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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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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52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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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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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추천
10
글자
19쪽

장막(13) - 맞물리지 않는 이상

DUMMY

#1


야차가 살아났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야차에게 초재생이 발현됐다.


“...어떻게 한 거예요?”


다들 멍청하니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 와중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내가 물었다.

내 목소리에 시카는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아주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 기쁜 듯, 어쩌면 절망에 가까운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띤 시카는 떨리는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그녀의 입에선 짧은 신음만 나올 뿐이었다.


아마 본인조차 모르는 이상 사태.

감응자의 능력이 비감응자에게 적용되는 일도 있던가? 아니면 능력의 전염 같은 개념인가?

어쩌면 강화된 시카의 초재생이 주변도 재생시키는 거라면..


‘각성.’


그러고보니 헤이카가 그런 단어를 썼었다.

시카의 초재생은 주변에 미미하게 영향을 끼치는 단계였지만, 각성에 이른다면 타인을 초재생으로 회복시키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이게 헤이카가 말한 각성이라면 정말 뜻밖의 수확이다. 초재생은 쓰임새에 따라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능력이니까.


“설마 뒤지고 나서 꾸는 꿈은 아니겠지..”


와중에 멀뚱히 있던 야차는 자기 몸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아무렴 꿈은 아니겠지.


“초재생이야. 시카의 초재생이 주변 사람까지 재생시키기 시작한 거지.”

“..그런 게 되는 거냐?”

“헤이카가 말한 적 있어. 불가능한 건 아냐.”

“망할.. 대사 다 치고 죽었잖아. 쪽팔리게 살리면 어떡하냐.”

“미, 미안해요..”


덜덜 떠는 시카가 말했다. 어쩐지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미안해요. 미안.. 미안해요... 내가 살려버렸어.. 내가.. 미안해요..”

“아니, 진심으로 탓하는 건 아닌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초, 초재생을 제어할 수가 없어서.. 어떡해... 아아..!”


시카는 이젠 허공을 쳐다보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카를 향해 얼굴을 굳힌 야차는 긴 숨을 흘리곤 내게 말했다.


“야. 먼저 가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뭐? 아니, 시카는 아직 필요한데.. 그리고 초재생이 저렇게 각성했다면 우리 쪽 피해를 복구할 수도..”

“너. 이런 꼴을 보고도 더 부려 먹겠단 거냐?”


야차의 따가운 눈초리에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했다

시카는 이젠 자기 머리를 두들기거나 쥐어뜯을 기세였다. 이런 상태의 그녀에게 뭔가를 더 부탁할 순 없었다.


알고 있다. 감응자는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얘긴 많이 들었으니까.

백사병 감염자인 나도 비슷한 처지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기분을 안다. 시카는 지금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맡긴다.”


하는 수 없이 시카를 야차에게 맡기고 돌아섰다.

벽을 넘어 돌아오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윈터와 캐쉬퍼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혹시 봤어요?”

“저 사람이 초재생으로 살아나는 걸 말하는 거라면 다 봤어요.”

“이런.”

“어디 가서 떠벌리진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조금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지금은 크루아틀이 우선이니까 집중하죠.”


찝찝한 표정의 두 사람이 끄덕였다.

그런 우리를 재촉하듯 멀리서 크루아틀이 우는 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




...




“무슨 일 있어?”


돌아온 내 얼굴을 보더니 헤이카가 물었다. 역시 얼굴에 티가 나는 모양이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닙니다. 나중에 말할게요. 지금은 저놈부터 마무리하죠.”


용의 머리를 짓밟고 선 크루아틀이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허리를 구부정하니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슈트에선 쉴 새 없이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 정도로 열기가 쌓였는데도, 어떻게든 식히려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슈트를 벗어주면 좋겠지만 놈의 슈트는 아직 기능은 하는 모양이다. 패러데이를 쪼개고 황제 기사를 무너뜨리고 우릴 이 꼴로 만든 그 빛의 칼날을 여전히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제 남은 카드는 하나.’


연합의 조사 내용대로라면 무효화 능력은 크루아틀의 인간성을 서서히 없앤다.

그리고 놈은 인간성이 사라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내뺄 정도로.


“패러데이를 잃었고, 크롬벨 팀도 전투 불능. 베인도 다들 부상에 노페이스도 상황은 비슷하네.”

“그리고 황제 기사는 저기 자빠져있죠. 망할 도마뱀.”

“죽진 않았을 거야. 다만 저래서야 더 이상 도움은 안 될 것 같네.”


헤이카는 한숨을 푹 쉬었다.


