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havoc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을 구하는 육아일지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havoc
작품등록일 :
2024.02.12 01:14
최근연재일 :
2024.03.26 12:19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1,691
추천수 :
30
글자수 :
198,092

작성
24.03.11 22:07
조회
57
추천
0
글자
22쪽

엄마와 딸 사이의 거리

DUMMY

다행히도, 로렌으로 향하는 길에서 더 이상 사교도의 습격은 없었다. 이쯤에서 아델라이데도 사교도들의 포위망을 벗어났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모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을을 떠나고 이틀 뒤 모녀의 앞길을 괴한들이 가로막았다.


“팔려가기 싫으면 가진 거 다 내놔라!”


아델라이데는 길을 막고 조잡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사내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엄마, 여행길은 평화롭다면서요.”


사교도에 산적까지 나오는데?


“평화롭잖니, 마족도 안 나타나고.”


“······마족이 나와야만 위험한 거예요?”


일리엔은 엄마의 안전에 대한 감각이 정상인과 심히 괴리되어 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잖니, 해치울 수 있으······, 어머, 이러면 안 돼지.”


아델라이데는 대놓고 무시하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일리엔의 모범이 될 만한 선하고 평화적인 모습을 보이기로 결심한 게 엊그제 아닌가. 아무리 상대가 산적이라도 문답무용으로 때려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궁정 연회에서 봤던 귀부인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산적님들, 제가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어서 그러거든요. 그러니 길을 비켜주시면 안 될까요?”


산적들은 기가 찼다. 조금 전부터 두 모녀가 떠드는 것을 보니 숫제 자신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닥치고 있는 거 다 내놔!”


“마족? 우리가 그 마족보다 더 무서운 존재야! 우리가 그 유명한 성난 불곰단이라고!”


아델라이데는 자신의 성의를 무시하는 산적들의 모습에 한숨을 푹 쉬었다.


“싸우는 모습은 아이 교육에 안 좋잖아요. 제 딸 얼굴을 봐서라도 보내 줘요. 아이는 이 나라의 미래랍니다.”


“그럼 가진 거 내놔!”


“그러면 목적지에서 정착할 돈이 없어요.”


아델라이데는 성심성의껏 안 되는 이유를 알려 줬다.


보통 상대가 먼저 칼을 뽑았을 때는 평생 칼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델라이데의 방식이었다. 그런 익숙한 방법 대신 성녀가 할 법한, 말로 산적을 설복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자니 쉽지 않았다.


“오호, 정착할 돈이 있다?”


기껏 아델라이데가 돈을 주지 못하는 이유를 말했건만, 오히려 상대의 눈이 탐욕으로 번쩍인다.


“엄마, 돈 있다는 말을 왜 해!”


일리엔이 소리쳤다. 시선을 잠깐 내리자 엄마가 뭐 잘못 먹었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은 안 좋은 거잖니.”


성녀가 어떤 존재인가. 거짓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일리엔도 그렇게 자라야만 했다.


산적들은 모녀의 대화를 기다려주질 않았다.


돈은 있지만 뭔가 모자라 보이는 엄마와 똘망똘망하지만 그래봐야 힘없는 꼬맹이의 구성, 이걸 어찌 그냥 보내겠는가.


“얘들아, 쳐라!”


사내들이 도끼와 글레이브(넓적한 칼날이 달린 창) 등을 휘두르며 둘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델라이데가 한숨을 쉬었다.


“왜 말로 하니 안 들을까.”


그녀는 곧바로 검을 검집째로 휘둘렀다. 도끼는 쳐들었을 때 자루를 쳐 부러뜨렸다. 도끼날이 든 사람의 머리 위로 굴러떨어졌다.


“으악!”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끼 뒤쪽이 떨어져서 머리에 박히지 않았다. 대신 쇳덩어리가 얼굴 한가운데로 떨어지며 코가 부러졌다.


찔러들어오는 글레이브는 일리엔이 안 다치게 옆구리에 낀 뒤 검집에 싸인 칼끝으로 목젖을 찔러버렸다. 상대가 컥컥거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녀가 일리엔을 꾹 껴안자 마룬이 나머지 산적에게 발길질을 한다. 덩치가 큰 전마인데다 금속 편자까지 발굽에 박아 놨으니, 잘못 맞으면 즉사할 정도의 위력이 났다.


