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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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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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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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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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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장막(4) - 실수

DUMMY

#1


짐승 대제 크루아틀이 준 유예가 6일째 되는 날.

그리고 각국의 눈치 싸움이 극에 달하는 바로 이 순간, 세계 연합 니로퍼는 터무니없는 큰 수를 내질렀다.


짐승 대제와의 협상.

비록 월교의 교주인 블라다카를 인질로 일궈낸 일방적인 협상 자리였지만 크루아틀은 협상에 응했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다.


“시민의 대피는?”

“전부 완료됐습니다.”

“군 배치는?”

“평화 유지군의 전군을 보르단 인근에 배치했고, 뉴런드 국경 수비대의 경계 태세는 최고 단계까지 조정했습니다.”

“에이전트는?”

“모두 작전대로 배치했습니다.”


뉴런드가 이렇게 안과 밖으로 최대 규모의 무력을 과시하는 일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부족했다. 적어도 루터스 연합 총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짐승 대제 크루아틀.’


교주 블라다카의 휘하 여섯의 사도 중, 첫 번째 사도이자 가장 위험한 사도라고 알려진 괴물.


어째서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짐승이 ‘사도’ 라는 성스러운 직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크루아틀이 말도 안 되는 괴물이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피스칼은 강대한 국가였다.

레베스타, 이바렌 연방, 시라비아의 사이에 낀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도 피스칼은 무엇하나 빼앗기지 않았고, 그들이 보유한 에이전트 또한 강력한 능력자들이었다.


힘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국가가 당연히 가져야 할 국방력에 있어서 피스칼은 절대 약한 국가가 아니었다.


그런 피스칼이 손도 쓰지 못하고 장악당했다.

정부는 붕괴했고, 국민은 난민이 되었으며 그들이 자랑하던 군대와 강력한 에이전트들은 모조리 짐승들의 이빨과 발톱에 갈가리 찢겨나갔다.


말 그대로 나라를 전복시킨 짐승이 이젠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걸어왔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규모의 괴물 군대를 내세워서.


상대가 강적일수록 강하게 나가야 한다.

얕보이지 않고, 선수를 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설령 비겁하고 손가락질당하는 수모를 겪더라도 이겨야만 한다.


이 시대의 인류를 대표하는 ‘세계 연합’ 의 머리로서 루터스 총장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크루아틀을 배제할 셈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될 부가적인 전리품도 당연히 취할 것이다.

보다 깊은 목적을 위해서.


“긴장했나?”


그런 루터스를 향해 다가온 건 부총장인 어셔 스콧이었다.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쓴 스콧은 오늘도 여전히 시원한 콜라 한 병을 들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목을 축였다.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가끔은 자네가 부러워.”

“응? 뭐가 부럽나? 뱃살? 멋진 수염?”

“자네의 정신 상태.”

“그거 욕은 아니지?”

“물론.”


스콧이 껄껄 웃었다. 그의 선글라스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가레스도 없어진 하늘은 이제 온전히 인류의 것이었다. 이클립스 공업으로부터 급하게 지원받은 항공 전력도 총장의 지시 한 마디면 바로 뜰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하늘을 바라보던 스콧이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곧 저 하늘에서 괴물이 내려온다니. 그건 좀 기분 나쁘구만.”

“..스콧.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

“왜 그런 걸 물어? 자네답지 않은데?”

“나답지 않다고?”

“내가 아는 루터스라는 남자는 자기 계획에 늘 확신을 가졌던 남자였네. 근데 지금은 어째 확신보단 불안감이 더 많은 것 같아.”


맞는 말이었다. 루터스는 부정할 수 없었다.


“스콧. 역시 자네한텐 뭘 숨길 수가 없겠어.”

“기운 내라고. 자신감 있게. 어깨 펴고. 응? 연합 총장이잖아.”

“...나도 이제 늙었어. 검을 들고 뛰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이야. 마지막으로 검자루를 잡은 게 얼마 전인지도 모르겠더군.”


스콧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 솜씨가 녹슬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니. 녹슬었어. 결국, 인간의 몸이란 건 점점 약해지기 마련이니까. 예전의 나였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계획을 짜지도 않았겠지.”

“그건 그렇지. 하하.”