“크루아틀이 이 정도로 성가실 줄은 몰랐어. 만약의 경우지만.. 무효화도 제대로 안 먹히면 정말 뒤가 없어.”


그나마 수도 구석구석에 침투시킨 올드 아일랜드의 기사 놈들이 성난 짐승 무리가 이곳까지 들이닥치는 걸 막아주고 있다.


하지만 저놈의 최종 보스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헤이카의 말대로 무효화까지 안 먹히면 남은 수도 없고,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부터 생각해야 될 판이다.


다 재치고 지금부터 도망치는 걸 생각한다면? 그럼 그 뒤는 어떻게 하지?

크루아틀은 회복할 테고, 놈의 군대는 전 세계를 짓밟을 거다. 지금도 어딘가는 공격당하고 있을 테고.


‘여기서 끝을 내야겠지.’


이미 뒤는 없었다.



#2


“...”


뜨거운 연기에 휩싸인 채 크루아틀의 헬멧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렌즈가 반짝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용의 불로 까맣게 타버린 땅 위를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갑옷처럼 두꺼운 검은 코트에 새까만 나이프를 쥔 남자는 백사병 감염자들의 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헤이카 미켈런의 칼날, 산.

크루아틀은 그 예리한 칼날이 다가오는 걸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당장은 무기를 쥘 생각도, 손톱을 드러낼 생각도 없었다.


마침내 산이 멈춰 섰다. 용의 부러진 뿔이 박혀 있던 곳이었다. 그는 뿔을 물끄러미 살폈고 크루아틀은 고개를 기울였다.


“용의 뿔은 처음 보나?”


크루아틀이 물었다. 뿔을 가볍게 두드리던 산이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 봐. 애초에 요즘 세상에 어디서 용 봤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부터 받으니까.”

“용은 존재한다.”


크루아틀은 자신의 발아래 깔린 용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안 믿어. 그런 세상이야.”

“지금의 인간들은 멍청해졌군. 존재하는 것을 믿지 못하다니.”

“미안한데 인간은 원래 멍청했어.”

“내가 아는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산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옛날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 별로 흥미 없는데.”

“무엄하군. 이 몸의 말을 끊다니.”

“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무섭겠어. 그리고 넌 내가 모시는 왕이 아니야. 짐승에게 고개를 숙일 생각은 없어.”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산이었다. 크루아틀은 그 비틀린 미소가 어딘가 소름 끼친다고 느꼈다.


“그럼 칼잡이여. 네가 충성을 바친 왕은 저 여자인가?”


크루아틀의 헬멧은 산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산은 몸을 돌렸고 다가오는 헤이카를 발견했다.


“헤이카. 위험하니까 뒤에 남으라고 했잖아요.”

“괜찮아.”


마를렌이 옆에 딱 붙어 있었지만 크루아틀이 상대라면 헤이카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산은 그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정작 헤이카는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산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오른편에 붙었다.


크루아틀은 그런 헤이카를 향해 코웃음 쳤다.


“그 칼잡이 말이 맞다. 전사도 아닌 왕이 전선에 나서는 건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전사가 아니라 미안하네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직접 얘기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마지막? 죽기 전의 유언이라면 들어주지.”


헤이카가 피식 웃었다.


“당신은 어디까지 정복할 셈이죠?”

“신들의 자리까지.”

“신이 될 생각은 없을 테고요. 그렇죠?”

“난 신이 아니라 정복자다. 대제에게 걸맞은 신들을 앉혀야겠지.”


크루아틀의 대답에 헤이카는 입술을 매만졌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월교가 그런 당신을 그냥 내버려둘까요?”

“무슨 말이지?”

“월교는 이미 자기네들의 신이 있어요. 저 세상 밑바닥에 처박힌 낡아빠진 미친 신들을 끄집어내서 다시 세상 꼭대기에 세우려는 광신도들이죠. 당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지 않나요?”


크루아틀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그의 헬멧 속 렌즈가 그을린 지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상념에 잠긴 짐승 대제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몇 분이나 지난 뒤였다.


“그 신들을 정복하면 되는 일이군.”

“맙소사. 아직 그 머릿속 뇌는 짐승인가 봐요? 월교가 그렇게 되게 두겠어요? 그들이 방해하러 올 텐데요.”

“그들도 정복한다.”

“그렇게 대단한 꿈을 가진 대제께서 정작 지금은 블라다카의 똥개 노릇이라니. 블라다카를 정복할 생각은 없는 거죠? 왜죠? 겁나서 그런가?”