“애 교육에 안 좋게 말이야.”


교육적인 이유로, 상대를 죽이지는 않았다. 어디 한 군데씩 부러져서 나뒹굴 뿐이다.


“아구구.”


아델라이데는 결국 폭력으로 해결하게 된 현실에 한숨 쉬었다.


정작 일리엔은 활짝 웃고 있었다. 글레이브의 칼날이 코앞까지 떨어지는데도 전혀 겁을 내지 않았고, 코앞에서 싸움을 경험했다고 재밌어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델라이데도 더 수월하게 싸우긴 했다. 딸이 겁먹어서 몸부림쳤으면 그녀가 싸우는 데 방해가 되었으리라.


그렇지만 싸움에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일이었다.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어. 역시 망해야 해.’


이렇게 세상에 실망해서 마왕으로 각성하면 큰일 아닌가.


“딸아,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많아.”


말에서 내린 아델라이데가 산적들을 줄줄이 엮으며 강조했다. 산적들이 가지고 있던 밧줄이 도리어 그들을 옭아맸다.


칼을 검집째로 휘둘러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도끼 머리에 찍혀서 코가 뭉개졌다거나, 말발굽에 차여서 갈비뼈가 부러졌다든가, 안쓰러운 모습이긴 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네, 엄마처럼요.”


아델라이데는 산적들을 일으켰다. 이들은 가까운 영지로 끌고 가서 인계할 생각이었다.


“음, 난 착하지 않아. 진짜 착한 사람은 말이지,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필요한 것을 베풀었을 거야.”


경전의 성녀 행전 같은 데 보면 그런 거 많이 나온다. 가진 모든 것을 베풀고, 상대가 부끄러움을 느껴서 개심하는 모습.


일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녀는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엄마, 제 생각인데요. 그건 착한 게 아니라 호구에요.”


“커헉!”


일리엔의 말과 동시에 뒤에서 끌려오던 산적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델라이데가 일리엔의 대답을 듣자마자 밧줄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애한테 세상의 냉엄함을 너무 빨리 깨닫게 만든 못된 놈들에 대한 분노가 거친 손길에 담겨 있었다.


“일리엔, 들어보렴.”


아델라이데는 경전에 나오는 성자의 선행과, 그에 감화된 악인들의 일화를 들려 줬다.


그 신화에 대한 예비 성녀(or 마왕)의 반응은 이랬다.


“그건 상대가 반성할만한 사람이라고 알아봐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관용은 사람 봐가면서.


일리엔에게는 그게 당연했다. 사람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 상대가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지, 반성할만한 사람인지 어림잡을 수 있었다. 반성할 맘이 없는데 엄마가 지금 보여준 것처럼 양보해 봐야 본인만 상처받을 일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 질질 끌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들여다봐도 고통이나 분노, 증오 같은 감정만 읽히지 미안하단 감정은 하나도 안 읽혔다.


‘이르고 싶은데.’


마음을 읽는 것을 들키면 엄마도 자신과 거리를 둘 거라 생각하며 참았다.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억 때문에, 어린아이답지 않게 입이 무거웠다.


대신 도적들을 노려보다 혀를 내밀었다. 엄마가 가까운 영지의 경비병들에게 넘긴다고 했으니 벌 받겠지 싶었다.


어쨌든, 이번에도 아델라이데는 똑 부러지는 일리엔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성녀답진 않지만, 애가 어디 가서 손해보고 살 성격이 아니었다.


아델라이데도 지금 딸의 교육을 위해 성자처럼 행동했다가 결말에는 결국 무력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니, 일리엔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네 말이 맞는 거 같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니?”


“네!”


일리엔은 아델라이데의 물음에 가슴을 쭉 펴고 대답했다.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으니 파악 가능했다.


그렇게 엄마를 역으로 설득시킨 일리엔은 눈을 반짝였다. 이렇게 똑 부러진 모습을 보여줬으니 당연히 칭찬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서는 제대로 키울 수가 없겠구나.’


