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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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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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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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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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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이동계획

DUMMY

잭은 지도를 건네주었다. 이곳에 필요한 단서가 있을 거라는 한 마디와 함께, 그는 대화를 끝마쳤다. 아루아의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한 단서를 손에 넣었고, 잭에게서 추가적인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불만은 없었다.


‘그나저나, 시셀티스인가.’


펼친 지도에 그려진 것은 미궁도시 시셀티스였다. 하나의 거대한 미궁을 중심으로 집결된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주로 머무는 인력이 모험가, 용병이기 때문에 성벽도 검문관도 존재하지 않아 도달할 수만 있다면 침입은 쉬운 셈이지만.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어···’


또 하나의 지도를 펼쳤다. 그곳에는 사르티아를 기준으로 시셀티스, 알텐하르크, 세르나리아까지의 교역로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연한 선으로 그려진 네모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최단거리의 교역로를 기준으로 하면 대략 8칸 정도. 인간의 평균적인 보폭으로 하루 16시간을 걸어서 이틀을 갔을 경우 1칸을 지날 수 있는 거다.

단순계산만으로는 16시간씩 16일을 걸어야지만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최단거리의 교역로를 선택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 16시간씩 쉬지 않고 이동하는 게 가능할 때의 가정이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계산으로 끝낼 수 없다. 최단거리의 교역로는 마차가 많이 다니지만, 미궁도시 시셀티스로 향하는 길인만큼 모험가나 용병의 왕래가 잦을 거다.

설령 협박이나 위협을 가해 마차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상인이 그들에게 돈을 부르며 도망친다면 막을 방도가 없다. 즉시 전투가 벌어지겠지.

더군다나 대치상황이 된다면, 나의 얼굴을 아는 자들은 현상금에 침을 흘릴 것이다. 현상금이 나타내는 위험을 들먹이며 그들을 역으로 위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항상 최악을 가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현상금사냥꾼 같은 걸 만나면 죽을 테니까.’


벽을 바라봤다.

기억하고 있는 감각을 그대로 실어 손끝으로 그것을 찔렀다. 부딪히는 충격을 이용하여 마디들을 부드럽게 접으며 두 번째. 그렇게 완성된 주먹으로 세 번째 타격을 한 곳에 집중시켜 단숨에 퍼붓는다.


“파쇄격(波碎擊)”


투명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잔잔한 연못의 물에 손을 담그는 감촉. 단단할 터인 벽이 부드러운 실크 커튼처럼 느껴졌다.


-콰앙!


밤의 적막과 함께 깨져버린 벽의 파편이 어둠속을 휘날렸다. 소나기의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자갈들을 바라보며, 손을 거두었다.

손의 거동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고,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실패를 예상했으나, 성공했다.


“성공, 했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구태여 추측을 하자면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술 자체가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루드의 기술을 재현해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

어느 쪽이 되었건 놀랍다는 인상을 버리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놀랍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우연이라고 치부하지는 못하더라도, 남발하거나 맹신해서는 안 된다고 방침을 정했다.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자.

이 기술은 내가 배운 것이 아니다. 루드가 지니고 있던 일부다. 즉, 루드의 영혼이 나를 잡아먹으며 어느 정도 일체화를 진행시켰기에 사용가능한 힘이라는 소리다.


‘인격을 대가로 사용해야 하는 걸지도 몰라···’


기술 자체가 간단하다는 가능성도 있지만, 생각해야 하는 건 언제나 최악의 상황이다. 긍정적인 사고는 내가 서있는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항상 부정적으로.

그래, 부정적으로 다시 본제로 돌아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일단 교역로의 주변으로 이동한다면, 최악의 상황이란 현상금사냥꾼과 적대하는 거겠지. 얼굴을 가려서 피해갈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자칫 걸린다면 도망도 못 쳐보고 죽을 거다.


‘죽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죽음에 임박할 때마다 파쇄격(波碎擊) 같은 기술이 뛰쳐나와서 매번 연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치명적인 오만밖에 되지 않는다.


‘역시 교역로는 쓸 수 없어. 그렇다면 남은 건···’


결국 남는 것은 교역로에서 벗어난 경로. 시셀티스와 사르티아의 중간에는 대삼림이 하나 있다. 위치는 시셀티스 쪽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걸어서 닷새면 들어설 수 있다.

우거진 나무들을 엄폐물로 사용하는 게 가능하고, 교역로에서도 꽤나 떨어져서 현상금사냥꾼을 마주칠 위협도 적을 테지.

반대로, 마물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생겨난다. 산적이 있을지도 모르고, 마물을 사냥하기 위해 찾아온 모험가 파티도 있을 거다.

하지만, 때문에 그 편이 더 안전할 거다. 진형을 갖춘 모험가 파티는 단독행동을 용서하지 않는다.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면, 마물이라는 변수와 산적들의 유인작전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발을 묶어주겠지.

그것은 같은 인간일 산적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싶다.

그렇다면, 가장 큰 위협은 마물이겠지만. 마물을 상대로는 최후의 수단인 파쇄격(波碎擊)을 사용할 수 있다. 무기를 든 사람을 상대로는 리스크가 크지만, 대부분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달려드는 마물에게는 효과적인 기술.

다음번에도 재현에 성공할 거란 확신이 드는 건 아니지만, 사용을 한다고 했을 경우 사람보다는 마물을 상대하는 편이 나을 거다.


