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을 나서서 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거창으로 향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많이 고민을 했지요.
아침 일찍 거창에 살고 있다는 친구(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온라인으로 익숙해진)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변산 행을 택하게 해주었답니다.
서울에서 변산은 먼 거리라 선뜻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시골집에서는 100킬로 남짓한 거리더군요.
한적한 해안도로를 혼자서 가는 마음이 조금은 쓸쓸하고
적막했답니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낯설기만 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채석강에서 저만큼 물러앉은 바다를 보았습니다.
얼마 만에 보는 저 깊은 바다인지...
아이들은 두려움 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 종아리 온통 적시며
즐거워하지만 나는 이제 닫힌 유리창 안에서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어느새 열정이 식어버린 나이가 되어 있던 것일까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바다는 멍든 제 속살을 드러낸 채
저만큼 물러나 있었습니다.
검은 갯벌과, 검은 바위들.
아이들은 바다 앞에서 파도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닫혀진
유리창 안에서 그 넘실거리는 숨소리를 들었습니다.
열정이 식어버린 대신 관조(觀照)를, 천진한 즐거움 대신 꿈을
꿀 수 있는 세월을 갖게 된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 봅니다.
해안도로를 따라 변산반도를 한바퀴 도는 길에 바다가 훤히 보이는
찻집에 불쑥 들렀습니다.
양하영의 <가슴앓이>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다시 그 노래를 청하여 들었습니다.
검은 갯벌 너머의 바다는 호수처럼 고요하고, 멀리 바다로 향해서만
한사코 뻗어 나온 산들은 짙은 구름을 인 채 침묵하고 있습니다.
더 갈 수 없는 저 건너의 세상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돌아갈 수 없이
굳어버린 몸을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맥이 파도에 쓸리며 탄식하는 곳에서
나는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중얼거립니다.
온 길만큼 더듬어 가면 떠나온 곳이 됩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내가 숨 가쁘게 달려온 그 세월은 거슬러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이
갑자기 깊은 적막감으로 어깨를 누릅니다.
일어서기 전에 고요한 저 바다 깊이 가라앉아 버리듯
그렇게 침몰해가고 있는 하루의 시간을 돌아봅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하고, 언제 다시 와질지 알 수 없는 이 찻집과
바다와 노래들은 가슴에만 새겨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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