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19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1.02.16 00:29
조회
75
추천
0
글자
13쪽

쥐구멍에서

DUMMY

잠깐의 티타임이 끝났다.

하렐뉴의 꾸지람에 패배하여 바깥에서 담배를 태우고 돌아온 잭과 소파에서 읽던 책을 덮은 엘무리아스가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에 남은 마지막 모금을 삼켰다. 치워주겠다며 잔을 받아간 하렐뉴는 잠시 떠나갔다, 잭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 그럼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지. 서로 숨기는 거 없이 까보자고. 꼬추 길이 같은 것까지 말이야.”


-깡!


끅끅대던 잭의 뒤통수에 금속쟁반이 작렬했다.

“죄송해요.”라고 한 차례 사과한 하렐뉴가 찌그러진 쟁반을 복원했고, 엘무리아스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대신 묻지. 리시스, 네 녀석이 그곳에 있었던 경위는 어떻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내가 영사관에 있었던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연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우연이 맞았는지 되짚지 않고서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마차를 나에게로 유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엘리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아 내게 접근한 걸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거두지 못한다.

하지만 의심이란 그저 해가 뜨고 지는 것만으로, 숨을 삼키고 내뱉는 것만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야.’


잠깐의 생각을 거치고 지금은 의심이 아닌, 선택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때라는 판단을 내렸다.

우연을 감춘 채 요구할 것인지, 우연을 우연이라 밝히고 자신을 변호할 것인지.

하나를 택하여 길어지던 침묵을 깨뜨렸다.


“···우연이었습니다.”


사실을 밝힌다고 잃을 건 없었다.

사실을 끝까지 감추고,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낸다는 선택지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얻어낸 뒤로는 우연이란 한 마디로 치부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사실대로 말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납득이라는 단어가 그리 쉽사리 생겨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이게 사실이라고 납득할 때까지 설명해야 했다.


“어느 인류창고에서 아루아에 대한 단서를 수집하지 못한 탓에, 다른 인류창고를 찾아가보려 했습니다. 그를 위한 위치정보도 확보는 했었죠. 하지만, 정작 이동수단이 없었습니다.”

“잔가지가 많다.”


엘무리아스가 나무랐다. 잠시 입을 다물고 그의 요구에 따라 잔가지라 불릴 법한 내용들을 잘라냈다. 그러는 와중에 하렐뉴는 “뭐 어때요, 저는 좋은데요.”하고 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일부로 하하 소리 내어 짧게 웃어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야기는 짧은 편이 좋겠죠.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요.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마차가 필요했고, 그래서 빼앗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침 먼 곳에서 마차가 다가왔고, 빼앗기 위해 멈춰 세웠더니 왕의 마차였다.”

“···그게 끝인가?

“예, 정말이지 하늘에서 금덩이가 떨어지는 것보다 황당한 우연이었습니다.”


푸하핫. 잭이 의자를 뒤로 넘기며 웃어재꼈다.

반쯤 넘어지려던 의자를 곁에 있던 하렐뉴가 붙잡아 바로 세웠다.

넘어지는 편이 재밌었을 거라고 항의하는 잭이었다.

하렐뉴가 조용히 하라고 냉혹하게 꾸짖은 뒤에도, 그는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아아, 그래, 세상만사가 다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믿는 건가?”

“솔직히, 우리 쪽도 그거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차라리 이렇게 넘겨버리는 게 낫겠지. 아니면, 우리 700년 묵으신 엘프 양반께서 짚이는 바라도 있는 건가?”


700년. 잠시 숨이 멈추었다. 귀를 의심했다. 엘무리아스의 돌아오지 않는 부정이 의심을 지울 때까지, 머릿속을 백지로 채우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때쯤에는 귓가에 맴도는 잭의 말이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사실이라면, 엘무리아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는 천년의 꽃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500년 전의 마신전쟁에 대해서 처음으로 설명해준 것 또한 엘무리아스였다.

그가 마신교의 일원이고, 마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린 것이라면. 엘무리아스가 마신교의 주교라면.

지어낸 역사에 마신전쟁의 과거가 완전히 뒤덮인 현대에 마신부활이라는 추상적인 목적을 지닌 세력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다.

마신교의 일원이었던 렌의 스승. 그를 마신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마신교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편이 타당하다.



‘하지만, 라이넬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특정 지을 수가 없잖아···’


머리가 복잡했다.


‘가려낼 방법은 없는 건가···?’


그가 마신교의 일원인지에 대해 알아낼 방법. 대화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기 전에 떠올려야만 한다.

