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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hareth 님의 서재입니다.

도플갱어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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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hereth
작품등록일 :
2024.03.26 19:19
최근연재일 :
2024.05.09 12:1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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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95

작성
24.03.3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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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 자유를 꿈꾸는 이들 (0)

DUMMY

4. 자유를 꿈꾸는 이들 (0)


화악


시야 전체가 하얀 빛으로 물든다.


순간적으로 밝아진 주변에 고개를 돌리며 살포시 미간을 찌푸려 보았지만, 눈에 맺히는 것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소리들이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마찬가지.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소리들 역시 누군가의 말소리 임은 알 것 같으나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순간 의식을 잃기 전의 일이 떠올라 이 상황이 엄청나게 불안하게 느껴졌다.


가위에 눌리는 이들이 그러듯 손가락 끝이라도 움직여 보려 했지만 그것도 잠시, 환했던 주변이 사라지고 다양한 색상들이 눈앞을 수놓으며 흘러가기 시작하자, 그녀의 의지는 그대로 갈 곳을 잃었다.


내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쳐다보는 느낌은 너무도 생소했다.


그것이 자신의 어린 시절임을 깨달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커지고 나선 잃어버렸을 어린 시절의 단편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마치 영화관의 필름을 엄청난 속도로 감기라도 하는 것처럼.


묘한 것은 그 흐름의 속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하나의 기억들이 명확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것.


흔히들 말하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라는 게 이런 것이었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겪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대부분 죽음을 예감한 순간 겪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설마 죽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만, 아직 죽진 않았을 것 같다. 만약 죽었다면 이런 경험을 하진 못할 테니까. 아니면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일 수도 있고.


처음 겪는 강렬한 기억의 습격으로 잠시 내려놓았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분명 기억을 삭제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순간 흐름이 느려졌다.


바로 앞에 있는 투박한 질감의 식탁과 잘게 썰린 사과 조각들이 담긴 접시, 그리고 끝이 그리 날카롭지 않은 포크를 꼭 쥐고 있는 앙증맞은 주먹이 눈에 들어오자 자연스레 의식의 흐름도 잠시 멈추었다.


탕퉁탕탕


통통하게 살이 오른, 조막만한 손에 잡힌 포크가 식판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려 보지만 사과 조각들은 제대로 찍히지 않고 그저 밀려나기만 했다.


- 으에으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의 감정을 한껏 눌러 담은 칭얼거림이 이어졌다.


그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웅얼거리듯 들려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중저음의 톤은 듣기에 참으로 편안했다.


순간 커다란 손 하나가 나타나 길쭉하고 섬세해 보이는 손가락으로 포크를 움켜쥐고 있는 조막만한 손을 감아쥐었다.


함께 움직여 콕 찍어 올리자 사과 조각이 포크에 들려 올라왔다.


드디어 연노랑 빛의 사과 조각을 입에 넣는 것에 성공한 아기의 시선이 그제야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건 행복한 감정을 한껏 담아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한 남성의 얼굴이었다.


‘어?’


진갈색 액자 속에서 보여주던 그 웃음 그대로 희미한 기억 속에 걸려 있던,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감정이 요동쳤다.


다시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의 울림이 들어간 중저음의 목소리는 엄마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대로 듣는 이를 편하게 해 주는 마력이 있었다.


그토록 바랬으나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는 듣지 못할 그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려 시안은 있는 힘껏 집중하고 집중해 채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보았다.


동시에 그토록 그리던 그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보려 눈을 크게 떠보았지만 그녀의 심정 따윈 무관하다는 듯 이내 장면이 바뀌었다.


‘아, 아냐, 안돼. 조금, 조금만이라도,’


늦춰보려 했지만 속절없이 흘러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추정되는 또 다른 기억들 속으로 얼굴도, 목소리도 사라져갔고, 그만큼 안타까움도, 공허함도 커져만 갔다.


