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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00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1.04.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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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고정부(固定附)

DUMMY

장막이 흐려져 가고 있다.

가파르게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감각 없는 팔을 움직였다.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정처없이 꺾이는 무릎을 할버드로 지탱했다.

문득 올려다본 천장에는 빈틈 하나 없는 그물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많은 휴먼페이스가 장막을 둘러싸고 팔로 두드렸다. 손톱으로 긁어대고, 그럴 때마다 끼기긱 하는 불쾌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기껏해야 1분인가···”


몇 번째더라.

떠올리려다 떠오르지 않아 생각을 관두었다.

장막이 사라지면 그물이 덮쳐온다. 그 일부를 찢고, 터트리며 흘러들어온 소수를 장막에 가둔다.

점차 능숙해져서 처리하는 속도가 올라갔지만, 그만큼 지쳤다. 지친 만큼 장막의 지속시간이 줄었다.

결과적으로 이제 휴식을 취할 시간은 1분 남짓.

그 짧은 시간에 체력을 회복하기란 불가능했다.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고, 불가능에 아직을 외친다. 그렇게 버티고 있다.

죽을 생각은 없다. 포기하지 않는다. 두렵다던가, 힘들다던가. 그런 생각은 물론 있다.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과 피로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이유는 될 수 없다.


“후우···”


이제 남은 시간은 30초. 어쩌면 그보다도 짧을 것이다. 길다고는 도저히 말하지 못한다. 어느 휴먼페이스의 손톱이 장막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하렐이라 불러주셔도 괜찮아요.』


결국 그녀에게 향한 감정은 뭘까.

짧은 순간동안 생각했다.

사랑은 아니다. 우정이라기에도 애매하다. 기대. 어쩌면 그것에 가장 가깝다. 그녀와의 무언가에 기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


‘기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번에도 나는 나의 각오를 손바닥 뒤집듯 깨부쉈다.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서는 스스로를 사지에 몰아넣었다.


‘일부로 그랬던 걸까.’


하렐은 어쩌면, 나에게 오해를 시키고 싶었던 걸지 모른다.

잭이 붙여준 이름이 아닌 자신의 본래 이름을 알려주고, 내게 그 의미를 헤아리게 만든다. 세계의 평화라던가, 마신이라던가. 그런 것들 상관없이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관계를 원한다고.

그렇게 이해하도록.

그렇게 이해하고,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구태여 그 말을 꺼냈던 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꼴사납게 이용당했다. 잭의 목적은 이곳에서 나를 죽게 하는 것이었고, 하렐은 그를 위해 이곳까지 인도했다.

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수일까.

아무리 그래도 피해망상이 지나쳤다.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살아만 있다면···’


그나마 움직이는 의수로 검을 쥐었다.

장막의 가장자리로 이동하고, 구멍으로 빠져나온 휴먼페이스의 팔들을 잘라냈다.

떨어지자마자 녹아내리는 그것들을 피해 다니며, 장막의 효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웨아아아아아아아악!!”


마침내 사라진 장막. 기다린 만큼의 울분을 토해내며 검은 수압이 덮쳐왔다.


“파쇄격(波碎擊).”


파동이 퍼져나갔다.

허공이란 연못에 돌을 던진 듯 공기가 일렁였다. 그것은 잔잔한 울림이었으나, 풍경을 일그러뜨렸다.

하나의 몸이 폭발했고, 그 여파로 얽혀있던 그물들이 산산이 끊어졌다.

떨어지는 그것들을 베어내고, 붙잡아 던지며 틈을 만들었다.


“레이션트(결투의 빛)”


치켜든 검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분수처럼 피어올라, 퍼지고, 합쳐지며 거대한 막을 형성했다.

몰려오던 파도는 방파제에 부딪혔다. 앞서오던 몇 마리가 동료들의 몸에 짓눌려 하나의 얼룩으로 자리 잡았다.


-푹!


발치까지 다가온 휴먼페이스의 등에 칼날을 꽂고, 역수로 뽑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달려왔다.

숫자를 세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기에, 오른손에 쥔 할버드를 짧게 고쳐 쥐었다.


“아아아아아악!!”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빈틈없이 들어찬 검은색이 땅과 공중을 구분 짓지 않고 달려온다. 기다란 두 팔을 뻗고, 이빨을 드러낸다.