아델라이데는 다시 한 번 아이는 자신의 뜻대로 되는 존재가 아님을 절감했다.


지금처럼 자신만 봤다가는 애가 기사로 클 것 같았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온갖 참혹한 꼴과 부조리를 보고 인간에게 실망하고······. 그런 망상이 이어졌다.


머리에 뿔이 난 일리엔이 해골을 들고 ‘인간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구나.’라며 깔아보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안 돼!’


이러면 회귀해서 애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


로렌 영지에는 괜찮은 학교도 많으니 그런 곳에 보내서 좋은 선생에게 교육을 받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일리엔의 주관대로 사람 봐 가며 대응을 다르게 하려면, 사람을 많이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학교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교류할 수 있으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이유야 어쨌든, 여정 중 엄마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아이도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했다.


서로에게 비밀을 숨기고 있고, 생각은 다르지만 결론은 같았다.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



“기사님, 빼꼼빠꼼 도적단을 일망타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풋!”


그날 저녁 도착한 아조레스 영지에서 경비대원들은 아델라이데에게 극진히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부르는 호칭이 뭔가 귀여웠다. 아델라이데도 웃음을 참지 못할 만큼.


“빼꼼빠꼼 도적단이래, 빼꼼빠꼼, 빼꼼빠꼼.”


일리엔도 그 명칭이 재밌는지, 아델라이데의 앞에서 쪼그렸다 뛰길 반복하며 빼꼼빠꼼을 연발했다. 일리엔이야 그저 어감이 재밌어서 그런 거지만, 그걸 앞에서 보고 있는 도적들 입장에서는 자기네를 놀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렇잖아도 오는 내내 속으로 복수를 다짐할 때면 무섭게 노려보는 게 재수 없던 꼬마였다.


“이 꼬맹이가! 나중에 풀려나면 네 작은 XX를 확 찢어······.”


“주둥이 못 다물어! 거름으로도 못 쓸 범죄자 자식들이!”


딱, 딱, 딱!


일리엔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내뱉자, 경비병들이 도적들의 뒤통수를 창대로 후려갈겼다. 아델라이데도 지금 딸에게 감히 저런 상스런 욕지거리를 한 도적놈의 얼굴을 검집으로 찍어 버렸다. 잔혹한 손속에 코가 부러지고 부러진 이를 쏟아낸다.


그녀는 기절한 산적의 옷자락에 검 끝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본인들은 성난 불곰단이라고 하던데요?”


“도적놈들을 멋지게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놈들이 사람이 많다 싶으면, 토벌단이 왔다 싶으면 귀신같이 도망가고 기사님처럼 소규모 여행객들이 다니면 나타나서 도적질을 하니, 두더지가 머리 내미는 것 같다고 빼꼼빠꼼 도적단이라고 부릅니다. 기사님이 홀로 여행한다고······.”


경비대장은 잠깐 말을 멈췄다. 어느새 둘의 옆에 다가온 일리엔이 경비대장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 딸!”


경비대장에게 자신도 같이 여행한다고 어필한다.


“아, 기사님과 따님이 단둘이 여행하시고 계시니 만만히 보고 달려들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감사드립니다. 상금이 붙어 있으니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델라이데는 금화 다섯 개가 든 주머니를 받았다. 둘이 반 년은 살 수 있는 돈이긴 한데, 아델라이데가 열 개는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적었다.


‘생각보다 행패가 덜했나.’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쉽게 얻은 부수입일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기사도를 추구하는 자라면 설사 돈이 안 되더라도 마땅히 해야 했을 일이다.


“그리고 고강한 기사님이 오셨다고 영주님께 연락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모시러 올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지요.”


경비대장은 올 때까지 기다리라며 경비대의 사무실로 둘을 안내했다.


“엄마, 왜 영주님이 엄마를 초대한단 거야?”


“귀족은 손님을 잘 대접할 의무가 있거든. 무훈을 세운 기사야말로 그런 손님의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고.”


그렇게 영주의 초대를 기대하며, 방랑하는 기사들이 도적을 소탕하거나 무술대회를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초대받으면 그것을 연줄로 고용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뭇 편력기사(Knight-errant, 어떤 이유에서든 떠돌아다니는 기사를 말함)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런 기회를 노렸다.


