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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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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01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1.03.19 01:19
조회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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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잭이라는 화제

DUMMY

쓰러진 성기사가 보였다. 공포와 위압감은 남아있지 않았다.

찌그러진 가슴. 막아내지 못한 방패는 그 주변을 굴러다녔다. 터져나온 피가 눈구멍에서, 목과 어깨 사이의 틈새에서 흘러나왔다.

죽은 걸까. 잘, 모르겠다.

나는 살았다. 살아있다. 그것만이 확실한 생사였다.

무리해서 내딛은 무릎이 비틀리듯 무너졌다. 지탱할 창도, 검도 지금은 들고 있지 않다. 가볍게 스러진다. 차가운 땅바닥에 등을 맡긴다.


“그 기술, 엄청나네요. 누구한테서 배운 건가요? 솔직하게 말해서 부럽네요.”


조심스럽게 다가온 하렐뉴가 곁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부탁하지 않아도 무릎의 타박상을 치료해주었다. 일반적인 생채기에 비해 오랜 시간을 들이는 것 같았다.


“타박상은 치료하기 힘들어요. 상처는 덮으면 그만이지만, 멍이 들거나 부러지는 건 덮는 걸로 고칠 수가 없으니까요. 조금 오래 걸려도 이해해주세요.”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에 집중했다.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흘깃거리는 눈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비추지 않았다.


“기사는···?”

“죽었어요.”

“···그렇습니까.”


어떻게 죽었다는 걸 안 걸까. 성기사를 쓰러뜨린 건 방금 전이다. 하렐뉴가 시체에게 다가가 확인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확인을 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성기사가 죽고, 내가 넘어졌다. 그 뒤에 바로 하렐뉴가 왔다.

시체를 보고 왔다기에는 너무나도 부자연스럽다. 죽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안이하다.

수용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야만 한다.

복수 같은 건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죠?”

“비밀이에요.”


하렐뉴가 답하며, 치료하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느껴지지 않는 통증에 치료가 끝났음을 깨닫고 일어섰다.

무언가를 감춘다는 것은 의심을 사는 일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의심을 사는 건 좋지 않다. 그녀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감추었다.

그만큼 중요한 비밀이라는 건가.

마음에 걸리지만, 지금은 실랑이를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떠나간 순찰병들이 곧 돌아오겠지. 보다 강력한 전력을 데려올 거다.

치료가 끝났고, 성기사의 죽음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무사히 도망치는 것뿐이다.

이어가고 싶은 대화도, 거두지 못하는 의심도 살아남은 뒤에.

무기들을 챙겼다. 성기사의 주위를 나뒹굴던 방패는 들고 다니기에 과분한 무게와 크기였다. 방패는 포기하고, 철퇴만을 챙겼다.

찌그러진 갑주에서 호흡은 느껴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팔과 다리를 잘라놓고 싶지만, 그럴 시간은 남아있지 않았다.

죽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언데드가 된다면, 어디선가 고용된 화형인들이 처리해줄 거다.


“이제, 어떡하실 건가요?”

“도망칠 겁니다. 따라오시죠.”

“아까는 버린다면서요.”

“그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해봐도,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렐뉴가 따라오지 않더라도 문제없이 그림자 숲을 넘어 시셀티스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렇게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 그렇게 우위에 서 있으려고 했다.

나름대로 쌓아왔던 노력이 단순한 실수 하나로 흐트러졌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본심이 나왔다.

기사를 쓰러뜨려서 헤이해진 건가.

이미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잊어달라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는 동반자로 인정하시는 건가요?”

“···좋게 말하자면, 그런 셈이겠죠.”

“좋아요.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보자고요.”


단정하고도 고요한 목소리로.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악수도 미소도 곁들이지 않은, 미미한 문장.

사무적인 태도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것이 꾸밈없는 모습인 걸까.

문득 드는 호기심이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화가 끊기고서도 제법 걸었다. 때로는 뛰기도 했다. 조용하게, 순찰병들의 기척에 주의하며 빠져나왔다.

이제는 안심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안심할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다.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유지한다. 고개를 움직이기보다, 눈동자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다행히 추적자는 없었다. 순찰병들에게 들키지도 않았다. 머지않아 무사히 여관에 돌아올 수 있었다. 땀과 피에 젖은 몸을 우물에서 대충 씻어내고, 숙실로 돌아왔다.

혼자 있던 하렐뉴는 창밖을 바라보며, 어색한 음색들로 목을 울리고 있었다.


“오셨네요.”

“먼저 잠드신다고 하셨는데, 용건이라도 있습니까?”

“이제는 아시잖아요. 제가 혼자서 잠들지 못하는 여자라는 거요. 조용한 것도 싫어하고요. 싫어한다기보다는 무서워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요.”

“비슷한 거니 딱히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묵묵하게 창대들을 풀어 벽에 기대어놓았다. 그 옆에는 검을, 그 옆의 책상 위에는 총과 단검들을 풀어두었다.

급격하게 가벼워진 몸이 하늘로 떠오를 것 같았다. 의자에 드러눕듯이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깃털 같은 무게감에 익숙해지고서야 자세를 바로잡았다.


“리시스님은, 잭과 닮아계시네요.”

“어느 부분이···?”

“그러게요. 어느 부분이 닮은 건지는 몰라도, 닮아있다는 느낌은 계속 들어요.”

“···그렇습니까.”


대답하며, 단검 한 자루를 벨트에서 뽑았다. 손잡이와 날을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아셸트라, 작게 중얼거리자 눈부신 빛이 날을 쥔 손 틈 사이로 번쩍이다 사라졌다. 죽인 사람의 영혼을 흡수한다. 그리고, 그 기술도.

