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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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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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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글자수 :
658,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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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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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정보상과 의사

DUMMY

밤이 되어 사라진 노을빛은 술집의 노후한 전등 안에 남아있었다.

그 빛은 술을 담은 와인병에 누런 기름칠을 하고, 아낄 필요 없이 낡아빠진 목재 테이블에 세월을 더했다.

홀로 빠져나온 의자에 앉아 독한 술을 홀짝이는 녹차색 소녀의 존재를 부각했다.


“···오랜만이네, 네가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부를 생각도 없었을 터인 이름을 불리기도 전에 렌은 먼저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

주인 없는 카운터에서 잔을 하나 가져와, 자신의 옆자리에 놔두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의자까지 빼주었다.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으면 그는 앉아주지 않는다. 그대로 등을 돌리고 돌아가버리겠지.

괜히 무안할까봐, “오우, 잘못 찾아왔군. 좋은 밤 되라고.”하고 말하며 손까지 흔들어줄 것이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연기는 좋은 술안주겠지만, 오늘은 필요하지 않았다.


“허, 고맙군.”


우스울 정도로 세심한 성의에 결국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떤 술을 마실지 고민하며 진열장을 바라보고 있는듯했으나, 이번에도 똑같은 술을 고를게 뻔했기에 괜한 참견을 발휘해서 마력을 일으켰다.

술병을 감싸고, 부웅 공중에 띄워 앞까지 가져왔다.


“어차피 이거 마실 생각이었지? 잭 다니엘.”

“이봐, 내가 그걸 좋아한다고 해서 오늘도 그걸 선택할 거라는 건 편견이라고.”

“그럼 뭘 마실 건데?”

“뭐어,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무언가 기발한 선택을 했겠지. 그걸 네가 막은 거야.”

“···평소랑 다르게 시끄럽네.”

“그건 네 착각이겠지. 난 항상 유쾌했다고?”


잭은 보란듯이 끅끅 웃었다.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말이 맞았다. 잭이라는 사내는 언제나 시끄러웠다.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뭐랄까, 너는 평소에 트집은 잡아도 남탓을 하지는 않잖아? 이봐, 하고 이어지는 말들은 대부분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농담이고. 애초에 이곳으로 돌아온 것부터가 두 말할 필요 없는 기행이지.”


변명은? 하고 묻자,


“변명? 이름을 바꾸라는 뜻인가?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내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없는 농담으로 화제를 전환한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성공적으로 정곡을 찔렀지만, 성급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조금씩 열어야만 한다. 귀찮지만, 그런 성격의 인물이 바로 잭이다.

튼튼한 가죽을 덮개로 한 책처럼 보이지만, 그 페이지는 전부 젖어있다. 그래서 덮개를 들춰, 그 내용을 보려면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때로는 번져버린 글자를 유추해야 하고, 때로는 찢고 싶지 않았는데도 찢어지는 페이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렌은 서두르지 않는다. 화제를 돌렸으면 돌리는 대로 적절한 맞장구를 준비한다.


“너 진짜 농담 재밌게 한다.”

“아낌없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칭찬은 아니지만, 뭐, 됐어. 대화할 기운은 있는 것 같네.”


쪼르륵 술을 따랐다. 자신의 것이 아닌 잔에 듬뿍, 그리고 자신의 잔에 조금.

그대로 마시려다 성에 차지 않아서 추가로 부었다. 잭의 잔과 똑같이 듬뿍. 넘칠 듯 찰랑거리게.


“어이어이어~이. 꼬맹이가 그렇게 마시면 죽는다고.”


꼬맹이 아닌데.

입버릇처럼 달라붙은 그 말이 뛰쳐나오려고 했으나 참았다.

예전의 렌은 그렇게 반박했었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랐다. 이제는 알고 있다. 그렇게 반박하는 순간 자신은 꼬맹이이고 싶지 않은 꼬맹이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넘기며 두 배 정도의 위력으로 돌려주었다.


“됐어. 어차피 오늘은 한가해. 내일도 그럴 예정이고. 무엇보다, 섹스도 못하는 남자 옆에서 취해봤자 좋을 게 뭐가 있는데.”

“이봐, 나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라고.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세계에는 저주가 가득할 걸?”

“세계의 평화···”


렌은 잭의 말 중에서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분을 곱씹었다.

