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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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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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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7
글자수 :
1,99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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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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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추천
10
글자
17쪽

장막(19) - 잿빛 땅의 왕

DUMMY

#1


살다 보면 ‘이게 되네.’ 싶은 일들이 종종 있다.


못 이길 것 같은 상대에게 운 좋게 이긴다던지.

하늘이 콩알처럼 보일 정도로 깊은 구덩이에 맨몸으로 떨어지고도 살아남는다던지.

그 구덩이 속에서 짐승의 등을 타고 기어올라 무사히 지상에 도착한다던지의 얘기다.


‘근데 잘못 낀 거 같은데.’


피스칼에 뚫린 구덩이에 빠져 기어 올라왔더니 엉뚱하게도 우린 시라비아에 도착했다.

그것도 시라비아에서 수십 년째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던 세 개의 구멍 중 하나였다. 시체를 던져 넣었더니 시체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그 검은 구멍 말이다.


심지어 막상 올라왔더니 주변에 깔린 게 마피아 최고 간부 셋에 얼빠진 조직원들이라니.

꽤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던 모양인데, 우리가 눈치도 없이 끼어든 것 같았다.


“흠. 확실히 거인을 타는 것보단 힘들군. 좀 더 야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크루아틀의 반대편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해골 아저씨가 기어 올라오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뒤늦게 주변 상황을 확인하더니 뻥 뚫린 눈구멍이 내 쪽을 향했다.


“이거 다시 내려가야 할 상황인가?”

“..아마도?”


마피아 사이에 끼고 싶진 않으니까.




...




“너.. 너 대체 뭐야!”


쿠스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산 본인조차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 쿠스카로선 이곳에 갑자기 나타난 ‘짐승을 탄 산’ 의 존재를 최선을 다해 부정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그 부정이 하필이면 총을 겨눴다는 게 문제였다.


짐승 대제의 살벌한 눈빛이 시커먼 총구를 겨눈 쿠스카를 향했다.


“히이...!”


크루아틀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쿠스카의 뒤에 있던 조직원들은 엉덩방아를 찧거나 기겁하며 줄행랑쳤다.


‘오..’


산은 속으로 감탄했다. 크루아틀을 앞에 두었더라도 쿠스카는 역시 쿠스카였다. 빠르게 흥분을 가다듬은 그는 천천히 총을 내리며 크루아틀을 향해 저항의 의사가 없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후.. 잠깐. 대화.. 예. 대화로 합시다. 우린 동맹이잖아요? 대제님.”

“동맹?”

“저는 쿠스카입니다. 제 냄새를 떠올려주십시오. 시라비아 마피아의..”

“기억하고 있다. 지저분한 냄새가 나는 놈.”


쿠스카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억지웃음이었지만 이빨을 드러낸 짐승 대제의 비위를 맞추기엔 그나마도 필요했다.

크루아틀의 분위기가 누그러들자 쿠스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왜 이곳에.. 아니, 그것보다 대제께선 이 아래에서 올라오신 겁니까?”


쿠스카는 검은 구멍을 가리키며 물었다. 크루아틀이 대답하려 하자, 그보다 빠르게 산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이 밑에서 왔습니다.”

“..도련님. 왜 그 짐ㅅ.. 대제의 어깨 위에 계신 거죠?”

“아, 이건..”

“목줄.”


산의 말을 가로챈 건 에콰였다. 쿠스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으로 에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여유롭게 담배 연기를 흘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억지웃음을 띤 쿠스카와는 다른 진짜 미소. 승리를 확신한 자의 얼굴.


“승부가 끝나버렸네?”

“이건.. 무효입니다. 도련님은 애초에 우리 조직원도 아니잖..”

“언제부터 그런 자격이 필요했지? 바르바로사가 조직을 이끄는 거지, 조직이 바르바로사가 되는 게 아니야. 넌 그 순서를 착각하고 있어.”

“궤변을..!”


탁! 스토커의 지팡이도 지면을 두드렸다. 쿠스카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스토커를 노려보았다.