시간이 다시 느려진 순간 보여진 하얀 방 안의 모습은 삭막하면서도, 그만큼 시안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수척했지만 젊었을 시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는 검은 옷을 입은 채 방 구석에 주저앉아 있었다. 시선은 자신에게 향해있으나 초점은 흐려져 있었고, 퉁퉁 부어있는 눈에선 한 번씩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저 순간이 기억나진 않지만 무슨 일이었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하지만 저 때는,’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으나 시간의 흐름이 그 속도를 더함에 따라 집중력을 잃었다.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아직 어린이라 불리던 시절의 기억의 편린들. 그 흐름 속에서 시야의 높이가 차츰차츰 높아져만 갔다.


마찬가지로 잠시 잠시 멈추는 순간이 있었지만, 역시 바로 다음 순간에 자리를 내어주기를 반복하다 다시 갑자기 느려졌다.


- 너, 아빠 죽었다며? 아빠 잡아먹은 아이라던데, 진짜야?


채 여물지 못한 앳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순간 눈앞이 살짝 흐려진다.


- 미안. 울 엄마가 너랑 친하게 지내지 말래.


또 다른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귀에 박힌다. 이번엔 일렁거리던 눈앞에 금세 뿌옇게 변했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일이다. 비록 어른이 된 지금은 아이들의 저 말들이 다른 어른들의 표현을 따라 한 것에 불과하단 걸 알게 되었지만, 저 당시 나름대로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의 저 한마디 한마디는 아직까지도 가슴 속에 남아 여전히 시안을 얽매고 있는 족쇄가 되었더랬다.


- 야, 친구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또 다른 여자아이의 가시가 돋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렁이는 시야 덕에 잘 보이지 않지만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안다.


‘담지현’


옷소매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대신 화를 내주고 있는 절친의 어릴 적 모습이 보다 선명하게 들어왔다.


- 어머, 끼리끼리 논다더니,


전혀 어른답지 못한 어른의 목소리가 개입했다.


‘저 아줌마한테 대든 지현이 덕분에 저 날 정말 난리도 아니었지. 덕분에 더욱 친해질 수 있었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안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보여지는 기억들은 확실히 예전 있었던 일들에 비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문제의 시점, 그들을 만나기 며칠 전 시점에 가까워지자 다시 흐름이 느려졌다.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학회로 출발하는 교수님과 실험실 선배들, 그리고 동기들을 배웅하고 힘없이 논문을 검색하던 자신은 다섯 시 반이 넘어 전화로 간단하게 방장 선배에게 보고한 뒤 집으로 향했다.


터덜터덜. 익숙한 시야의 흔들림은 의욕을 상실한 자신의 걸음 탓이다.


‘아니야. 저 날, 나는 지현의 전화를 받았다고. 지현이가 분명 붉은 색의 알약을 건네줬었어.’


하지만 흘러가는 영상 속에선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지현에게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다.


털썩. 간단한 흔들림과 함께 익숙한 천장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내 시야가 검게 변했다.

다시 환해진 뒤에도 별반 다를 바는 없어 보였다. 등교해서 종일 논문 검색하고 터덜터덜 걸으며 하교. 별 다른 일 없이 집에서 뒹굴거렸던 토요일이 지나고 이어진 일요일엔 지현을 만났지만, 그저 웃고 떠들다 헤어졌다.


그렇게 다시 월요일 아침이 밝아왔다.


현자의 돌, 그리고 그로 인해 겪었던 일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요 며칠 자신을 가득 채웠던 호기심과 활력은 사라졌고, 무기력함이 언제나처럼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득 깨달았다. 카사, 자신의 모습을 한 이가 언급했던 그 기억의 삭제, 혹은 치환이라는 그 과정이 지금 진행 중일 수도 있다는 것을.


비록 지금 자신의 의식은 여전히 현자의 돌을, 그리고 도플갱어를 만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이 상황에서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안돼. 싫어.’


이번엔 아까와 달랐다. 시안이 기억을 되돌리길 거부하자 흐름이 그대로 멈추더니 보이는 모든 것이 크게 출렁거렸다. 동시에 점점 흐려지고 그 선명한 빛을 잃어갔다.


완전한 어둠.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에 둘러싸이자 시안은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기억을 빼앗기는 건가? 싫어. 그런 건 싫어.


도플갱어. 그래도 조금이나마 자신을 배려해 주던 도플갱어의 말을 떠올렸다.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싶었던, 그 한마디는 잊고 싶지 않았는데,


‘너 때문이 아니야.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다. 운명이란 건 그냥 그런 것일 뿐이었으니까.’