잭이 앉은 오른편이 아닌, 텅 비어있는 왼편.

평화라는 단어가 나오니, 그곳으로 시선이 저도 모르게 흘러갔다.

제법 먼 과거에는 이곳에도 한 명이 앉아있었다. 술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과묵하던 입을 열어서 세상이 말세니 뭐니 주고받았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그 사람도 이곳에 왔었다면. 바라면서,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잭을 직접 마주치지 않고, 진열대의 병들을 통해 바라봤다. 평소랑은 다르게 유독 내려간 어깨. 테이블을 향해 조금 기울은 척추.

그 이유를 유추하고는 아아, 역시. 하고 납득했다.

역시 이 사내는 정이 많다. 리시스 못지않게.

어쩌면, 그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리시스를 보고 정이 많은 성격이라 알 수 있었던 것도 그보다 먼저 잭이라는 사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차이점이라면. 글쎄, 렌은 리시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청년은 미궁을 공략하다 우연히 발견한 성검 같은 존재니까.

어떤 힘을 지니고 있고,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는 알아도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자세한 성격도, 버릇도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구태여 그 차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정말로 의외인 부분이지만, 리시스와 달리 잭은 도발에 쉽사리 넘어오고는 한다.


“흔들리고 있구나, 잭.”

“흔들려? 내가? 지나가던 개의 털 속을 헤매던 벼룩이 웃을 소릴 다 하는군.”

“···하렐뉴, 라고 했던가. 그 애 때문에 온 거지?”


침묵. 잭은 가득한 술잔을 한꺼번에 비우고, 다시 테두리까지 채웠다. 대화를 억지스럽게 끝마치고 도망치지 않았다.

도발은 성공적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그 증거로 잭이 화제를 돌렸다.


“···오늘따라 목이 마르군.”

“그럼 물을 마셔. 술 마시지 말고.”

“와인은 취향이 아니야. 도수가, 너무 약하거든. 뭐어, 맛은 나쁘지 않지만 술을 맛으로 먹는다는 건 멋있지가 않잖아.”

“어련하시겠어.”

“어련하지, 암. 그렇고말고.”


잭은 거추장스럽게 끄덕이며, 또다시 들이킨다.

그러는 사이, 렌은 대화를 진전시킨다. 하렐뉴라는 소녀를 화제로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머릿속에 적어놓은 명부를 따라내려가, 그 이름을 짚었다. 기억을 끄집어냈다.

예전이라 부를 만큼의 과거. 그곳에는 진단을 마친 렌이 있고, 여느 때처럼 코트에 손을 쑤셔넣고 비딱하게 서있는 잭이 있고, 잃어버린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팔란타(마족) 소녀가 앉아있다.

그 기억 속의 렌은 소녀에게 말했다.


『성병이네. 매춘부들한테서 많이 발견되지만, 아직까지 치료제는 없어. 면역력이 점차 약해지고, 작은 병에도 크게 앓다가 죽어버릴 거야.』


담백한 어조. 어떠한 희망도, 배려도 담겨있지 않은 사실만을 전했다.

같은 병에 걸린 여성들을 수두룩하게 봐왔다. 그리고 하나같이 구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 시절의 렌은 그것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손톱의 때만큼이라도 마음을 먹었다면 미약하게나마 효과를 발휘하는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었을 터였으나,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쐐기를 박는 게 너무나도 쉬웠다.


『길어봐야 2년이려나. 짧으면 1년도 안 되서 죽을 거고.』


조금은 상냥하게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단순한 후회조차 들지 않도록 그 소녀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부정도, 분노도, 협상도, 우울도 없었다.


『그런가요.』


그 짤막한 한 마디가 끝이었다. 이후로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잭의 말에 따라 일어났고, 잭의 등을 따라 진료실을 나갔다.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보통은 시한부 판정 받으면, 울거나 화내거나 하는데. 조금 특이한 애였지.”

“···특이하긴 무슨, 평범한 여자애야. 우는 법을 까먹었을 뿐이지. 일일이 알려줘야 하지만, 이제는 웃을 줄도 아는 녀석이야. 그리고···”


잭은 말을 흐렸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관두고, 내용을 바꾸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 문장을 입으로 만들어버린다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알고, 스스로가 절제한 모양이었다.