헬멧 안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승 특유의 으르렁거림이 섞여 있었다.

마를렌은 강철검을 비틀었고 산은 카르마 나이프를 앞세웠다. 둘 사이에 있는 헤이카는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봐요. 대답도 못 하네. 블라다카를 배신할 배짱도 없으면서 누굴 정복하겠다는 건지. 정복자가 아니라 서커스에서 줄넘기하는 짐승이나 다를 게 없네요.”

“헤이카 미켈런..!”

“그 분노는 정말 절 향하고 있나요? 제가 미우면 지금 눈앞에서 찢어버려도 좋아요. 다만, 당신의 유일한 희망도 사라지는 거겠지만요.”


으르렁거리던 크루아틀의 헬멧이 기우뚱했다.


“희망이라고? 네놈이 희망이란 거냐?”

“크루아틀. 저한테 신이 있어요.”


크루아틀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자 헤이카는 산을 향해 눈짓했고 산은 찝찝한 얼굴로 크루아틀의 앞에 섰다.

코트를 벗은 산은 오른팔 소매를 걷어 크루아틀에게 내보였다. 평범한 사람의 오른팔이라고 생각하던 크루아틀은 이내 놀란 숨을 들이켰다.


“이게 대체 무엇이냐..?”

“신의 오른팔.”


산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썩 현실감이 없었지만, 헤이카의 말대로라면 신의 오른팔이라 불릴만한 것이 맞았다.

크루아틀은 경악 속에서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서진 그의 헬멧 하관부에서 침이 질질 흐를 정도로.


“이.. 어찌 이런 짓을....”

“불경하다고 할 셈은 아니겠죠? 당신도 그저 블라다카가 시키는 대로 형식적인 기도를 할 뿐이잖아요. 가짜 신앙. 가짜 기도. 불경한 걸로 치자면 당신이 훨씬 불경해요.”

“..인정하지. 하지만 인간은 신을 칭송해야 마땅하다. 내가 보아온 인간들은 모두 그랬다. 예외 없이 전부.”


헤이카는 꺼림칙한 미소를 보였다.


“내가 원하는 건 신이 없는 세상이에요.”

“신이 없다면 세상은 온전히 사람의 것이 될 테고, 거기선 다툼도 욕망도 사람의 힘으로 억제할 수 있어요. 전쟁이 사라질 테고 평화가 올 거예요. 멍청한 욕망으로 자멸하는 일도 없어지겠죠.”

“신들의 자리까지 정복하겠다는 당신이랑 전 다를 게 없어요. 우리의 목적지는 같아요. 따지고 보면 제가 하는 일들도 모두 정복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크루아틀은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꿈이 크군. 설령 신들이 없어지더라도 인간은 멋대로 신을 만들어낼 거다. 전쟁이 사라지지도, 욕망이 억제되는 일도 없을 거다. 만약 정말로 억제한다면 인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겠지. 너희의 문명이 발전될 수 있던 것도 모두 욕망 덕분이니까.”


헤이카는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크루아틀은 슈트를 삐걱거리며 물었다.


“제대로 짚었나?”

“아뇨. 그냥 놀란 거예요. 짐승이 인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을 줄 몰라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짐승이 인간을 학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너희보다도 인간성에 대한 이해도는 내가 더 높겠지.”

“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억제하면 될 일이죠.”

“진화를 멈춘다고?”

“진화는 누군가가 주도하면 돼요.”


헤이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모든 인류의 욕망을 억제해놓고 누군가의 욕망은 억제하지 않겠다? 형평성에 어긋난다. 그리고 억제되지 않은 욕망이 하나라도 존재하는 이상, 그건 더 큰 위험이다.”

“인간에게 맡기지 않을 거예요. 기계에게 맡길 거죠.”


하늘을 오가던 검은 드론 한 대가 고도를 낮췄다. 크루아틀은 그 드론을 노려보았다.


“베르나데트.”


{ 네. 박사님. 여기 있습니다. }


드론에서 흘러나온 여성의 목소리는 인간과 닮아있었지만, 그 말투는 확실히 기계처럼 딱딱했다.

크루아틀은 고개를 저었다.


“인류의 욕망을 강제로 억제하고 이깟 기계에게 진화를 맡긴다고?”

“우습죠? 하지만 욕망이란 변수를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계산된 시스템의 관리 아래 인류 문명은 계속 발전할 거예요. 점점 살기 편한 세상이 되겠죠. 전쟁도 없고, 추위나 허기에 시달리지도 않으면서 이 세상을 멸망하지 않게 영원히 보존할 수 있어요.”