과거에 비하면 이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 잭이 원하는 건, 죽인 자의 힘을 약탈하는 이 힘일까. 단테 또한 이 힘을 원하는 걸까. 구르게스는?

···모르겠다.


“잭이, 세계의 평화라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럴만도 해요. 그야 잭인걸요. 첫인상부터 죽을 때까지 나쁜 척만 하잖아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잭이잖아요. 안 그래요?”


후훗. 하렐뉴가 입가를 가리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차마 가리지 못한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다. 눈가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

그리운, 애틋한, 사랑스런, 소중하고도,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는 미소.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둘이나. 이제는 하나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잭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잭을, 믿는 겁니까···?”

“저의 구원자니까요.”

“구원자···”


앵무새처럼 하렐뉴의 말을 따라했다. 유일하게 와닿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처럼 웃을 수는 없었다.

웃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생각하지 않고 흘려보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괴로워진다.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놓고, 자책에 빠져든다.

그러니 그 구실을 흘려보낸다.

정적으로, 창밖으로 의식을 틀어놓는다.


“이전에, 잭이 몇 번 구해주고는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믿지 않으시는 건가요. 주의 깊은 사람이시네요.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요.”

“아무도, 그의 정확한 목적을 말해주지 않으니까요. 구해지더라도, 이용하기 위해 살려놓았을 뿐이라는 인식이 굳어져버렸죠.”

“제가 알려드릴게요.”


순간 기대감이 차올랐다. 심장의 박동이 커다랗게 들려왔다. 치켜뜬 두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제야, 무언가를 알 수 있다. 거짓이라도 좋다. 거짓은 어느 정도 솎아낼 수 있다. 이제는,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 치일대로 치이며 흘러가기만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는 거다.

부풀어오르는 기대감이 한도 끝도 없이 심장을 키워갔다. 잠깐 사이에 지나치게 커져서 답답하고 괴로웠다. 폐를 억누르기도 하는 건지, 호흡이 멈추기도 했다.


“알려, 주시는 겁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약속할게요. 잭이 신뢰하는 당신이, 잭을 신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니까요. 나쁜 의도로 미루는 건 아니니,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 지금은 단지, 설명하기 까다로워요. 잭도 아마 그래서 알려주지 않을 걸 테고요.”

“···그렇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들어차있던 맥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이 녹아내리듯 늘어졌다.

어지간히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실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수습했다. 아, 하고 튀어나올 뻔한 탄성을 도로 집어넣었다.

하렐뉴는 나에게 자신을 지키라고 말하는 걸까. 비꼬아서 생각한다면, 그렇게 보아도 이상하지 않다.

알려주지 않을 거면서, 나를 이용하기 위해 지키지 않을 약속으로 유혹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녀를 밉게 보지 않았다.

여자여서인가. 하렐뉴가 남자였다면, 부정적으로 바라봤을까. 사랑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런 이유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배제할 수는 없다.

나는 남자고, 하렐뉴는 여성이다. 죽이는 것도, 때리는 것도 다소 꺼려진다.

여차 할 때에는 마다하지 않고 버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무의식이 깊숙한 곳에 탑재되어있다.


“오늘은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싸우느라 지치셨을 테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같이 잘까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가끔씩은 밤상대가 있는 편도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도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런가요. 언젠가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남자를 상대하는 건 익숙하니까요.”

“···마음만.”


나의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방에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

감정의 통제에 피폐하리만치 익숙한 나라고는 해도, 일단은 스물하나의 건장한 청년이다.

아름다운 여성에게 한 침대에서 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아무래도 몸이 반응해버린다.

잊으려고 눈을 감는다. 그곳에는 아루아가 웃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줄게.

말을 건네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리시스님.”


마침 잠에 드려는 찰나, 하렐뉴가 불렀다. 눈을 뜨고 바라보자, 멀리 떨어진 침대에서 나에게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손이라도 잡아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래도 불안해서 잠에 들지를 못하겠어요.”


무채색의 표정. 그러나, 간절히 내미는 손이 나더러 애원했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올 것 같았기에, 잠자코 걸어가 잡아주었다.

아루아와 다르게 부드럽지도, 따듯하지도 않다. 말없이 잡고, 바닥에 앉아 침대에 기대었다.

창대를 옆에 두고, 검을 끌어안는다. 대거와 도끼, 총, 석궁 같은 것들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놔둔다. 그제서야 안심할 수 있게 된다.

그녀 또한 안심했는지, 머지않아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다가오는 기척은 없는가. 훔쳐보는 시선은 없는가. 한참을 확인하고, 살피다가 이내 눈꺼풀이 닫혔다.

미지근하게 의식을 유지하며,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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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불사를 베어내는 검-2 21.05.08 67 0 11쪽
119 불사를 베어내는 검-1 21.05.06 52 0 11쪽
118 녹빛의 검은 백화(白花)를 피워낸다. 21.05.04 65 0 12쪽
117 재생 21.04.28 89 0 12쪽
116 이뤄주지 못할 소원 21.04.27 101 0 11쪽
115 정보상과 의사 21.04.25 76 0 17쪽
114 상실 21.04.24 65 0 9쪽
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7 0 11쪽
112 낙마 21.04.14 64 1 13쪽
111 구역질 21.04.12 82 0 11쪽
110 발자국 21.04.09 112 1 12쪽
109 발을 들이다 21.04.07 96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106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76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5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9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3 1 11쪽
» 잭이라는 화제 21.03.19 84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71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8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4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8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83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5 0 13쪽
96 촉수 21.02.08 103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20 0 12쪽
94 탄로 21.02.06 7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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