“쿠스카. 자네가 시작했던 승부였네. 최고 간부라는 남자가 설마 그 결과에 불복하는 건가?”

“...이건 잘못됐어. 스토커. 에콰. 당신들이 꾸민 짓이 분명해..! 하필 지금, 이 자리에 저 짐승을 타고 망할 애새끼가 나타날 이유가 없잖아! 전부 당신들이 꾸민 짓이야! 함정이라고!”


냉정함을 유지하려던 쿠스카는 결국 폭발했다. 그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핏발 선 안경 너머 눈이 사납게 산을 쏘아보았다.

정작 당사자인 산은 말없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거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여차하면 다시 구멍 아래로 내려갈 셈이던 산은 침착하게 상황의 흐름을 살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여기선 자신의 한 마디가 중요하다는 것.


“그래. 내가 승자다.”


그래서 산은 말했다. 크루아틀의 어깨 위에서, 최대한 위엄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기왕이면 쿠스카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었고 뭐가 됐든 ‘승자’ 라는 단어가 좋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웃기지 마! 배신자 새끼가..! 그깟 짐승을 탔다고 해서 목줄을 걸었다고 착각하..”


쿠스카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가볍게 휘두른 크루아틀의 긴 꼬리가 그의 옆구리를 후려친 탓이었다.

꼬리에 얻어맞은 쿠스카는 몸이 홱 꺾이며 짐짝처럼 날아가 한참을 구르다 엎어졌다.


“무엄하다. 이 몸은 짐승 대제다.”

“어헉.. 크... 아아...”


옆구리를 부여잡은 쿠스카는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약하게 맞은 것뿐이지만 애초에 상대는 크루아틀이었다. 그의 기준에서 가볍게 휘두른다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선 그다지 가벼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나마 허리가 쪼개지지 않은 게 유일한 힘 조절의 증거였다.


“씨바알... 짐승 주제에..!”

“시라비아는 독을 품고 이 몸에게 머리를 숙였던 거로군. 지저분한 냄새가 섞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크루아틀이 몸을 털었다. 그의 어깨 위에 있던 산과 사냥꾼은 그 반동으로 퉁겨져 나와 지상에 착지했다.

지면을 울리는 묵직한 발걸음이 쿠스카를 향했다. 하늘 높이 솟은 짐승의 눈동자가 다가오고 거대한 주먹이 그보다 높게 치솟는 광경에 쿠스카는 이를 악물었다.


그건 죽음이었다. 어떤 자비도 없이 내려와 쿠스카라는 인간의 숨통을 끊어버릴 죽음.

그 죽음이 내려오는 동안, 쿠스카는 아직 못다 이룬 것들을 떠올리고 자신의 야망을 떠올렸다.

이 잿빛 땅의 왕이 되기 위해 일구고 노력해온 모든 것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난다는 사실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멈춰. 짐승.”


그 분노를 마지막으로 끝났어야 할 쿠스카는 짐승의 주먹이 코앞에서 멈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격한 숨을 몰아쉬며 크루아틀의 너머에 있던 산을 보았다.


“내게 명령하는 건가?”

“싫으면 한 판 뜨던가.”


산이 오른팔을 내밀며 말했다. 크루아틀은 으르렁거렸지만 쿠스카를 향해 내리치던 주먹은 거두었다.


‘그냥 뒤지면 재미없지.’


물론, 산은 쿠스카를 위해 살린 게 아니었다.

아시리아에서의 일. 처형인을 보낸 일. 산은 당한 만큼 갚아줄 생각이었다. 죽음으로 도망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말도 안 돼...’


산 덕분에 목숨을 구한 쿠스카였지만 그의 절망은 더욱 커졌다.


짐승의 어깨를 밟고 섰던 걸로도 모자라 산은 말 한마디로 짐승 대제의 주먹까지 멈췄다. 쿠스카 본인이 직접 산의 자격을 증명해버린 꼴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참을 수 없게 치욕스러웠다. 그는 아직 쥐고 있던 총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겨누는 것도 생각했지만, 그게 더 꼴사나운 최후임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네가 승자야.”