아델라이데야 어쩌다 보니 산적을 만나 그런 기회를 만든 것뿐이라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제국에 소속된 기사면 운명의 아이를 색출하는 의무가 있으니, 절대 어딘가에 소속되면 안 되었다.


여하튼 영주=대단한 사람, 그 대단한 사람이 초대하는 엄마도 대단, 이런 공식이 성립되자 일리엔은 눈을 반짝였다.


“엄마, 영주님도 기사야?”


“아닙니다, 꼬마 아가씨. 영주님은 학문에 뜻을 두신 분이시지요.”


“와아! 기사 아닌 영주님 좋아요.”


영주님이 기사가 아니라니까 일리엔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마을을 떠난 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너무나 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수행을 위해 일부러 맛없는 음식을 먹는다고 오해하고 있기에, 일리엔은 자신도 엄마처럼 강해지기 위해 맛없는 음식을 참고 먹었다. 그래도 어린 소녀에게 엄마의 음식만 계속 먹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래서 영주는 기사가 아니니, 맛있는 음식을 주지 않을까 해서 기대하는 것이었다.



@



영주는 아델라이데가 중앙 기사단에서 있었다는 것을 알자 꽤 관심을 가졌다.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에 아델라이데도 초대했을 정도였다.


“잘 먹겠습니다, 영주 할아버지.”


일리엔은 눈앞에 놓인, 다진 고기를 양배추로 말아 만든 커다란 고기 롤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처음 보는 음식인데 예쁘고 맛있게 생겼다.


“얘는, 영주님이라고 해야지.”


“허허, 괜찮소.”


말과 달리 표정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젊은 나이에 중앙 기사단에서 정식기사로 서임받고, 단신으로 산적들을 소탕한 뛰어난 기사를 영입하기 위해 참고 있는 것이었다.


치켜올라간 눈꼬리나 한쪽이 비틀린 입매를 보면 관대한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다.


일리엔도 왜 잘 먹겠다고 했는데 왜 영주 할아버지가 기분나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양배추 롤에 정신이 팔렸다.


빈민가에서 벗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어린아이의 식사예절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나이프를 써본 적이 없어서 포크로 롤을 찍고, 양배추 잎이 풀어지자 아예 손으로 집어먹기 시작했다.


영주는 그걸 보고 또 눈을 찌푸렸다. 일리엔도 영주와 그 가족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 ‘싫다’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양배추 롤을 와구와구 먹었다. 먹을 수 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어 놔야 엄마의 음식을 버틸 힘을 얻을 수 있다.


“청사자 기사단에 있었다지? 산적들을 칼도 뽑지 않고 일망타진하셨으니 그 경력이 허언이 아닌 걸 알 수 있겠고······. 어떻소? 기사단의 부단장을 드리겠소.”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전 어딘가에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허허, 연 120골드 주지.”


다시 돈을 제시하는데, 일리엔이 갑자기 껴들었다.


“엄마, 후려쳤어.”


그 말에 영주의 얼굴이 대놓고 구겨졌다. 아델라이데는 갸웃거렸다. 정기사가 보통 연 금화 100개를 받는다. 부단장의 직위에 따르는 수당까지 하면, 꽤 나쁘지 않은 급여라고 생각했다.


“딸이라고 했지?”


“네.”


“한창 수행해야 할 나이에 성욕을 못 이기고 딸을 낳았으면 알만하군. 거기다가 포크랑 나이프 사용법도 모르고 감히 영주가 말하는데 끼어드는 거 보니 평소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알만 하고.”


고용할 생각이 사라졌는지, 직설적으로 악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델라이데는 묵묵히 들었다.


“엄마는 내 친엄마가······.”


“일리엔, 입 다물어.”


아델라이데가 부당하게 매도당하는 걸 보다 못한 일리엔이 자신이 수양딸임을 말하려 했다. 그걸 눈치챈 아델라이데가 무서운 얼굴로 말을 끊었다. 그 일갈에 움찔한 일리엔이 시무룩한 얼굴로 양배추 롤을 깨작거렸다.