숨을 들이켰다.


“스읍···!”


휘몰아쳤다.

검이 허공을 베어내고, 도끼날이 지면을 절단했다. 한 바퀴를 완주한 무기들에 검은 피가 굳어졌다.

손목이 지끈거렸다. 무게를 버티지 못한 발목이 접질렸다.


“웨아아악!!”


할버드의 날에 박힌 휴먼페이스가 팔을 허덕이며 죽어갔다. 높이 치켜들고 포물선을 그려 내리찍었다. 검은 피에 발을 묶인 한 마리와 함께 두 마리가 양단됐다.


“후우···”


차오른 숨을 내뱉었다. 검은 피에 발을 묶인 휴먼페이스들을 둘러보았다. 적당한 간격으로 고정된 장소를 찾고서는 호흡을 중단했다.

오래 머물 수는 없다.

휴먼페이스가 검은 피에 묶이는 건 잠깐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발바닥을 녹여서 기어온다. 때로는 그것을 입에 머금어 쏘아댄다. 심지어 숫자가 충분하면 자신의 몸을 내던져 발판으로 만든다.


‘할 수 있을까.’


망설임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휴먼페이스의 두 팔을 검으로 잘라내고, 안면을 짓밟아 올라섰다. 구부러진 등에 발을 내딛고, 다음을 향해 뛰어올랐다.

높이 떠오른 전신. 부유감이 사라지기 전, 짧게 쥔 할버드의 도끼날과 검을 교차했다.

떨어뜨리기 위해 뻗어난 검은 팔들이 다가왔다.

붙잡히면 끝장이다.

새하얗게 멀어져버린 의식의 끈을 잡아당겨, 한순간 끌고 왔다.

떨어지는 몸, 휘둘러지는 팔.

손끝의 감각이 곤두섰다. 한계에 다다른 집중력이 검끝까지 내달렸다. 느껴본 적 없는 동질감이 무기의 존재를 망각시켰다.

그 찰나의 순간, 거머쥔 자루들은 무기가 아닌 신체의 일부였다.

일섬(一閃).

두 자루의 빛이 교차했다. 저항 없이 부드럽게 파고드는 두 칼날. 소리조차 나지 않고 잘려버린 검은 팔들이 시야의 구석까지 뛰쳐나갔다.


‘방금 그건···’


그대로 안면을 짓밟고, 등에 발을 내딛어 다시 한 번 뛰어올랐다.

같은 자세, 같은 동작으로 또다시 팔들을 잘라냈다. 그러나, 방금 전과 같은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쾌한 절단음. 시끄러운 비명소리와 함께 힘이 빠져나갔다.

간신히 착지하고, 마지막으로 할버드를 장대삼아 높이 올라섰다.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가자, 주변의 휴먼페이스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몸에 반동을 주며, 할버드를 놓았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고, 검을 휘둘렀다. 벽처럼 올라선 휴먼페이스들의 중심. 그곳을 향해 손을 뻗어, 파괴했다.


“파쇄격(波碎擊)”


여파를 견디지 못한 장벽이 붕괴했다. 떨어져 내리는 벽돌들이 높이 떠오르고, 빛의 장막에 부딪혀 추락했다.

그 사이 지면에 짓눌린 녀석들을 모조리 처리했다. 쉴 새 없이 내달리며 검으로 휩쓸었다. 떨어지고, 일어서는 그 몸들을 차고, 밟아 으깨며 내려찍었다.


“허억···! 허어어억···!”


폐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까지 확실하게 절명시켰는데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장막이 부서지고 있다. 허물어진 구멍들로 지겨운 손톱과 손과 팔이 비집고 들어온다.


“아직, 아직은···”


그렇게 말하는 입이 내뱉은 건 허풍이었다. 허세밖에 되지 못했다.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다.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해서 몸이 지치지 않는 건 아니다.

검은 피를 뒤집어쓰고, 수많은 상처로부터 붉은색을 흘려보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거듭하던 신체가 드디어 한계를 맞이했다.

정처없이 꺾였다. 접질린다던가, 그런 수준이 아니다.