“....”


한껏 연기를 뿜어내던 크루아틀이 구부정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그는 반쯤 남은 헬멧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이 헬멧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강철이 쭉쭉 찢어지는 소리에 산과 마를렌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인가?”


마침내 헬멧을 전부 뜯어낸 그가 물었다.


감춰져 있던 짐승 대제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는 짐승 그 자체였다.

사자도, 늑대도, 호랑이나 곰도 아니다. 적어도 이 시대에 알려진 짐승의 형상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건 짐승이란 굴레에 속한 모습임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면 이해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정복자는 하나뿐이다. 누군가와 손을 잡는 순간 정복자는 자격을 잃고 정복당하는 존재가 된다.”

“아쉽네요.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미 블라다카에게 머리를 숙이는 크루아틀에겐 모순적인 말이었지만 헤이카는 더 이상 그의 맹점을 들쑤시려고 들진 않았다.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춰 검은 드론이 헤이카의 어깨 위로 날았다.


“헤이카 미켈런. 너는 정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크루아틀의 슈트에서 흘러나오는 연기가 점점 옅어졌다. 희번뜩하게 뜬 짐승의 두 눈동자가 높은 곳에서 헤이카를 내려다보았다.


“정복자는 폭군이다. 허나 힘으로 그 위에 설지언정 정복한 뒤엔 나의 것이 된다.”

“나의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땅, 국가, 국민, 그들의 소유물, 꿈과 미래 모두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들 모두가 내게 정복당하는 것에 어떤 불만도 품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이야말로 정복이다. 그 모든 걸 무시하고 네 이상만을 강제하는 건 정복이라 부를 수 없다.”


짐승 대제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녹아내린 강철이 자극적인 소음을 냈다.

불어오는 바람에 붉은 망토가 펄럭거렸다. 짐승으로써 인간이길 소망하는 그의 멈추지 않는 의지처럼.

그렇기에 정복이란 수단을 택한 짐승은 인간을 꾸짖었다.


“그러니 정복에 대해 입에 담지 마라. 네놈이 하려는 일은 정복이라 부를만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사람을 위한 일도 아니다. 그저 네가 영웅으로 기록되고 싶어서 벌이는 어처구니 없는 만행이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헤이카의 미소는 싸늘하게 사라졌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로지 경멸뿐이었다.

자신에게 줏대를 들이미는 것이 인간도 아닌 짐승이란 사실에, 그 짐승조차 자신을 틀렸다고 하는 이 상황이 헤이카를 잔뜩 긁어놓았다.


“산. 이 짐승을 죽여.”


냉담하게 뱉은 헤이카의 명령. 그녀의 칼날인 산은 코트를 다시 두르고 카르마 나이프를 비틀었다.

크루아틀의 사나운 눈동자가 헤이카로부터 산에게 옮겨갔다. 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뚝뚝 흐르는 피가 펄펄 끓었다. 그가 마신 용의 피였다.


그 순간 감응자의 파장이 터졌다. 어느새 돌아왔는지 전혀 다른 방향에서 터진 파장은 크루아틀을 덮쳤다.


“...”


크루아틀은 또다시 자신의 인간성이 사라져가는 걸 느꼈다.

머릿속에 멍해졌고 두 다리로 선 몸이 자꾸 구부려지는 것 같았다. 기억하고 있던 인간의 언어를 조금씩 상실했다.


무효화에 흔들리는 짐승 대제를 노리며 산이 몸을 날렸다. 눈으로 볼 수조차 없는 그 귀신같은 몸놀림이 어느새 목덜미까지 들이닥쳤다.

새까만 카르마 나이프의 칼날이 슈트에 닿았다. 만전의 상태라면 몰라도 한껏 열을 머금고 약해진 슈트는 카르마를 막아낼 수 없었다.


“..어?”


목을 보호하던 슈트는 잘랐다. 하지만 카르마 나이프는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했다.

크루아틀의 털이 수북한 목에 닿자마자 나이프가 멈춰버린 것이다. 카르마의 칼날이 박히질 않았다.


원래 지닌 가죽보다 약하다면 슈트엔 무슨 의미가 있지? 산이 순간 품은 의문에 대제의 입이 움직였다.


“그, 칼날, 은 이 시대의 물건이, 아니군.”

“...!”


묵직한 주먹이 재빠르게 산을 강타했다. 그대로 나가떨어진 산이 바닥을 구르는 동안, 크루아틀의 육중한 몸이 공기를 찢으며 내달렸다.