“저도 영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영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제가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아델라이데는 엉망인 일리엔의 매너를 꾸짖기보다는 냅킨을 들어 일리엔의 손과 입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포크로 찍어먹기 좋게 양배추 롤을 잘라 주었다.


“이제라도 좋은 엄마가 되어 보려 합니다.”


“알겠소.”


그때부터 영주는 모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리고 잠자리를 내주지 않고 식사가 끝난 뒤 바로 내쫓았다. 그 꼴을 미안해한 기사단장이 여관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낯선 마을에서 좀 헤맸으리라.


“일리엔.”


“네.”


아델라이데는 일리엔과 함께 말을 타고 여관으로 향했다. 엄마의 무서운 일갈도 들었고, 자신 때문에 엄마가 별 억울한 소리도 듣는 것을 봐서 좀 시무룩해 있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니?”


“예의가 없었어요. 앞으로 배울게요. 그, 그래도 엄마가 여기서 일하면 손해에요.”


일리엔은 엄마가 일자리를 잃어서 짜증낸 줄 알고 필사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말했다.


“그거 말고.”


일리엔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렇지만 모든 대답이 엄마의 성에 차진 않는 것 같았다. 급한 나머지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어?’


그 순간, 일리엔은 당혹스러웠다. 화가 났을 줄 알았는데 분노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따스한 사랑이 느껴졌다.


“엄마······.”


엄마라고 부르자, 아델라이데도 마음이 더 약해졌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일리엔을 안았다.


“너 내가 네 친엄마가 아니라고 하려고 했지?”


“네. 엄마 잘못한 거 없으니까요.”


아델라이데도 알았다. 이 눈치 빠른 아이가 아델라이데의 편을 들어주려고 끼어든 것을 말이다. 그게 예의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하지만 그게 오히려 거슬렸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게 처신하는 것 같아서. 자신이 수양딸이고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고 의식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최대한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거 아닌가.


“앞으로 네가 입양되었다느니 이야기 절대 하지 마. 어떤 수식어도 붙일 필요 없어. 넌 내 딸이야.”


아델라이데는 그게 왜 기분이 나쁘게 느껴졌는지 정확히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딸이 자신을 수양딸이라고 의식한다고 해도 고아원과 비교하며 지금에 만족하는 것이 분명했다. 애가 고분고분하고, 주제파악을 잘 하면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그 친엄마가 아니란 말이 싫었다. 그 순간 일리엔과 자신의 거리감을 느껴서였을까, 그 순간 아델라이데도 감정적으로 나왔다.


그 직후 일리엔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고 아차 싶었다. 그래서 일리엔이 손으로 집어먹던 음식을 먹기 좋게 잘라주며 부드럽게 대해 줬지만, 일리엔은 끝날 때까지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단둘이 있게 된 이후에야 일리엔에게 진정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화가 난 것은 일리엔의 잘못이 아니라고.


“엄마······.”


진심.


일리엔의 눈에 보였다. 그 때문에 엄마가 화냈구나. 친엄마가 아니란 말에.


일리엔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엄마와 이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 고강한 기사로 잘 나가는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엄마가 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감정을 읽을 수 있으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에 애정이 가득하고, 그 한구석에 뭔지 모를 죄책감도 응어리져 있단 점을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일리엔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엄마는 기사답게 감정표현이 적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일리엔은 알 수 있다. 그저 표현이 서투를 뿐 자신을 배아파 낳은 아이처럼 사랑하고 있다고.


“그럼 부단장이 되지 못한 것은······.”


“네가 어찌 눈치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겉보기보다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어. 급여는 상식적이었지만, 받은 돈 이상으로 고생할 게 분명해 보였거든.”


척 봐도 영지에 기사가 부족해 보였다. 어떻게든 일자리 구하려는 편력기사들이 세상에 적지 않다. 그런 자들이 일자리만 있다면 기꺼이 찾아올 터인데, 그런데도 충원이 안 된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근처에 산적이 창궐하는 것을 못 잡은 것도 그렇다.


현상금을 높여서 용병이나 편력기사들을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기사단장이 돌대가리가 아니라면 현상금 인상을 제안했을 텐데, 그게 먹히질 않았다. 돈도 안 주고 그나마 있는 사람에게 권한도 안 주는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기사를 계속 할 생각도 없었지만, 있다고 해도 부단장 직위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는 괜찮아.”