스콧의 두툼한 손이 루터스의 어깨를 두들겼다. 루터스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끝에 스콧을 향해 말했다.


“스콧. 부탁이 있는데.”

“말해보게.”

“계획이 틀어지면 아마 난 죽을 가능성이 높아.”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치곤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입맛을 쩝 다신 스콧이 콜라를 한 모금 머금고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뒷일은 자네가 맡아줘.”

“자네 자리를 내가 차지하란 소린가?”

“그래.”


스콧이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이보게. 난 먹는 거 좋아하고 돈 버는 거 좋아하고, 재밌는 것만 찾아다니는 배 나온 아저씨에 불과해. 이런 내가 자네 자리를 대신하라니, 무슨 농담을 그리하나?”

“자네밖에 없어. 스콧.”


농담이 아님을 강조하듯, 루터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굳센 눈동자를 마주 보던 스콧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알겠네. 알겠어. 연합 총장쯤이야.”

“다른 쪽도 부탁하네. 굴 알리스.”

“..이봐. 나보고 자네의 그 꺼림칙한 동아리 회장까지 맡으라는 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 안 하나?”

“연합, 굴 알리스, 프로젝트, 그리고 칼날. 우리가 준비한 건 모두 세상을 위한 일이야. 지휘봉을 잡을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해.”


불룩 나온 배를 두드리는 스콧은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대답했다.


“알겠네. 하지만 기억해두게. 가장 최선은 자네가 살아남는 거야.”

“물론 알고 있지.”

“어휴. 정말 자네 고집은 꺾을 수가 없구만.”


피식 웃은 스콧이 손을 내밀었다. 루터스도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두 남자는 서로를 가볍게 안아주고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어쩌면 이게 서로 간의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르기에. 두 사람의 인사는 마치 작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길었다.


“슬슬 가보겠네. 반병신이 돼도 좋으니까, 살아서만 보자고. 루터스.”

“물론이지. 스콧.”


그렇게 두 남자는 서로 등을 돌렸다. 스콧은 빠른 걸음으로 현장에서 멀어졌고, 남은 루터스는 다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루터스를 향해 다가온 여인이 있었다.

이런 장소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의 여인, 그녀는 보르단의 에이전트인 롤란이었다.

그녀는 멀어지는 스콧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총장님이랑은 사이가 유독 좋아 보이네요. 총장님의 인간관계엔 ‘서먹서먹’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표현이 서툴 뿐이지. 스콧은 나랑 오래 알고 지낸 동료니까.”

“저랑은 언제쯤 친하게 지내실 생각이에요?”


롤란은 약간 투덜거리듯 말했다. 루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자네랑 이미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롤란.”

“절 경계하고 계시잖아요. 총장님.”

“그야 마음을 읽는 감응자는 늘 경계할 수밖에 없지.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나?”

“섭섭하네요. 전 한 번도 총장님 머릿속을 들여다본 적 없는데.”

“당연히 없어야지.”


이 자리에 에이전트 롤란과 특별히 동행한 것은 크루아틀의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가 좋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에 맞춰 계획을 변동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상대의 의식을 읽을 수 있는 롤란은 이번 협상에서 상당히 빛을 보는 에이전트였다.


“롤란. 블라다카는 여전히 의식이 없던가?”


하늘을 바라보던 루터스가 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블라다카를 구속한 감옥을 살피던 롤란이었다.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없었어요. 죽은 건 아니지만, 의식을 되찾진 못하고 있어요. 마치 스스로 의식을 닫아놓은 것처럼.”

“자네를 경계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블라다카는 이쪽의 에이전트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말했으니까.”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놈은 특별한 ‘눈’ 을 가지고 있어.

“눈?”


롤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확한 능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놈이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델라리온 머스칼이 섣불리 블라다카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던 거야.”

“델라리온 머스칼이라니.. 공업의 그 괴물이요?”

“그래. 델라리온 머스칼은 원래 블라다카를 사냥하려던 사냥꾼이었거든. 그런 괴물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무언가’ 를 블라다카는 가지고 있어. 자네 능력이 자기한테 위험하다는 걸 알고 의식을 닫아버렸을 가능성이 높아.”

“성가신 남자네요. 흐음.”