그는 그을린 콘크리트 잔해를 후려쳤다. 그의 발톱에 뜯겨나간 잔해들이 하늘을 날며 우수수 쏟아졌고 그 너머에 숨어 있던 윈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제를 올려다보았다.


“ - ! ”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대제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피할 틈조차 주지 않은 압도적인 기세에 그녀는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짐승의 주먹은 윈터를 으깨기 전에 멈추고 말았다.


“허?”


크루아틀은 자신의 주먹을 막아낸 검은 후드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옆에 주저앉은 윈터는 입만 뻐끔거리며 자신을 구한 후드를 올려다보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건 잠시 멈춰주면 좋겠군.”

“..아... 아? 해골??”

“..능력 지우는 거 말이다.”


얼떨결에 끄덕인 윈터가 능력을 지우자 크루아틀은 빠르게 인간성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크루아틀의 주먹을 받아낸 남자도 자신의 본래 힘을 되찾고 있었다.


‘델라리온 머스칼? 아니다.’


그 얼굴 없는 괴물은 지하 깊숙한 곳에 박아놨고, 이 땅에선 힘을 쓰지 못한다.

그가 이곳에 갑자기 튀어나올 리는 없으며 하물며 양동으로 공업이 그를 구출했다고 하더라도 머스칼은 크루아틀에게 대항하지 못할 터였다.


그럼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크루아틀은 그런 의문을 품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누구냐?”

“흠. 비스타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우린 장막 너머의.. 아, 그래.”


후드가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크루아틀은 그 후드 아래에 있는 것이 새하얀 백골이란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바렉? 아니, 넌 바렉도 아니다. 대체...”


이건 이 시대에 있을만한 것이 아니다.

크루아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의 벽이 허물어져 가는 걸 느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백골의 남자는 크루아틀의 주먹을 받아낸 물건을 천천히 내렸다. 놀랍게도 그건 검도, 방패도 아닌 총이었다.


서늘한 검은 광택을 뽐내는 거대한 저격총.

그 총을 쥔 뼈밖에 없는 검은 저격수.


“난 장막 너머에서 온 사냥꾼이다. 이름은 알 필요 없다.”


새까만 총구가 그를 겨누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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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이빨과 단검(8) - 대가 23.01.23 209 8 20쪽
192 이빨과 단검(7) - 조디악 23.01.20 207 10 18쪽
191 이빨과 단검(6) - 가려진 것들 +1 23.01.19 192 10 23쪽
190 이빨과 단검(5) - 사탕과 아이 +1 23.01.18 210 9 17쪽
189 이빨과 단검(4) - 진실 +1 23.01.17 205 10 21쪽
188 이빨과 단검(3) - 제3세력 23.01.16 211 10 20쪽
187 이빨과 단검(2) - 죽은 비 23.01.13 214 9 16쪽
186 이빨과 단검(1) - 죽은 도시의 소란꾼 23.01.12 233 10 15쪽
185 중간 점검 +1 23.01.11 239 10 16쪽
184 새로운 아침 +1 23.01.10 227 9 14쪽
183 장막(20) - 쓴맛 23.01.09 203 9 16쪽
182 장막(19) - 잿빛 땅의 왕 23.01.06 193 10 17쪽
181 장막(18) - 지배자의 자격 23.01.05 227 10 19쪽
180 장막(17) - 상처 입은 짐승 +1 23.01.04 205 9 14쪽
179 장막(16) - 망자의 기록 +1 23.01.03 205 7 13쪽
178 장막(15) - 지하 +1 23.01.02 198 9 13쪽
177 장막(14) - 사냥꾼, 처형인, 짐승. +1 22.12.30 214 8 17쪽
» 장막(13) - 맞물리지 않는 이상 +1 22.12.29 216 10 19쪽
175 장막(12) - 정복자(征服者) 크루아틀 +1 22.12.28 201 9 14쪽
174 장막(11) - 불을 지피는 자들 22.12.27 200 9 16쪽
173 장막(10) - 덫 22.12.26 200 7 13쪽
172 장막(9) - 강철의 관, 강습 투하 22.12.23 217 10 14쪽
171 장막(8) - 전야(前夜) +1 22.12.22 210 10 18쪽
170 장막(7) - 약점 22.12.21 216 9 15쪽
169 장막(6) - 짐승이 두려워하는 것 +1 22.12.20 218 8 17쪽
168 장막(5) - 윈터(Winter) 22.12.19 193 9 16쪽
167 장막(4) - 실수 22.12.16 221 8 22쪽
166 장막(3) - 공백의 구멍 22.12.15 223 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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