아델라이데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이 마음을 못 읽어도 상대의 의중을 자신만큼이나 정확히 짐작할 수 있단 것을 알았다.


일리엔은 자신이 사람의 마음과 양배추 롤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 저런 것들을 파악한 엄마가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일리엔은 활짝 웃었다. 양모(養母)도, 고아를 돕는 자선가도 아닌 엄마, 지금껏 계속 그렇게 불렀지만, 지금 엄마란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단순히 아델라이데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아델라이데 그 자체가 되었다.


“사랑해요! 세상 그 무엇보다도요.”


“얘는······.”


아델라이데도 부드럽게 웃었다.


이로서 세상의 멸망은 한 발짝 멀어졌을까? 일리엔의 밝은 얼굴을 보면 확실히 조금 더 나은, 빙의 전 가지 못했던 방향에 들어선 것을 확신하게 된다.


아니, 그런 이해타산 이전에 순수하게 일리엔의 밝은 얼굴이 가장 큰 보답이었다. 그저 칼을 휘두르는 것밖에 못하는 자신에게 의지하는 아이가 있단 사실이 이렇게 뿌듯할 줄은 몰랐다.


“그럼 갈까? 우리가 진정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땅으로!”


“가요!”


아델라이데는 로렌 백작령을 향해 나 있는 오솔길을 가리키며 기세좋게 외쳤고, 일리엔도 그에 호응해서 외쳤다.


그래도 해가 졌으니 잠은 자야지. 둘은 기세좋게 외친 것과 달리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작가의말

다음 챕터, '회귀한 기사의 돈 버는 법'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상을 구하는 육아일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중단 안내 +3 24.03.26 78 0 -
34 피의 마스터(1) 24.03.26 32 1 12쪽
33 운명의 아이 판별(2) 24.03.26 18 0 13쪽
32 운명의 아이 판별(1) 24.03.26 17 0 12쪽
31 딸을 지켜라(3) 24.03.26 17 0 12쪽
30 딸을 지켜라(2) 24.03.26 17 0 12쪽
29 딸을 지켜라(1) 24.03.26 18 0 13쪽
28 일리엔, 정체를 의심받다(3) 24.03.25 25 0 16쪽
27 일리엔, 정체를 의심받다(2) 24.03.24 25 0 13쪽
26 일리엔, 정체를 의심받다(1) 24.03.23 33 2 13쪽
25 꽃의 왕의 축복 +1 24.03.22 32 1 15쪽
24 일리엔의 입학 시험(3) +2 24.03.21 29 0 14쪽
23 일리엔의 입학 시험(2) 24.03.20 30 0 12쪽
22 일리엔의 입학 시험(1) 24.03.19 34 0 12쪽
21 어긋난 현실(2) 24.03.18 32 0 14쪽
20 어긋난 현실(1) 24.03.17 35 0 12쪽
19 내집 마련(2) +1 24.03.16 33 1 12쪽
18 내집 마련(1) 24.03.15 38 0 12쪽
17 회귀한 기사의 돈 버는 법(3) +1 24.03.14 45 2 12쪽
16 회귀한 기사의 돈 버는 법(2) 24.03.13 43 0 13쪽
15 회귀한 기사의 돈 버는 법(1) 24.03.12 47 1 14쪽
» 엄마와 딸 사이의 거리 24.03.11 58 0 22쪽
13 마족의 추종자들(3) 24.03.10 53 1 13쪽
12 마족의 추종자들(2) 24.03.09 51 0 11쪽
11 마족의 추종자들(1) 24.03.08 53 0 12쪽
10 운명의 아이, 절망하다(2) 24.03.07 59 0 13쪽
9 운명의 아이, 절망하다(1) 24.03.06 69 1 13쪽
8 운명의 아이, 그 이름은(4) +2 24.03.05 73 1 15쪽
7 운명의 아이, 그 이름은(3) +1 24.03.04 73 1 15쪽
6 운명의 아이, 그 이름은(2) +1 24.03.03 82 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