목구멍까지 역류하는 분노를 삼키며 쿠스카가 말했다. 산은 피식 웃으며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넣고 다가왔다.


“승자에겐 상을. 넌 자격을.. 증명했다.”

“흐흠.”

“하지만 내가 끌어내릴 거다. 이번엔 네가 이 웃기지도 않는 쇼로 바르바로사의 자리에 앉겠지만, 그 자리는 원래 내 거야.”

“..어?”


걸어오던 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지금 뭐라고..”

“네가 바르바로사다. 망할 도련님.”

“아니. 나 그거 하기 싫..”

“새 바르바로사가 정해졌다!”


스토커가 목청 높여 소리쳤다. 아직 이 자리에 남아 있던 쿠스카의 부하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쿠스카의 상태를 살폈다.

쿠스카조차도 인정한 상황. 게다가 그의 목숨을 구한 것도 산이었다. 그들은 이 자리의 모든 걸 지켜본 증인으로서 새로운 바르바로사의 탄생을 인정해야만 했다.


쿠스카의 부하들은 결국 모두 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토커도, 그의 곁에 있던 에콰조차도 말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잘못 낀 거 맞잖아. 썅.’


새로운 잿빛 땅의 왕은 그렇게 탄생했다.



#2


“예. 저 괜찮습니다. 왜 시라비아에서 나온진 모르겠지만.. 옙. 알겠습니다.”


헤이카와의 통화를 끝내고 휴대전화를 스토커에게 돌려주었다. 스토커는 ‘아주 공손하게’ 휴대전화를 돌려받았다.


“제발 그러지 좀 말죠?”

“바르바로사께 예의를 갖추는 것뿐입니다.”

“말투도 원래대로 고치고요. 제발.”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바르바로사의 명령입니다.”

“크흠. 알겠네.”


스토커는 수염을 씰룩거렸다. 이 노인네는 지금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음만 같아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겠지.

그토록 날 바르바로사로 세우려던 양반이었는데, 얼떨결에 내가 그 자리를 거머쥐었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선은 확실하게 그을 생각이다.


“그리고 저 보스 안 합니다.”

“아니. 자네는 바르바로사야. 스스로 그 자격을 증명했네. 바로 그 자리에서.”

“아니. 썅. 왜 하필 거기서 ‘다음 보스는 누가 할까요?’ 를 토론하고 있었냐고요. 애초에 그런 건 줄 알았으면 조용히 다시 내려갔을 거 아닙니까.”

“그럴 것 같아서 일부러 입 다물고 있었지. 에콰도 눈치가 좋으니까.”


망할 스토커. 망할 에콰. 왜 이 두 인간은 날 보스로 못 세워서 안달인 거지?

애초에 쿠스카의 말대로 난 8년 전에 조직을 배신하고 도망친 놈이다. 원래대로라면 조직에서 보낸 처형인에게 목이 따였을 운명이란 말이다.


그런 놈이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여전히 조직을 배신한 채로 돌아와 갑자기 보스 자리를 꿰어찼다. 누가 이 상황을 납득하겠느냔 말인가.


“제가 보스 한다고 하면 시라비아가 난리가 날 겁니다. 마피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미지잖아요. 배신자를 보스로 세운다? 이걸 누가 좋게 봅니까?”

“배신자이기 이전에 자네는 모르스 웅골라야. 누구나 인정하는 미다스의 여주인 모르스 에콰의 하나뿐인 아들. 그리고 오코넬의 뒤를 이를 ‘뻔’ 했던 최고의 처형인. 시라비아는 힘으로 지배하는 땅일세. 과거의 오명 따위는 앞으로의 업적에 비하면 금방 잊힐 거야.”


항상 그랬지만 이 노인네를 말발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아무리 주절거려봤자 반찬 투정이나 부리는 어린애처럼 다루기만 할 뿐이다.

