커다란 돛을 펴고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는 이집트 함선이 잡으려고 애를 쓰며 쫓고 있었다. 한참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배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속도를 겨우 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작은 배가 베네치아 함대 사이를 헤집고 돌아 해안가로 가버리자, 이집트 함대는 결국 먹이를 놓치고 배를 돌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이집트 함선을 베네치아 함대는 쫓지도 않고 커다란 성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달려오는 뱃머리에는 한 사내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갈색 머리를 흩날리고 있었다. 웃음이 가득한 채로 말이다. 뒤에서 돛을 움직이는 사내와 가끔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성난 사내의 표정과 여유만만한 뱃머리의 표정은 서로 이질적이었다.


그들이 다가오자,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제임스. 안 잡혔잖아. 그럼 됐지."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바람이라도 멈췄으면 어쩌자고. 잡히려면 왕께서나 잡히십시오. 전 성지에 오자마자 포로가 된 기사가 되고는 싶지 않아요."


"왜 이렇게 예민해. 너 계집이었냐? 한 달에 한 번. 그거?"


"젠장······. 말을 말아야지."


"젠장? 나한테 한 말이냐? 관대한 나로서도 이건 용납 못 한다."


"아니요. 전하 말고, 쫓아오던 이집트 배를 말한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왜 날 노려보는 거냐?"


둘은 티격태격하며 해안에 배를 대었다. 류는 다시 껄껄거리며 웃었다. 재미있는 왕이 나타났구나. 그런데 얼핏 봐도 믿음직해 보였다.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눈에는 빛이 났고, 넓은 어깨와 긴 팔. 튼튼하며 힘이 세 보이는 체구이지만 절대 둔해 보이지 않았다.


배에서 내리면서도 왕과 기사는 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포기한 표정으로 랜포트와 윌리엄이 다가가 말렸다. 그제야 겨우 장난질을 그만둔 리처드라는 왕이 주변을 돌아봤다.


랜포트가 한발 앞서서 기다리는 귀빈들에게 소개를 시작했다.


"멩과 앙주, 푸아티에 그리고 낭트의 백작이시며, 아키텐과 노르망디의 공작이시고, 아일랜드의 지배자, 그리고 잉글랜드의 적법한 수호자인 영광된 왕, 리처드 1세 십니다."


"가스코뉴가 빠졌다."


"그리고 가스코뉴의 공작이기도 하십니다."


필리프는 해안에 없었고, 기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기에 리처드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없었다. 껄끄러운 공작급인 레오폴트는 필리프와 붙어있으리라. 해안가의 영주들과 기사는 모두 무릎을 꿇고 새로운 왕의 참전에 감사했다.


"그러면 내일 오후에나 봅시다. 난 좀 쉬어야겠어."


귀족들과 늘어선 기사들에게 손을 흔들며 왕은 사라졌다. 예의범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과 왕국의 기사들은 주인을 닮아간 것이다. 야만인들의 왕. 어울렸다.


"젠장, 랜포트. 내 병사들은 어디로 간 거야?"


"모르겠습니다. 알아서 천막을 치러 갔겠죠. 저도 전하를 기다리다가 늦었답니다."


"피곤한데···. 바보 같은 제임스 녀석이 배를 모는 게 워낙 거칠어서···. 아직도 속이. 우웁."


"아이. 전하!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니까요. 그러면 가만히 잡혀요? 제 몸값은 주지도 않을 거면서 말입니다. 아마, 두고두고 놀리시겠죠. 아. 그리고 제 다리를 노리고 토하지 마세요."


"이 바보 녀석들. 모두 조용히 해. 전하, 그냥 아무 천막이나 들어가서 눈이나 붙일까요?"


엉망이었다. 하지만 전쟁터에 새로 온 이 유쾌한 젊은이들. 뭐, 리처드라는 왕은 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어쨌든 젊었다. 류는 빌어먹을 전황이 이제는 좀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 그건 모르겠다.


작가의말

드디어 그 분이 오셨습니다. 아크레의 땅을 밟았습니다.

걱정도 되네요. 너무들 좋아하는 캐릭터인지라, 잘못하면 난도질 당할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돕니다.


그래도 재미있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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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 #15. 아크레 10-2 > +18 18.09.09 2,469 72 10쪽
183 < #15. 아크레 10-1 > +14 18.09.09 2,426 76 11쪽
182 < #15. 아크레 9 > +22 18.09.07 2,337 71 11쪽
181 < #15. 아크레 8-2 > +14 18.09.06 2,365 72 10쪽
180 < #15. 아크레 8-1 > +21 18.09.04 2,501 76 8쪽
179 < #15. 아크레 7-2 > +8 18.09.03 2,394 79 9쪽
178 < #15. 아크레 7-1 > +8 18.09.02 2,466 73 10쪽
177 < #15. 아크레 6-2 > +6 18.09.01 2,487 71 10쪽
176 < #15. 아크레 6-1 > +10 18.09.01 2,484 64 9쪽
175 < #15. 아크레 5-2 > +9 18.08.31 2,513 67 9쪽
» < #15. 아크레 5-1 > +16 18.08.30 2,669 74 9쪽
173 < #15. 아크레 4-2 > +14 18.08.28 2,674 77 10쪽
172 < #15. 아크레 4-1 > +13 18.08.27 2,576 73 9쪽
171 < #15. 아크레 3-2 > +22 18.08.26 2,745 75 9쪽
170 < #15. 아크레 3-1 > +12 18.08.25 2,692 70 8쪽
169 < #15. 아크레 2-2 > +21 18.08.24 2,657 74 10쪽
168 < #15. 아크레 2-1 > +14 18.08.23 2,697 72 10쪽
167 < #15. 아크레 1-2 > +10 18.08.21 2,740 77 9쪽
166 < #15. 아크레 1-1 > +11 18.08.20 2,833 70 8쪽
165 < #14. 티레 4-2 > +9 18.08.19 2,851 69 9쪽
164 < #14. 티레 4-1 > +18 18.08.19 2,709 82 9쪽
163 < #14. 티레 3-2 > +10 18.08.18 2,786 77 9쪽
162 < #14. 티레 3-1 > +16 18.08.17 2,787 81 10쪽
161 < #14. 티레 2-2 > +12 18.08.16 2,828 83 10쪽
160 < #14. 티레 2-1 > +9 18.08.14 2,907 80 10쪽
159 < #14. 티레 1-2 > +20 18.08.13 3,083 83 9쪽
158 < #14. 티레 1-1 > +27 18.08.12 3,003 86 9쪽
157 < #13. 낙성(落城) 8 > +18 18.08.11 2,868 83 12쪽
156 < #13. 낙성(落城) 7-2 > +12 18.08.10 2,785 81 9쪽
155 < #13. 낙성(落城) 7-1 > +18 18.08.09 2,851 7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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