“그래도 됐어. 지금은 블라다카가 아니라 크루아틀을 저지하는 게 제일 중요한 목표니까.”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롤란와 루터스는 허겁지겁 달려온 군인을 바라보았다.

군인은 루터스를 향해 벅찬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총장님! 크루아틀이 방금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루터스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콧의 말대로 저 하늘에서 곧 짐승들의 대제가 내려올 것이다.


“..그래. 오는군.”


그게 재앙이 될 지, 기회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루터스는 마지막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선 롤란이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2


“여기서부턴 잠시 눈을 가리겠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윈터는 뚱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보안 요원이 그녀의 눈을 안대로 가렸다.

그렇게 끌려가다시피 한 움직임으로 윈터는 걸었다.


먼저 긴 복도를 지났다. 그리고 꺾고, 꺾고, 둥글게 도는가 싶더니 다시 긴 복도였다.

눈을 가린 탓도 있지만 대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알기 어려운 장소였다. 이런 길을 외우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어쩌면 같은 장소를 뺑뺑 돌며 길을 헷갈리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 정도로 허술한 장소는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벗으셔도 됩니다.”


답답한 안대를 재빨리 벗자 윈터는 상당한 보안 장치가 걸려 있는 보안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런 문이 세 개였다. 하나를 열고 들어가고, 또 하나를, 그 너머에 또 하나를 열고 나서야 윈터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나 넓은 장소였다.

상당히 지하라는 걸 고려해도 이 정도 규모의 시설을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 그녀에겐 마냥 신기했다.


‘이 공간 자체가 감옥인가?’


바닥과 천장, 사방이 모두 두꺼운 쇳덩어리로 된 차가운 곳.

그리고 중앙에 덩그러니 있는 둥근 콘크리트 덩어리는 저번에 블라다카를 가둔 그 감옥이었다.


윈터는 그 덩어리 안에 여전히 갇혀 있을 블라다카를 생각하며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정장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전, 작전 브리핑을 맡았던 연합 본부의 알렉스 코튼이었다.


“에이전트 윈터. 조금 늦었군요.”

“엘리베이터가 더럽게 느려서요.”

“아, 그건 그렇죠. 느리긴 합니다.”


알렉스는 안경을 고쳐 쓰며 윈터와 함께 콘크리트 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주변에 기묘한 장치를 두고 그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는 상당히 기괴한 모습이었다.

장치들도 현대 과학 기술이라기보단, 마치 마법진처럼 주변에 복잡한 문자와 원, 그리고 식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들을 말없이 살펴보던 윈터를 향해 알렉스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럼 작전 내용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에이전트 윈터께선 위쪽에서 ‘암살 작전’ 이 진행되는 동안 블라다카가 수상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셔야 합니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곤 하나 이제 대놓고 암살 작전이라고 털어놓는 알렉스였다.

윈터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 저런 상태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상대는 월교의 교주니까요. 만약을 대비한 보험입니다. ‘무효화(無效化) 능력’ 을 가진 감응자는 전 세계에 윈터 씨뿐이니까요.”


무효화.

그건 연합에서조차 극비로 치부되는 윈터의 능력이었다.


온갖 감응자의 능력을 봉쇄하고, 감응자 뿐만 아니라 모든 ‘이질적인 것’ 을 일방적으로 금지시키는 능력은 단순히 무효화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건 아니었지만, 편의상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이질적인 능력. 즉, 이능력의 범주가 어디까지인가를 기준으로 삼는 건 굉장히 애매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가진 능력은 그녀 본인이 생각하기에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다면 모두 무효화 당한다.


그런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윈터는 젊은 나이에 수준급의 에이전트가 될 수 있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루저의 파트너로 자리 잡을 수 있던 것이다.


“흠. 크루아틀이 방금 막 보르단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해주세요.”


귀에 꽂은 통신기에 손가락을 올린 알렉스가 말했다. 윈터는 감옥 주변의 장치들을 가리켰다.


“주변 장치들도 꺼질 것 같은데, 상관없나요?”

“감옥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용도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감옥이 아니라 알맹이니까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에 윈터는 곧바로 파장을 퍼뜨렸다.

그녀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고, 불이 들어와 있던 감옥 주변의 장치들이 괴상한 소음을 내다 하나, 둘 불이 꺼졌다.