“평범한 재료로 끔찍한 요리를 선보일 수 있지. 처음에 먹었던 건 거의 독이었어. 전세계 연금술사들이 맛을 보고는 야, 이 미친년아. 하고 쌍욕을 박았을 거야.”


마치고는 끅끅 웃었다. 독한 술 때문인지 평소보다 유독 소리가 작았다.


“···그래서, 마지막엔 어땠는데?”

“이봐, 산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뭐?”


렌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 소녀가 찾아오고부터 2년하고도 반 이상이 지났다. 지금이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있는 편이 이상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치명적인 병세였고, 기나긴 세월이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걸까.


“그럼 다행이네. 지금이라면 살 수 있을 거야. 내가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가만 두기에는 조금 찝찝해서 마신교를 나오고부터는 꽤나 몰두해서 연구했거든. 그 아이의 병 말이야.”

“제자를 받았다던데, 그쪽으로 신경 쓰던 게 아니었나?”


알려주지도 않은 정보가 흘러가있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함께 거리를 거닐다가 불특정한 누군가를 가리키면 이름부터 시작해서 종사하고 있는 업종, 가족관계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잭이었다. 렌처럼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라면 생활습관까지도 꿰고 있는 게 당연했다.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애가 워낙에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그냥 예전에 써둔 보고서를 무더기로 던져주고 끝냈어. 죽은 자를 살린다, 라는 건 신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이제 그만 깨달아주었으면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납득을 안 하더라. 단테까지도 체념했던 연구인데.”


쯧,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뱉었다. 어느 샌가 화제가 돌아가 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무튼, 지금이라도 데려오면 살 수 있어. 내일이나 모레에는 데려와. 은신처는 알려주지 않아도 되지?”

“필요없어.”

“뭐···?”


얼빠진 표정. 미쳤냐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자신의 곁에 앉은 사내가 정말로 잭인지 의심했다.

그 반응이 즐거웠는지, 잭이 끅끅 웃었다.


“필요 없다고 했다만.”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녀석은 조만간 죽어. 아니, 죽는다면 나은 편이겠지.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거야. 이봐, 렌. 얼마 전까지 네 녀석을 감시하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침묵. 렌은 입을 열지 못했다. 새하얗게 멀어버린 사고가 주어진 정보들을 멋대로 조합하여, 가정을 지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잭이 설명한다.


“쇠약해져가는 몸으로 감시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실제로 녀석은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황까지 갔었어. 그런데도 일어났지. 어떻게 가능했을 거라 생각하나?”

“너,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지. 예전부터 나는 네 연구보고서를 읽는 게 취미였다고?”


연구보고서. 그곳에서 가능성은 확실해졌다. 렌이 세운 가설은 사실로서 자리 잡았고, 지금의 대화를 가능토록 하는 두 기록을 끌고 왔다.

하나는 팔란타의 ‘기적’적성에 대한 연구였다. 마신이 만들어낸 마물들은 초기,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최초로 자아낸 ‘흡혈귀’의 경우에는 아예 색만 다른 인간이라고 할 정도로 그 생김새가 일치한다고.

그렇다면, 그들은 ‘기적’을 사용할 수 있을까.

연관성이라고는 생김새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기적’을 사용할 수 있다면 말도 안 되는 가설이 입증되는 셈이었다.

무척이나 중요한 연구. 그 시절의 렌은 그렇게 생각했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인체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팔란타는 기적을 사용할 수 있었다.’

기적은 이른바 신의 힘이다.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 무엇이든이라고까지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대부분은 가능하다.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신체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적을 약화시키거나 가두는 것도. 그 이외의 여러 가지도.

잭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잭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깨달은 렌은 알게 되었다.


“···기적으로, 연명해온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앞서 말했었다. 하렐이라는 소녀는 조만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그것은 다른 연구보고서 또한 읽었다는 뜻이었다. 기적을 사용한 연명, 그에 대한 부작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잭은 말한 것이었다.

알고서도, 사용했다. 렌이 물어볼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미리 못을 박아두었다. 그럼에도 렌은 묻는 걸 관두지 못했다.


“평범하게 죽는 걸로는 끝나지 않아··· 제대로 죽지도 못해··· 그런데 어째서···?”

“그건 나를 향한 질문인가?”

“둘 다야··· 둘 다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아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하나같이···!”