스토커도 에콰도 내 편 아닌 내 편이라면 기댈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완벽하게 내게 적대적인 상대가 있지 않던가.


“어디 가나? 바르바로사.”

“쿠스카한테 갑니다. 보아하니 이 자리 하고 싶어서 안달인 것 같은데, 넘겨주려고요. 좋다고 하면서 받겠죠.”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하나? 그 쿠스카가?”


돌아서던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스토커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쿠스카는 자존심이 강하다. 시라비아 마피아의 최고 간부들은 다 그렇지만, 쿠스카는 특히 그랬다.


나사 빠진 미친놈인 것도 있지만 그런 와중에도 쿠스카는 자신의 자존심만큼은 확실하게 세우는 놈이었다.

굴러온 개뼈다귀가 있다면 집어 먹는 놈이 아니라, 그걸 굳이 강한 놈에게 물려주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빼앗으려 하는 변태 같은 놈이다.


그런 놈한테 보스 자리를 준다고 해봤자 결과는 뻔했다. 굴러들어온 자리를 쟁취하기보단 어떻게든 내게서 힘으로 빼앗아 가려 하겠지.

차라리 느긋하게 빼앗겨줄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생각해볼 필요는 있었다.


“쩝..”

“계산은 끝난 모양이군. 역시 바르바로사일세.”

“그 띄워 주기라도 하지 맙시다. 닭살 돋아.”

“띄워 주기가 아니라 놀리는 걸세.”

“지금 바르바로사를 놀리는 겁니까?”

“오, 스스로 인정했군. 역시 자네도 바르바로사가 될 생각이 있었구만.”


이 망할 노인네. 이길 수가 없네.


“그래서? 공업의 회장께선 뭐라고 하시던가?”

“바로 시라비아로 날아온다던데요. 저 데려간다고. 보스가 되자마자 자리를 비우게 생겼네요. 하하. 은퇴각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네.”

“하아..”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스토커는 술집 바깥을 슬쩍 눈짓했다. 그곳엔 크루아틀과 해골 아저씨가 서로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설명을 좀 해주겠나? 왜 자네가 그 검은 구멍에서 나왔고, 짐승 대제와 저... 고인과 함께 나왔는지.”

“고인이라니. 말도 하고 움직이는 해골한테 실례네.”

“그래도 망자에겐 예를 갖춰야 하는 법일세.”


퍽이나 그렇겠다.

어쨌든 스토커도 일단은 동맹 관계이므로 난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피스칼에서 있었던 짐승 사냥 계획. 그 흐름과 지하로 떨어지게 된 이야기. 그리고 지하에 있던 마을에 대해서도.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만 하던 스토커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뭐 아는 거 있어요?”


스토커는 다시 한 번 바깥의 해골 아저씨와 크루아틀을 살피더니 날 향해 목소리를 낮췄다.


“짐작 가는 건 있지만 확실하지 않군. 조금 더 조사한 뒤에 알려주겠네.”

“싱겁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네는.. 저 짐승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두게.”


스토커는 크루아틀을 눈짓했다.


“지금 전 세계를 저 짐승의 군대가 짓밟고 있네. 케르베로스 열차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도시 하나가 날아가고 있어.”

“열차포가 어디 갔나 했더니 밖으로 빠져나갔나 보네..”

“짐승에게 굴복한 나라와 짐승에게 대항하려는 나라가 서로 충돌하고 있네. 짐승과 사람의 싸움이었어야 하던 게 점점 사람과 사람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네.”


스토커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로선 그런 규모의 전쟁이 피부로 와 닿진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무관계하진 않다.

전쟁을 터뜨린 당사자가 바로 저곳에 있었으니까.


“저 짐승 놈 잡는다고 끝날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그렇겠지.”


크루아틀의 역할은 이미 끝났다. 놈은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짐승 군대는 진군하고 열차포는 불을 뿜는다. 거기에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크루아틀이 사라진다고 해서 전쟁의 열기가 갑자기 팍 식을 리는 없었다.