완전히 스러졌다. 일어날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무기를 휘두르던 팔은 거동을 멈추었고, 이제는 아득하기만 한 의식이 눈꺼풀을 닫았다. 다시 떠보아도, 다시 닫힐 뿐이었다.

그나마 움직이던 의수는 언제부터였는지, 검은 피로 도배되어 작동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선택지라고는 포기밖에 보이지 않는다. 죽음이란 결과밖에 비치지 않는다.


“미안해, 아루아···”


그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입버릇. 나의 옷깃을 꼬옥 쥐고서, 가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 머리칼을 넘기는 손짓. 초면이었던 나를 구해주고, 사흘 동안이나 버텨가며 돌봐주었던 상냥함.

아아, 수를 세자니 끝이 없어서 한 마디로 정리한다.


“정말, 미안해···”


그리고, 그리고.

또 한 사람.


“죄송해요, 어머니···”


장례식은 해주고 싶었다. 꽃 한 송이 바치고 싶었다.

어릴 적에 그린 낙서가 그대로 남은 식탁에서 마주보고 싶었다.

밥도 차려주고, 커피도 내려주고.

그러고는 어떠냐며 으스대고 싶었는데.


‘이제 와서···’


버리지 못한 미련이 아직까지도 감기는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것을 피로가 덮고, 뜨겁게 달아오른 눈물이 또다시 덮고.

그 반복을 해나가는 사이, 장막이 사라졌다. 엉겨붙은 폭포가 떨어졌다.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다는 게 그나마의 위안이 되는 순간이었다.

포기하지 못한 손가락이 흙을 움켜쥐었다.


“고정부(固定附)···!”


멀어져가는 청각이 허망한 희망을 들려주는 걸까. 바람소리에 묻혀버린 목소리가 아스라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눈을 떴다. 환한 푸른색이 일렁였다. 밤하늘의 혜성이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고도 아름다운 푸른색. 그 수가 어찌나 많았는지 눈물에 뒤덮인 시야는 그것을 은하수로 착각했다.

그곳에서 흩날리는 푸른색의 머리칼. 뒤따라온 바람에 흔들리는 치맛자락. 새하얀 눈동자가 한겨울을 덮는 눈처럼 따스하게 내려다보았다.


“잠시, 빌릴게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그녀의 얼굴. 그러나, 그 입꼬리만이 흐릿하게 올라가있었다.

그것은 마치 감정을 잃어버리고, 그저 웃어보여야 한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기에 비로소 만들어낸 억지미소 같았다.

사실은 어땠을까.

묻고자 입을 열었을 때.

검을 앗아든 그녀는 사라졌다.

꺼지지 않은 불꽃들이 갈라졌다.

검은 피가 튀어오를 새도 없이.

일대가 조용해져갔다.

거센 바람이 나무사이들을 오갔고, 그 소리가 지나간 곳에는 고요한 어둠만이 남았다.

꺼림칙한 비명은 이제 들려오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한 가닥의 바람이 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챙강.

검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그 파편들이 떨어졌다.


“하렐···”


타들어가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에헤헤. 칠칠치 못한 웃음소리.

다가온 그녀가 나의 머리를 붙잡았다. 살며시 들어서는 살포시 무릎에 올렸다.

전해져오는 따스함. 포근함. 지독한 피 냄새를 지워내는 찻잎의 향기.


“조금만, 이대로 있어주세요···”


자그마한 속삭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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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불사를 베어내는 검-2 21.05.08 67 0 11쪽
119 불사를 베어내는 검-1 21.05.06 52 0 11쪽
118 녹빛의 검은 백화(白花)를 피워낸다. 21.05.04 65 0 12쪽
117 재생 21.04.28 89 0 12쪽
116 이뤄주지 못할 소원 21.04.27 101 0 11쪽
115 정보상과 의사 21.04.25 76 0 17쪽
114 상실 21.04.24 65 0 9쪽
» 고정부(固定附) 21.04.24 67 0 11쪽
112 낙마 21.04.14 64 1 13쪽
111 구역질 21.04.12 82 0 11쪽
110 발자국 21.04.09 112 1 12쪽
109 발을 들이다 21.04.07 96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106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76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5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9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3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83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71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8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4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8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83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5 0 13쪽
96 촉수 21.02.08 103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20 0 12쪽
94 탄로 21.02.06 7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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