분명 자신의 것이었을, 목소리를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리던 그 순간 눈앞에 자그마한 불빛이 생겨났다.



=====


노랑과 주황의 불꽃들이 검게 변한 나무 장작 위에서 따스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에 주변을 둘러보려 하였으나,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시야는 그녀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야를 공유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시선이 돌아갔다. 드리워진 천을 손으로 밀어내며 코와 턱 주변의 풍성한 수염과 낯선 복장이 눈에 띄는 한 남성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러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은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고집스러웠고, 무언가에 초탈한 듯하면서도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흔들리는 어둠 속에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익숙하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답게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또 다른 언어가 흘러나왔던지라 그 내용까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억양과 제스처 등으로 미루어 그녀와 시야를 공유하는 남자가 상대를 설득하고 있고, 상대는 그걸 거절하며 역으로 설득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상황에도 무슨 말이 오가는지 궁금했지만, 자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던 아까까지와 달리 갑작스레 이런 영상이 갑자기 흘러나오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전혀 예상할 수도, 알 수도 없었다.


대화에 깃든 감정들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쯤, 또 다른 이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천이 들리고 새로운 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며, 시안은 데자뷰를 느꼈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먼저 온 이가 나중에 들어온,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이를 소개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유다, ...”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언어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지만, 시안은 왠지 그게 자신과 시야를 공유하고 있는 이름일 것만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그 순간 다시금 흐름이 멈추었다.


“흐음.”


시안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빨라진 시간의 흐름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다. 오롯이 자신을 향해 전달되는 육성에 깜짝 놀란 시안의 시선이 바로 위를 향했다.


“뭐냐, 너?”


3 미터 정도 떨어졌을까? 자신의 머리보다 높은 곳, 불길하게 일렁거리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쌍의 눈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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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7. 초월 한국본부 (2) 24.04.29 2 0 14쪽
32 7. 초월 한국본부(1) 24.04.25 3 0 12쪽
31 Interlude 03. 존재의 이유 24.04.24 5 0 9쪽
30 6. 또 다른 길, 초월(4) 24.04.22 5 0 12쪽
29 6. 또 다른 길, 초월(3) 24.04.19 5 0 12쪽
28 6. 또 다른 길, 초월(2) 24.04.18 5 0 17쪽
27 6. 또 다른 길, 초월(1) 24.04.17 4 0 11쪽
26 5. 진실된 세상에서 (4) 24.04.15 5 0 14쪽
25 5. 진실된 세상에서(3) 24.04.12 6 0 12쪽
24 5. 진실된 세상에서 (2) 24.04.11 6 0 14쪽
23 5. 진실된 세상에서 (1) 24.04.09 7 0 16쪽
22 5. 진실된 세상에서 (0) 24.04.08 6 0 15쪽
21 Interlude 02. 추적 24.04.06 6 0 14쪽
20 4. 자유를 꿈꾸는 이들 (5) 24.04.04 6 0 14쪽
19 4. 자유를 꿈꾸는 이들 (4) 24.04.03 6 0 13쪽
18 4. 자유를 꿈꾸는 이들 (3) 24.04.02 6 0 12쪽
17 4. 자유를 꿈꾸는 이들 (2) 24.04.01 6 0 14쪽
16 4. 자유를 꿈꾸는 이들 (1) 24.04.01 6 0 15쪽
» 4. 자유를 꿈꾸는 이들 (0) 24.03.31 7 0 11쪽
14 3.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자(5) 24.03.29 6 0 12쪽
13 3.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자(4) 24.03.29 4 0 11쪽
12 3.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자(3) 24.03.29 5 0 12쪽
11 3.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자(2) 24.03.29 3 0 11쪽
10 3.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자 (1) 24.03.28 4 0 12쪽
9 Interlude 01. 붉은 알약 24.03.28 5 0 11쪽
8 2. 그 날 있었던 일은(4) 24.03.28 4 0 11쪽
7 2. 그 날 있었던 일은(3) 24.03.27 7 0 11쪽
6 2. 그 날 있었던 일은(2) 24.03.27 5 0 12쪽
5 2. 그 날 있었던 일은(1) 24.03.27 9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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