다만 스토커의 말처럼 크루아틀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건 동의한다. 해골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그 캄캄한 지하에서 죽기 살기로 싸웠을 텐데.


그때 하늘에서 굉음이 일어났다. 천둥이 치는 것 같기도 했고, 폭탄을 터뜨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니 먹구름 낀 시라비아의 하늘이 물결처럼 일렁거리다 쫙 벌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거대한 쇳덩어리가 둥둥 내려왔다.


패러데이보다도 훨씬 더 크고 웅장한 분위기의 배. 하늘을 나는 성이나 다름없는 저게 헤이카가 말했던 ‘가이아’ 라는 또 하나의 공중기동모함인 모양이다.


‘겁나 빠르네.’


수상할 정도로 빠른 속도. 사실 패러데이도 비슷했다.

마치 배 자체가 공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고, 모습을 감추거나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곤 했었다. 헤이카가 말하길 ‘초시공’ 이라는 기술력이라는데, 설명이 어려워서 못 알아들었다.


혹시라도 저 배까지 갈라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 크루아틀의 낌새를 살폈지만 놈은 이번만큼은 얌전했다.

그러는 사이 가이아에서 내려온 수송기가 마침내 시라비아 공터에 내려왔다.


그리고 수송기 문이 열리자마자 헤이카가 뛰쳐나왔다.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달리기로 헤이카는 내게 부딪쳤다.

두 팔이 날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묻은 얼굴과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저 어디 도망 안 가요.”

“...”

“그리고 멀쩡하게 살아있고요. 다친 곳도 벌써 다 나았어요. 역시 헤이카가 만들어 준 마법 의수 덕분인지 이전보다 훨씬..”


헤이카는 자기 입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선 해본 적 없는데..

그런 생각도 잠시뿐이었다.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니 떼어내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 지금은 헤이카가 하고 싶은 대로 두기로 했다.


이윽고 시라비아의 잿빛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 머금고 있던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망할 시라비아. 이럴 땐 눈치가 좋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주말 편히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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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개벽(3) - 우는 짐승 +1 23.02.10 190 9 14쪽
203 개벽(2) - 속고 속이며 23.02.09 191 9 14쪽
202 개벽(1) - 변하는 세상 +1 23.02.08 213 9 13쪽
201 짐승의 힘 23.02.07 201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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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굶주린 용 +1 23.01.30 194 8 13쪽
197 처형인의 상념 23.01.27 208 9 15쪽
196 이빨과 단검(11) - 증명 23.01.26 187 10 15쪽
195 이빨과 단검(10) - 들개 무리 +1 23.01.25 189 10 15쪽
194 이빨과 단검(9) - 패색(敗色) 23.01.24 199 10 12쪽
193 이빨과 단검(8) - 대가 23.01.23 209 8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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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이빨과 단검(3) - 제3세력 23.01.16 211 10 20쪽
187 이빨과 단검(2) - 죽은 비 23.01.13 214 9 16쪽
186 이빨과 단검(1) - 죽은 도시의 소란꾼 23.01.12 233 10 15쪽
185 중간 점검 +1 23.01.11 239 10 16쪽
184 새로운 아침 +1 23.01.10 227 9 14쪽
183 장막(20) - 쓴맛 23.01.09 203 9 16쪽
» 장막(19) - 잿빛 땅의 왕 23.01.06 193 10 17쪽
181 장막(18) - 지배자의 자격 23.01.05 227 10 19쪽
180 장막(17) - 상처 입은 짐승 +1 23.01.04 205 9 14쪽
179 장막(16) - 망자의 기록 +1 23.01.03 205 7 13쪽
178 장막(15) - 지하 +1 23.01.02 198 9 13쪽
177 장막(14) - 사냥꾼, 처형인, 짐승. +1 22.12.30 214 8 17쪽
176 장막(13) - 맞물리지 않는 이상 +1 22.12.29 215 1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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