둥둥 떠 있던 둥근 콘크리트 감옥이 지면에 닿았다. 다행히 알렉스의 말처럼 그것 외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조용히 윈터의 능력을 유심히 지켜보던 알렉스가 말했다.


“말로만 들었지 정말 굉장한 능력이군요. 능력을 봉쇄시키는 ‘에이퍼로스’ 총알이 한 발에 엄청나게 비싸다는 걸 생각하면.. 윈터 씨는 걸어 다니는 에이퍼로스인 셈이겠습니다.”

“세밀한 제어가 안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요.”


심드렁하게 말하는 윈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편이었다.


무효화는 분명 강력한 능력이다. 상대의 능력을 봉쇄하는 능력은 어떤 강력한 감응자라도 무력화시키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의 무효화는 ‘그녀를 중심으로’ 일정 반경을 전부 무효화시키고, 적아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즉, 그녀가 적을 무효화시키면 같이 있던 아군들도 무효화의 영향을 받아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이유로 윈터는 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극비로 감춰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 그녀가 적의 능력을 지우는 것보다 파트너인 루저의 능력이 함께 사라지는 게 훨씬 큰 손해였기 때문이다.


‘거의 무능력자나 다름없는걸.’


윈터가 피나는 노력으로 다양한 근접 전투법이나 사격술을 익힌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에이전트임에도 능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실력으로 일을 해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려.. 주... }


“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알렉스가 물었다. 윈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 려주... 세... 요... }


분명히 들리는 목소리. 알렉스와 윈터는 슬그머니 블라다카를 가둔 감옥을 주시했다.


{ 살.. ..... }


어딘가 섬뜩한 음성은 감옥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윈터는 창백해진 얼굴로 알렉스를 보았다.


“저, 저 안에서 나는 것 같은데.. 혹시 제가 무효화해서 그런 거 아니겠죠?”

“아뇨. 아닐 겁니다. 감옥을 만드는 과정은 분명 감응자의 능력이 사용됐지만, 이렇게 완성된 감옥은 무효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콘크리트 덩어리에 가둬놓은 거니까요.”

“그럼 저 목소리는 뭐예요? 뭐라고 하는 건지..”

“...”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감옥을 향해 다가가 몸을 낮췄다. 그리고 콘크리트에 귀를 갖다 댔다.


“..살.. 려.. 주세요?”

“네?”

“제가 듣기론 ‘살려주세요.’ 라고 들립니다. 근데 여성분의 목소리처럼 들리는군요.”

“브, 블라다카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꾼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방심시켜서 나오려는 걸지도..”

“흐음.”


알렉스는 한 걸음 물러서 고민했다. 짧은 고민을 마친 그가 말했다.


“윈터 씨. 잠시 능력을 멈춰 주세요. 능력을 쓰겠습니다.”

“감응자셨구나.. 네, 일단 멈출게요.”


윈터가 능력을 거두자 주변 공기를 진동시키던 파장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서 알렉스가 파장을 터뜨렸다.

그의 파란 두 눈동자가 묘하게 빛이 났다.


“제 능력은 ‘투시’ 입니다. 별 볼 일 없는 능력이지만 벽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볼 수도 있죠. 아, 숙녀분의 옷 안쪽을 보진 않으니 오해하진 말아 주십시오.”

“안 해요. 그런 오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콘크리트 감옥을 주시하던 알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걸 보던 윈터는 점점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왜 그래요? 안에 블라다카가 없어요?”

“아뇨.. 아니, 없다고 해야 하는 건가..?”

“무슨 말을..”

“안에 있는 게 롤란 씨로 보입니다. 보르단 소속의 에이전트 롤란이요.”


윈터도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다. 알렉스는 감옥에 다시 귀를 갖다 대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블라다카 씨!? 저는 세계 연합 본부 테러대책국 긴급대응팀장 알렉스 코튼입니다! 안에 계시는 게 블라다카 씨가 맞습니까!?”

“묻는다고 답할까요..”

“..아니라고 대답하는군요.”

“블라다카가 다른 사람으로 모습을 바꿔서 우릴 교란시키는 걸 수도 있어요. 속지 마요.”

“윈터 씨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 감옥 안을 수시로 투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블라다카의 모습을 보았지, 롤란 씨의 모습이 보인 적은 처음입니다.”