“거리는···”


그려진 네모가 약 11개. 숙식하는 시간까지 계산한다면 어림잡아 한 달은 걸리겠다.


‘그래도 너무 늦는 걸··· 말을 한 마리 구하는 게 좋겠어.’


지도를 접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건물들의 형태로 보아 주택가였다. 마구간을 찾기는 어려운 장소. 주변에 여관으로 보이는 건물이나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관문과 가까운 거리로 이동하는 편이 찾기 수월하겠지···’


일정 주기에 한 번 위치를 옮기는 암시장의 조심성 때문에 생판 모르는 장소에 놓이기는 했으나, 낯선 길이라도 대략적인 구조만 파악한다면 대로로 빠져나가기란 쉬웠다.

그렇게 어두운 골목길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왼쪽을 살피고,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아는 얼굴이 서있었다.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덥수룩하게 기른 푸른색의 머리카락. 그로는 차마 다 가리지 못하는 검은색의 뿔. 감정을 알아보기 힘든 하얀색의 눈동자. 그녀의 눈동자에는 확연한 테두리가 있었기에, 나를 바라보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닫는 것에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잭이 보낸 겁니까?”

“맞아요. 밤상대가 필요할 거라면서요.”

“필요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매몰차게 농담을 흘려 넘기며, 그녀의 뒤로 시선을 넘겼다. 그곳에는 두 필의 말이 세워져있었다.

하렐뉴는 나의 시선이 편하도록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하나는 제 거예요. 남은 하나는 당신 거고요. 금액은 착실하게 지불했으니, 겸연쩍어 하시지 않아도 돼요.”

“···얼마였습니까?”

“빚이에요. 착실하게 지불한 만큼, 착실하게 받을 생각이에요. 물론, 돈은 아니고요.”


하렐뉴가 대화를 마치며 으쌰, 하고 안장에 올라탔다.

훔칠 생각이었던 말을 쉽게 얻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잭이 무슨 목적을 지니고 그녀를 나에게 붙인 건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감시, 라는 간단한 목적도 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닐 거다. 애초에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잭은 알고 있을 거다. 시셀티스의 지도를 건네준 건 다름 아닌 잭이니까.


‘그곳으로 향한 다음에 이룰 목적이 있는 건가···’


시셀티스에서 곧바로 아루아를 구해낼 수 있을 거란 보증은 없다. 그곳에서 아루아를 구해내지 못하고, 아무런 단서도 없지 못한다면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할까.

당연하게도 아젤로 머리를 돌릴 거다. 그곳에서 아루아를 만난 적이 있고,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는 걸 잊을 리가 없으니까. 다음으로 단서를 얻으려 한다면 그곳으로 향하겠지.


‘잭이 그걸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어.’


그렇다면 하렐뉴를 나에게 붙인 목적은 아루아에게, 혹은 아루아를 포함한 나에게 무언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대신하여 하렐뉴를 곁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계하는 편이 좋겠어.’


쌓인 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이 쌓였다고 의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이 쌓였기 때문에. 그 정을 의심해야 하는 거다.


‘잭이 노리는 건, 아루아가 분명해. 어쩌면, 나까지도 포함될 수 있고.’


확실한 건, 아루아를 만나기 전에 그녀의 전력을 확인해야만 한다.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 없는 상대인지를 구분 짓지 않으면 적대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잃을 테니까. 아루아, 그리고 나 자신까지.


“원래 과묵한 편이신가보네요.”


몇 분 지나지 않아 하렐뉴가 말을 걸어왔다.


“과묵한 편은 아닙니다. 먼저 말을 거는 상황이 별로 없을 뿐이죠.”

“그걸 과묵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원래부터 그랬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보다는 덜 했지만, 예전의 나도 다르지는 않았다. 정도의 차이지, 성격의 차이는 아니었다. 달라졌다고 한다면, 그 반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건, 토하고 싶어도 토할 수 없었던 울분 때문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라 납득할 과거였다.


‘항상 도망치고 위로받는 것만 생각하는 찌질이라는 건 바뀌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굴러가던 의심과 사고의 톱니바퀴들을 잠시 멈추고,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상적인 대화가 그립기도 했고, 말을 나누다보면 잭이나 그녀에 대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긍정이라는 독에 뇌가 절여진 생각이지만, 친해진 그녀가 나에게 잭의 꿍꿍이를 실토해줄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또 무언가 생각하시네요. 의심쟁이란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에요.”

“그럼 의심하지 않게 전부 말해주시죠.”

“싫어요. 그리고, 말해도 거짓일지 모른다고 의심할 거잖아요.”


정곡을 찔렸다. 그리고 동시에, 목젖을 찌르는 그녀의 한 마디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한 잔꾀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의심쟁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관두는 순간 이용당하고,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방향은 정하셨나요?”

“예, 팔레니스 숲을 통해서 갈 겁니다.”

“하긴, 그 얼굴로 교역로를 가기는 힘들겠네요. 아, 이거 비하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현상금 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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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6 0 11쪽
112 낙마 21.04.14 6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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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발을 들이다 21.04.07 96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106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76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5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9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3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83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71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8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4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8 0 12쪽
» 이동계획 +1 21.02.18 83 1 11쪽
97 쥐구멍에서 +1 21.02.16 75 0 13쪽
96 촉수 21.02.08 103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20 0 12쪽
94 탄로 21.02.06 7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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