어떻게 해야 그가 마신교인지 아닌지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아···”


오랜 고민 끝에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엘무리아스, 벗어주시겠습니까.”


방금 전, 문득 떠오른 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잭의 말이었다. 유리아가 만든 세계에서 나와 마주보고 술을 마시던 잭의 한 마디.

그는 말을 하기 전, 특이한 문신이 새겨진 인간 가죽을 꺼내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마신교의 문신이야. 신자들은 하나같이 이 문신을 새기고 다니지. 예외는 없어.』


나름대로 합리적인 의심이다. 나름대로 적절한 입증방법이다. 엘무리아스가 마신교의 교주 혹은 일원일 가능성은 충분했고, 그 가능성을 입증할 방법이 있다.

때문에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설명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했지만, 나는 그런 당연한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래.

실수했다.


-퉁!


하렐뉴가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

정적이 일었다.

처음으로 그 정적을 깨뜨린 건 엘무리아스였다.


“동성애에 눈을 뜨기라도 한 건가? 머저리 주제에 꽤나 역겹군.”

“···가, 가능···!”


무엇이 가능하다는 걸까. 잽싸게 쟁반을 주워든 하렐뉴가 붉어지는 얼굴을 가리며 수많은 가능을 중얼거렸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가능의 메아리.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와중, 유일하게 심중을 읽은 잭이 끅끅 웃으며 말했다.


“저 양반은 안심해도 좋아. 내가 보증하지. 뭐어, 의심쟁이인 네가 믿어줄 것 같지는 않지만.”

“···믿겠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심하게 부탁하자, 잭의 이야기에서 진상을 파악한 엘무리아스가 “그런 거였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진상 따윈 아무래도 좋을 지경까지 벗어난 하렐뉴는 안경을 쓰고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하악하악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잭이 “어이.”하고 주의를 주고서야 그녀는 안경을 벗고 제정신을 차렸다.

나는 지금의 내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끄럽다는 감정은 분위기가 완전히 정돈될 때까지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잊어버린 감정 중 하나에 속해있었다.

그렇게 원래대로 돌아온 분위기 속에서 드는 것은 생겨나야 했을 감정의 부재로 인한 괴로움이 아닌, 하나의 잊어버리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끝내 가둬두지 못한 나는 뻔뻔하게 입을 열었고, 그렇게 조바심을 해소했다.


“무튼, 납득하셨다면 이제 알려주시죠. 아루아의 위치를.”


...


두 사람이 떠났고, 두 사람이 남았다. 하나는 곧 떠나갈 이였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떠나갈 이었다.

언젠가 이곳에는 적적한 먼지만이 쌓이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도, 요리를 도와주던 사람도, 취미와 취향을 공유하던 사람도 떠나간 이곳에서.

또 한 번의 티타임을 가지는 두 사람은 적요를 막는 최후의 방파제였다.


“상냥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사악하다고 해야 할까요. 잭은 어느 쪽이 좋나요?”

“맘대로 구워먹어. 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 잘 알잖아?”

“그러면 상냥하면서 사악하다고 할게요. 아, 쿠키 드실래요? 이번 거는 요구대로 초코칩 안 넣었는데.”

“드디어 내 취향을 반영해주는군. 아주 기특해.”


잭이 고개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짝짝 박수를 쳤다.

기특하다는 말을 들어서 기분이 좋아질 나이는 지난 그녀였기에, 딱히 기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 칭찬을 잭이 한다면 무조건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탓에 좋은 감정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잭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는 칭찬을 비꼬는 용도로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기특하다는 한 마디. 그것만은 오로지 칭찬의 의미였다.

하렐뉴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고 해도. 딱히 기분이 좋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차가 부족하시면 말씀하세요. 어차피 얼마 안 남아서 다 써버릴 작정이니까요.”


정적이 생겨나지 않도록, 그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했다. 쿠키를 병째로 테이블에 올리는 그 순간에도 영차, 같은 추임새를 넣었다.

그녀가 채우지 못하는 공백에는 잭이 목소리를 채워 넣었다. 빼곡히 들어서는 것은 같잖은 농담이었다.

새 중에서 가장 강한 새의 이름은 참새. 왜가리의 반대말은 왜오니.

재미없다며 웃음 한 번 주질 않는 그녀는 말과 다르게 다른 개그는 없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몇 번인가 무미건조한 농담과 재미없다는 혹평이 오고가자, 하렐뉴는 일부로 초조하지 않을 잠깐의 정적을 만들어냈다.


“허, 네가 조용해지다니. 내일은 해가 사방에서 뜨겠군.”