무효화를 기점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그 사실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알렉스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럼 확인해봅시다. 블라다카가 모습을 바꾸는 건 명백한 ‘이변’ 이죠. 윈터 씨의 능력으로 지워지지 않겠습니까?”


윈터가 끄덕였다. 알렉스는 콘크리트에 귀를 갖다 댄 채 또다시 소리쳤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윈터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윈터가 다시 무효화를 사용했다.


알렉스의 능력이 사라졌지만, 그는 콘크리트 감옥에 갖다 댄 귀에 집중했다.

모습을 바꾸는 게 무효화로 사라진다면,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도 본래 블라다카의 목소리로 돌아갈 터였다.


“목소리가 그대로입니다. 롤란 씨의 목소립니다.”

“그럴 리가요. 능력 쓰고 있는데요?”

“..설마...”


다급히 통신기로 어디론가 연결한 알렉스였다.


“에이전트 롤란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총장님 곁에? 그녀가 지금 능력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알렉스의 얼굴에 묻어나오던 초조함은 잠시 뒤,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는 크게 뜬 눈으로 감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롤란의 능력은 의식을 읽는 것.. 의식... 블라다카의 의식에 닿았고... 의식..?”

“저.. 알렉스 씨?”

“..어쩌면 저희 모두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렉스는 재빨리 멀찌감치 있는 직원에게 달려오라고 손짓했다. 정장의 사내는 서둘러 달려왔다.


“리거. 감옥을 해제해주십시오. 어서!”


의아한 표정을 사내는 알렉스가 재촉하자 파장을 퍼뜨렸다. 그도 에이전트였다.

알렉스의 지시대로 그는 콘크리트 감옥에 접촉했다. 그러자 콘크리트에 쩍쩍 금이 가더니 알껍데기가 깨지듯 쫙 벌어졌다.


콘크리트 감옥이 벗겨지고 내부에서 또다시 구속한 사슬이 사라지자 한 여자가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알렉스가 본 것처럼 보르단의 에이전트 롤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윈터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이게 진짜 블라다카라면 무효화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해.’


윈터가 파장을 퍼뜨렸다. 그녀의 무효화는 제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이 자리의 나머지 두 에이전트의 능력이 사라졌다.


하지만 롤란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체포 당시 붙잡히던 그 하얀 남자는 온 데 간대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롤란? 롤란 씨 맞습니까?!”


알렉스는 다급하게 쓰러진 롤란의 머리를 받치며 물었다. 가늘게 눈을 뜬 롤란이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의.. 의식... 을.. 빼앗겼.. 블라다카는.. 제 몸에...”

“젠장! 지상! 지상팀! 위에 있는 에이전트 롤란은 블라다카입니다! 총장님 곁에 있는 건 롤란이 아니라 블라다카라고!”


알렉스가 통신기로 급히 소리쳤지만, 통신기 너머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거대한 땅 울림이 천장을 통해 전해져왔다.


이곳은 깊고 깊은 지하였다. 이런 곳까지 진동이 전해질 정도의 충격이 지상에서 있었다는 뜻이었다.


“선배..?”


윈터는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루저는 크루아틀 암살팀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는 지금 지상에서도 크루아틀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쿵! 쿵!

진동이 계속됐다. 마치 전쟁의 북소리처럼.


“윈터! 당장 지상으로 올라가 주십시오! 리거! 의료반을 불러요!”

“예!”


리거라 불린 사내가 뛰어갔고 윈터는 쓰러진 롤란을 바라보다 몸을 홱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안문 너머에서 뛰쳐나오자 보안 요원은 뭔가 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 그는 원칙적으로 윈터의 눈을 가리기보다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왔던 것처럼 복잡한 길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달린 윈터는 금방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닫혔다. 하지만 그녀는 곧 초조함에 휩싸였다.


느리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속도에 조바심이 났다. 그럴 순 없겠지만, 천장을 열고 뛰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루저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의 가지각색의 모습, 목소리, 그리고 그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까지.


“선배..”


윈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계속 눌렀다. 그럼에도 엘리베이터는 무심하게 여유로운 속도만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쿵 - !

또다시 진동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전쟁의 북소리처럼.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올렸습니다.