“뭐어···”


잭은 일부러 크게 소리내어 렌의 말을 끊었다. 감정을 추스를 수는 없었으나, 렌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논리적으로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버린 것은 그때 찾아왔던 소녀에게 희망이 없다고 선고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제 와서 잭에게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를 질책하는 건 잘못됐다. 소녀를 이상하다 여기는 건 틀렸다.

결국 추스르지 못한 감정들은 자책이 되어 렌에게 돌아왔다.

과거를 곱씹었다. 무척이나 쓴 맛이었다.

그것은 잭의 원망이었다. 렌을 향한 질책이었다.

얌전히 받아들였다.


“뭐어, 나야 그 녀석이 아니어서 그 녀석의 심정을 말해주지는 못한다만. 그래도 그 질문이 나에게 향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는 답해줄 수 있지.”


조용해진 렌의 곁에서 잭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렐, 그 녀석은 누구에게도 지켜졌던 적이 없어.”


그래서.


“흥미삼아 누구도 지켜내지 못한 청년을 옆에 붙여줬지.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영혼이야. 이제는 주맥시로도 비치지 않더군. 그렇다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좋은 추억 하나쯤은 남겨줘도 괜찮잖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그가 말하는 청년의 이름은 리시스임이 분명했다. 그 리시스에게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애초에 그 사람을 위해 리시스는 지금껏 살아왔다. 꺾인 채로 나아갔다. 지금도 그러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하렐을 돌아봐주리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하렐이라는 소녀가 리시스에게 연심을 품을지에 대해서도 미지수다. 대화가 제대로 오고갈 수 있는지부터 고려해야 될 정도로 그 둘의 관계는 멀찍하다.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잭은 고개를 저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렌에게는 짚이는 바가 없었다.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거대한 영혼을 짊어진 청년과 영혼의 희생으로 연명해온 시한부 소녀의 사이에서.

대체 무엇이 가능하단 말인가.


“영혼의 이식은 불가능해···”


렌은 중얼거렸다.


“분리도, 결합도 불가능하지.”


잭이 덧붙이고는 코웃음쳤다.


“알고 있었어···?”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안이하게 붙여놨을 거라 생각했나? 그 녀석을 구할 방도가 없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어. 물론, 네게 데려온다면 몸은 살겠지. 하지만, 영혼의 소진을 막지는 못해.”


구할 방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잭은 어째서 리시스를 붙여놓았는가.

하나의 사실.

하나의 의문.

그로부터 모든 해답이 나왔다.


“너, 설마···!”

“이제야 알겠나?”


잭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치솟았다.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살릴 수 없다면, 죽여야지.”

“···리시스한테, 떠 밀은 거야···?”

“그 녀석 말고는 없잖아.”


끅끅대는 웃음소리.

심장이 아팠다. 병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이 봐왔던 모습들은 거짓이었고, 해왔던 배려들은 허사였다. 쌓아왔던 평가들은 전부 렌의 착각이었다.


“실망이야···”

“칭찬 고맙군.”


그 대꾸가 도화선이었다. 실내에 어둠이 휘몰아쳤다. 깨져버린 전구의 유리조각들은 그대로 떨어지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노후한 테이블이 갈라졌고, 이내 정적만이 남았다.


“후우···”


담배에 불을 지핀 잭이 태연하게 연기를 내뿜었다.


“팔레니스, 맞지···?”


문고리를 붙잡은 렌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답지 않군, 렌.”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어둠속에서 담뱃불이 오르내렸다. 어깨를 으쓱이는 잭의 꼬락서니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다리에 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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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불사를 베어내는 검-1 21.05.06 52 0 11쪽
118 녹빛의 검은 백화(白花)를 피워낸다. 21.05.04 65 0 12쪽
117 재생 21.04.28 89 0 12쪽
116 이뤄주지 못할 소원 21.04.27 101 0 11쪽
» 정보상과 의사 21.04.25 77 0 17쪽
114 상실 21.04.24 65 0 9쪽
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7 0 11쪽
112 낙마 21.04.14 64 1 13쪽
111 구역질 21.04.12 83 0 11쪽
110 발자국 21.04.09 112 1 12쪽
109 발을 들이다 21.04.07 97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106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76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5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9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3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84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71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8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4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9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83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5 0 13쪽
96 촉수 21.02.08 103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20 0 12쪽
94 탄로 21.02.06 7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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