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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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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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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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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글자수 :
658,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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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2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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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구역질

DUMMY

아침이 왔다.

어두웠던 곳은 여전히 어두웠다. 빛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들어오는 빛은 여전히 한 가닥의 실처럼 가늘었다.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아직도 밤에 있는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이 숲의 모든 사물은 검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무의 결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걸로 발자국도 볼 수 있겠지.’


비어있던 손을 움직였다. 하렐뉴의 어깨를 짚으려 했으나, 그 전에 “우으으···”하는 신음과 함께 작은 뒤척임이 밀려왔다.

서서히 드러나는 새하얀 눈동자. 정처 없이 방황하다 한 줄기의 햇빛을 발견한 시선이 멈춰섰다.


“아침, 인가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제서야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하고 탄성을 내뱉는 그녀였다.


“고마워요··· 곧바로 식사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하렐뉴가 떨어졌다. 붙어있던 어깨에 거리가 생겨났다.

오랜 시간 멈춰있던 팔과 다리가 저릿했으나, 가볍게 무시하고 일어섰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땅바닥을 살폈다. 검은 흙 위에는 말발굽자국이 남아있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단검 한 자루를 그녀 곁에 내려놓고, 자국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렐뉴는 만류하지 않았다. 한 번 되돌아봤으나,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이 괜찮을 거라는 자기최면인지, 아니면 망각인지, 보는 것만으로 헤아릴 방법은 없었기에.

신경을 거두고 몽롱한 의식에 무리를 가했다. 집중. 하지만, 이내 사고가 새어버렸다. 되돌리고, 새어나가기를 한동안 반복하며 걸었다.


‘찾았다.’


한참을 따라가다 거대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이라기보다 손자국에 가까운 형태. 손가락 하나가 성인 남성의 키와 같은 크기. 그 수는 다섯 개로 인간의 것과 유사했다. 지문으로 추정되는 무늬도 보였다.

인간의 손바닥을 확대하면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문득 흘러가는 의문을 붙잡았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것과 거리를 벌리고, 손을 뻗어 대조했다.

어느 하나 벗어나지 않고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의 손바닥과 닮은 게 아니다. 인간의 손바닥이다.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 형태가 부정할 여지없이 같았기에, 우연이라 여길 수가 없었다.

거인, 이라는 단어가 문득 스쳐지나갔으나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희미하게 남은 이성이 알아챘다. 거인은 손가락이 네 개라고. 그건 말도 못하는 꼬마아이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는 건···’


인간. 인간이었던 무언가.

고개를 저었다. 연쇄하는 의문과 두려움을 떨쳐냈다.

중요한 건, 무엇인가가 아니다. 어제의 ‘그것’이 우리를 보고 도망친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어째서 도망쳤는지에 대해서다. 그걸 알기 위함이지, 정체를 밝히려는 게 아니다.

눈길을 돌렸다. 발자국의 옆에 찍힌 또 다른 발자국. 비교적 작고, 고리처럼 생긴 말의 발굽.


“어···?”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는 순간, 사고가 끊겼다. ‘그것’의 발자국은 이어져있었다. 말들의 발자국을 쫓으며, 여기까지 이어져왔다.

말도 안 된다. 부정하면서도, 초점 잃은 눈동자가 발자국을 따라간다.

무의식이 발자국에 발자국을 겹치며, 흔적을 쫓았다.

조금도 지나지 않아 발자국이 변했다. 작은 점. 작은 점이 다섯 개씩.

거대한 환들이 흙 위를 도배하고 있었다. 그저 동그란 자국이라 인식하기에는 지나치게 혐오스러웠다.


“···리시스 님?”


따라가다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렐뉴의 것이었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까.

잘못 쫓아왔나 싶어서 아래를 바라봤다. 지문으로 새겨진 커다란 원. 나는 여태까지 어떠한 실수도 저지르지 않고, 무사히 쫓아왔다고 재차 확인했다.

나무 하나. 어젯밤 등을 기대고 머물렀던 나무 한 그루. 그 너머에서 나를 부르는 하렐뉴가 가짜이기라도 한 걸까.

차라리 그리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말없이 서있자, 하렐뉴가 걱정스런 눈초리로 다가왔다.

환각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생겨났다.

손을 뻗고,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만질 수 있었다. 촉감도, 기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내주셨던 커피, 어떤 원두로 내렸던 거였죠?”

“으음, 페르티안 아니었나요? 리시스 님이 한 입에 맞추셨잖아요. 어머님께서 가장 좋아하셨다고도 들었고요.”


그녀는 가짜가 아니었다. 환각도, 환청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나무 뒤의 흔적들은 뭘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부정할 수만 있다면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해야만 했다. 그럴 리가 없어야만 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없어야만 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쳐왔다. 다가왔었다. 어젯밤, ‘그것’은 우리를 쫓아왔다. 쫓아와서는 먹지도, 죽이지도 않고 지켜보았다. 소리 없이, 눈치 채지 못하게. 고작 나무 한 그루에 그 거대한 몸을 숨기고.

나로서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욱···!”


구역질이 나왔다.