잭은 끅끅 웃으며, 방금 찻잔에 따라진 홍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많이 걸어왔구나, 하고 잠겨있었어요.”

“동정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꽤나 냉혹한 여자였군.”

“동정, 이요?”


하렐뉴는 측은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 사람에게 동정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요··· 실패한 잭을 상상하면, 그쪽이 더 동정이 가니까요.”


드물게 입을 다무는 잭이었다. 드물게 웃음기를 지우고, 드물게 진심을 꺼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말이야. 그리고 세상에 멸망이 찾아온다면. 자신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목숨을 바쳐서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하면. 너는 어떡할래?”

“심오한 질문이네요. 생각하기 귀찮은 걸요.”


그러면서도 말과 다르게 곰곰이 생각하는 그녀였다.

하렐뉴는 검지로 턱을 짚고, 몸을 왼쪽으로 기울였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녹슨 메트로놈처럼 느긋하게 까딱이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으음 하고 고개를 갸웃하고서는 호탕한 답을 내놓았다.


“몰라요. 그때가 되지 않고서는, 아니지, 그때가 되고서도 모를 것 같아요.”

“그러냐.”

“그런데요.”

“기대를 한 내 잘못이구먼.”

“맞아요, 잭의 잘못이에요.”


기어오르기는. 끅끅 웃은 잭이 대화를 마치며, 그녀에게 얼른 가보라고 손짓했다.


“싫어요. 아직 찻잔이 남았잖아요. 설거지해야 되요.”

“내가 하지. 어서 가봐. 그 녀석, 남을 기다릴만한 성격은 아니야.”

“설거지 할 줄 모르잖아요.”

“···뼈를 때리는군.”


잭은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찻잔과 쿠키를 담고 있던 그릇들을 들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잭의 앞에 늘어놓았다.


“이봐, 뭐하자는 거야?”

“설거지는, 다시 돌아와서 하려고요. 그러니까 건들이지 마세요. 제가 치울 테니까요.”


하렐뉴는 철부지 어린아이를 다루듯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못마땅한 잭이 허, 하고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알잖아. 난 설거지를 못해.”

“그럼 안심이네요.”


대화가 끝났다.

한 사람이 떠나고, 한 사람이 남았다.

홀로 남은 잭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머릿속을 떠도는 누군가의 꾸지람이 손길을 막아섰다.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멈춘 손을 다시 움직여 불을 지폈다.

폐 속을 가득 채우는 연기.


“···에스코트 잘하라고, 리시스. 술래는, 한 명이 아니거든.”


고독 속에서 재가 떨어졌다.

한 사람이 떠났다.


작가의말

 많이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쓰고 싶어서 쓰는 2기 후기! (필독X) +3 21.01.14 153 0 -
공지 1기 후기(필독X) +1 20.10.05 281 0 -
121 불사를 베어내는 검-3 21.05.31 55 0 10쪽
120 불사를 베어내는 검-2 21.05.08 67 0 11쪽
119 불사를 베어내는 검-1 21.05.06 54 0 11쪽
118 녹빛의 검은 백화(白花)를 피워낸다. 21.05.04 65 0 12쪽
117 재생 21.04.28 89 0 12쪽
116 이뤄주지 못할 소원 21.04.27 101 0 11쪽
115 정보상과 의사 21.04.25 77 0 17쪽
114 상실 21.04.24 65 0 9쪽
113 고정부(固定附) 21.04.24 68 0 11쪽
112 낙마 21.04.14 64 1 13쪽
111 구역질 21.04.12 83 0 11쪽
110 발자국 21.04.09 112 1 12쪽
109 발을 들이다 21.04.07 98 0 11쪽
108 아침에는 가재 21.04.03 106 1 11쪽
107 별들에게 호소하는 밤 21.03.27 76 1 13쪽
106 지우지 못한 단서 21.03.24 76 1 11쪽
105 붙잡히다 21.03.23 79 1 11쪽
104 주맥시(呪脈視) 21.03.22 83 1 11쪽
103 잭이라는 화제 21.03.19 84 1 12쪽
102 믿음, 극복, 퍼져나가라 21.03.17 71 1 13쪽
101 성당, 시체, 전투 21.03.13 69 1 24쪽
100 외전-사냥꾼들의 밤 21.03.12 64 0 22쪽
99 간단한 수수께끼 21.03.03 69 0 12쪽
98 이동계획 +1 21.02.18 84 1 11쪽
» 쥐구멍에서 +1 21.02.16 76 0 13쪽
96 촉수 21.02.08 103 1 11쪽
95 협력제안 21.02.08 120 0 12쪽
94 탄로 21.02.06 74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