 주말 편히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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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5 개벽(14) - 철저한 준비 23.02.27 177 9 13쪽
214 개벽(13) - 자장가 +1 23.02.24 199 10 21쪽
213 개벽(12) - 관측자들 +1 23.02.23 178 10 14쪽
212 개벽(11) - 암살자 +1 23.02.22 168 10 12쪽
211 개벽(10) - 비정한 거리 +1 23.02.21 170 10 13쪽
210 개벽(9) - 꿈 23.02.20 182 9 16쪽
209 개벽(8) - 저주 +1 23.02.17 191 9 18쪽
208 개벽(7) - 반갑지 않은 손님 23.02.16 183 8 11쪽
207 개벽(6) - 낡아빠진 사냥꾼 23.02.15 172 9 14쪽
206 개벽(5) - 먹는 자들 +1 23.02.14 182 9 12쪽
205 개벽(4) - 짐승과 마법사 23.02.13 183 8 14쪽
204 개벽(3) - 우는 짐승 +1 23.02.10 190 9 14쪽
203 개벽(2) - 속고 속이며 23.02.09 191 9 14쪽
202 개벽(1) - 변하는 세상 +1 23.02.08 213 9 13쪽
201 짐승의 힘 23.02.07 201 9 12쪽
200 방황하는 자들의 기도 +1 23.02.06 230 8 14쪽
199 계약 23.01.31 205 10 14쪽
198 굶주린 용 +1 23.01.30 194 8 13쪽
197 처형인의 상념 23.01.27 208 9 15쪽
196 이빨과 단검(11) - 증명 23.01.26 187 10 15쪽
195 이빨과 단검(10) - 들개 무리 +1 23.01.25 189 10 15쪽
194 이빨과 단검(9) - 패색(敗色) 23.01.24 199 10 12쪽
193 이빨과 단검(8) - 대가 23.01.23 210 8 20쪽
192 이빨과 단검(7) - 조디악 23.01.20 208 10 18쪽
191 이빨과 단검(6) - 가려진 것들 +1 23.01.19 192 10 23쪽
190 이빨과 단검(5) - 사탕과 아이 +1 23.01.18 210 9 17쪽
189 이빨과 단검(4) - 진실 +1 23.01.17 205 10 21쪽
188 이빨과 단검(3) - 제3세력 23.01.16 211 10 20쪽
187 이빨과 단검(2) - 죽은 비 23.01.13 214 9 16쪽
186 이빨과 단검(1) - 죽은 도시의 소란꾼 23.01.12 233 10 15쪽
185 중간 점검 +1 23.01.11 239 10 16쪽
184 새로운 아침 +1 23.01.10 227 9 14쪽
183 장막(20) - 쓴맛 23.01.09 203 9 16쪽
182 장막(19) - 잿빛 땅의 왕 23.01.06 193 10 17쪽
181 장막(18) - 지배자의 자격 23.01.05 227 10 19쪽
180 장막(17) - 상처 입은 짐승 +1 23.01.04 205 9 14쪽
179 장막(16) - 망자의 기록 +1 23.01.03 205 7 13쪽
178 장막(15) - 지하 +1 23.01.02 198 9 13쪽
177 장막(14) - 사냥꾼, 처형인, 짐승. +1 22.12.30 214 8 17쪽
176 장막(13) - 맞물리지 않는 이상 +1 22.12.29 216 10 19쪽
175 장막(12) - 정복자(征服者) 크루아틀 +1 22.12.28 201 9 14쪽
174 장막(11) - 불을 지피는 자들 22.12.27 200 9 16쪽
173 장막(10) - 덫 22.12.26 200 7 13쪽
172 장막(9) - 강철의 관, 강습 투하 22.12.23 217 10 14쪽
171 장막(8) - 전야(前夜) +1 22.12.22 210 10 18쪽
170 장막(7) - 약점 22.12.21 216 9 15쪽
169 장막(6) - 짐승이 두려워하는 것 +1 22.12.20 218 8 17쪽
168 장막(5) - 윈터(Winter) 22.12.19 193 9 16쪽
» 장막(4) - 실수 22.12.16 222 8 22쪽
166 장막(3) - 공백의 구멍 22.12.15 223 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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