“리시스 님?!”


화들짝 놀란 하렐뉴가 손을 뻗었다.

공포에 저며진 이성이 그것을 내쳤다.

달궈진 쇠에 닿기라도 한 듯, 하렐뉴가 손을 거둬들였다. 가슴께에 끌어안고는, 나에게서 물러선다.

두렵다. 무섭다. 도망치고 싶다. 죽고 싶지 않아.

나약한 본성이 얼굴을 내민다.

심호흡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진정하지 못하고, 피해망상을 가속한다.


“···아니야, 아니라고···”


생겨나는 최악의 가능성들을 모두 부정하고, 떠나려던 이성을 붙잡았다.

머리를 감싸쥐고, 도망치려던 무릎을 억지로 접는다. 일부로 자신을 넘어뜨린다. 도망치지 못하는 상황에 가둔다.

그제서야 인지한다. 아직은 살아있다고. 그리고,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무기가 있고, 그것들을 조잡하게나마 다룰 실력도 쌓아뒀다.

쉽게 죽을 리가 없다. 죽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 저질러왔던 모든 죄악들이 무의미했다고, 그렇게 받아들이며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


“후우···”


입가를 닦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예상보다 낮은 곳에 있었다. 주저앉은 나의 앞에서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는 모습.

얼결에 헤매던 하렐뉴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차마 뻗지 못한 두 손을 허공에서 주춤거리며, 소심하게 물어왔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휴우. 하렐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살포시 손끝으로 가슴을 눌렀다.


“너무 놀라서, 뿔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하렐뉴는 무언가를 물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말린 과일과 육포가 적절히 뒤섞인 그릇을 건네주고는 조신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이따금씩 나에게로 시선을 보내왔으나, 마주쳐도 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도망치듯 시선을 피하는 그녀였다.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내가 어째서 구역질을 했는지 궁금해 하는 기색이었으나, 물어오지는 않는다.

조금만 더 진정되면 말해주자.

보존식들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궁리했다.

본 것을 그대로 전한다면, 그녀 또한 공포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우선은 식사를 마친다. 수면을 취하고, 그 다음. 그 다음에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판단되면, 사실을 말해준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겠지.


“리시스 님. 제 이름, 특이하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돌연히 하렐뉴가 말을 걸어왔다.


“···팔란타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특이한 편이에요. 하렐뉴. 원래는 특이하지 않은 이름이었지만요.”

“그렇습니까.”


대답하자, 그녀가 미소 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정적을 싫어한다는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확히 이유를 짚어내지 못했다.

근래의 그녀는 조용하더라도 곧잘 참아왔고, 괴로워보이지도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실은, 잭이 바꿔준 이름이에요. 그것도 엄청 성의없이 바꿨어요. 하렐이라는 이름에, 새롭다는 뜻을 가진 뉴를 붙인 게 고작이라니까요.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해요.”


어렴풋이 알고 있다. 모른 체하면서도, 나는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나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고. 일부로 말을 걸어주고 있다고.


“···그렇습니까.”

“네, 그래요. 그러니까, 으음··· 리시스 님이 괜찮으시다면, 하렐이라 불러주셔도 괜찮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불러주시지 않았지만요. 섭섭하다거나, 그런···”


나는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하렐뉴의 말이 멈추고, 정적이 흘렀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대화는 그보다도 맥락 없이 끊겨버렸다.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고 알면서도, 해야만 했다.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이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야만 했다.

무언가가 느껴졌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척이 등줄기를 차갑게 식혔다. 시선을 받고 있다고 짐작했다.

대거를 뽑아들었다.


“제 말소리 때문일까요···”


하렐뉴가 붉은 문자가 새겨진 종이다발을 꺼내들며 작게 속삭였다.


“히이이잉!”


묶어둔 말들이 소란스럽게 몸부림쳤다. 발을 마구 찧었다. 풀어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낮에 활동하는 마물이라면··· 아마, 휴먼페이스일 거라고 예상돼요.”


소리에 집중했다. 말발굽 소리. 그 사이로 들려오는 하렐뉴의 설명. 그리고, 이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무언가.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

모조리 의식하고, 닥쳐올 기습에 대비했다.


“···계속해주시죠.”

“인간의 얼굴을 가진 개. 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다만, 손이 달려 있어요. 네 다리로 달리면서 두 손으로 덮칠 거예요.”

“무리를 이룹니까?”

“아니요, 보통은 이루지 않아요. 겁이 많아서 사람을 습격하는 일도 적고요. 이대로 덤비지 않고 지나가주면 좋겠지만···”


만일 덮쳐온다면,


“이 일대의 포식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증식했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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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상실 21.04.24 65 0 9쪽
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7 0 11쪽
112 낙마 21.04.14 64 1 13쪽
» 구역질 21.04.12 83 0 11쪽
110 발자국 21.04.09 112 1 12쪽
109 발을 들이다 21.04.07 96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106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76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5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9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3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84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71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8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4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9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83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5 0 13쪽
96 촉수 21.02.08 103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20 0 12쪽
94 탄로 21.02.06 7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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