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느린 결말

낙오자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05.25 06:23
최근연재일 :
2022.07.07 04:08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361
추천수 :
51
글자수 :
66,820

작성
22.07.07 04:08
조회
17
추천
0
글자
13쪽

허물 (4)

DUMMY

눈두덩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싱그러운 냄새다. 풀내음이 섞인 빗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단지 비릿한 향이 싫었을 뿐이다. 향기는 그날의 기억을 한층 선명하게 만들었으니까. 자식된 자로서 잊지는 말아야 하겠으나, 굳이 되새겨 우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의식이 있음에도 보이는 게 없으니, 생각이 또다시 길어지고 있다.


성의를 다하여 쉬는 건 어렵다. 애써보아도 결론은 늘 그랬다. 불가해한 천성이 있다고 이해하자. 언젠가 다시 핑계가 되더라도 말이다.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물방울이 마침 망막에 떨어진다. 이물감보다는 청량감이 더 기꺼웠다. 본래 내 것이라 믿는 기억으로 재구성된 육체는 이렇듯 순수하다. 하면, 몇 분이나 기절해있었을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정신을 잃은 상태를 길게 유지했다면, 몸이 아직도 바위틈에 끼어있지 않았을 테니까. 안구 위에 떨어진 빗물이 작은 길을 만들며 흐르니, 흐렸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겨울비 씨-.“


목소리를 길게 끌며 그를 부른다.


“일어났나?”


그는 내 위쪽의 나무 위에 누워있었다. 토사물과 함께 쓸려내려 뿌리가 대부분 드러난 활엽수다. 잎맥 끝에 방울진 물방울이 또다시 내 얼굴 위로 떨어진다. 고개를 돌려 이마에 떨어지도록 한다. 얼굴에 흙먼지가 가득한가. 피부에 스민 물이 질척하다.


“저 좀 꺼내주실래요?”

“···또 몸까지 날려먹은 모양이지?”

“네, 뭐. 항상 그렇죠.”


애석하게도, 몸을 당장 굴릴 수는 없었다. 재구성된 몸의 감각은 그때마다 새롭게 익혀두어야했다. 믿어 의심치 않아 고정된 기억이라도 모든 요소가 매번 똑같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이럴 때마다 겨울비가 하는 말이 있었지.


“둘 중 하나라도 완벽해지라니까. 몸을 통제하는 거나, 기억을 고정하는 거나. 스스로 믿는 육체의 한계가 높아지는 게 제일 좋긴 하겠다만··· 하긴, 그런 건 체류지에서 오래 썩은 사람이나 되는 거겠지.”


한 마디가 늘어났군. 내가 어떤 사고라도 쳤나?


달라진 것이 있나하여 눈을 굴리고 있자니 겨울비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발길질로 바위를 걷어찬다. 별다른 장비도 없이 거대한 바위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실로 무식한 몸이다. 이 사람이 믿는 자신은 곰의 자손이라도 되는 걸까? 신기한 생물을 보는 눈빛을 숨기지 않자, 겨울비는 내게 담백한 사실을 말했다.


“눈꽃, 너도 쥐어짜낼 때는 사람같아 보이지 않아.”


장난을 진실로 받아치다니. 어르신들은 달갑지 않은 농에 인색했다. 특히, 시든 벚꽃이 주는 괴리감은 어쩐지 섬뜩할 때가 많지. 젊음과 늙음이 혼재된 사람들이 주는 감흥은 그렇듯 어려웠다. 소녀의 외견이 아주 오래된 가치관을 말할 때면··· 으음, 그 느낌을 어찌 설명할까. 먹을 잃어버린 필사는 감히 지어내지 못할 문장이었다.


괘씸한 생각이 들켰을까? 조각난 바윗덩이가 머리쪽으로 튄다. 뇌가 흔들리는 감각, 시야는 잠시 암전되었다 돌아온다. 맞은 부분이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근육을 조여 혈류를 끊고, 새살이 돋는 장면을 떠올린다. 잠깐 사이에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던 그도 내게 농을 던진다.


“네가 사람이냐?”

“적당히요.”


낙오자다운 대답에 그가 웃는다. 겨울비는 조각난 바윗덩이를 옆으로 치워주었다. 상반신이 노출되자, 그는 나를 힘껏 잡아당겨 꺼내주었다. 바지가 걸레짝이 되어가는 느낌이 사뭇 선명하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지반이 내려앉아 거대한 구멍이 형성된 모습이 보였다.


내가 어떤 사고를 쳤을까. 바위와 흙이 내려앉으며 쓸려내려온 수목들을 훑어본다. 가장 안쪽의 어둑하니 깊은 곳, 유난히 튀어나온 부분이 눈에 띈다.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 파묻힌 듯,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허물이 남아있을 리는 없었다. 파괴된 지형 덕에 현상의 출구가 밖으로 드러났다 보는 게 옳다.


“봤으면 가서 치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몸을 가볍게 푼다. 각 부위의 신체에 자극을 주고, 근섬유의 형태와 상태를 점검한다. 이전의 몸보다 조금 튼튼해졌을까? 미약한 차이라도 그러기를 바란다. 가파른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발목과 무릎에 적당한 긴장을 주고, 충격은 최대한 허벅지와 종아리에서 감쇄시킨다. 그런 와중에, 균형을 잡으려 할 때마다 종아리의 근육이 요동친다.


바닥으로 내려온다. 아래쪽은 아직 화약의 잔향이 남아있다. 부슬거리는 비가 매캐함을 덮었으나, 쇳내는 미처 가시지 않았다. 혀끝에서 비린 맛이 난다. 부속을 쓰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음을 경험이었다. 번거로움이 즐겁다면 굳이 자중할 필요는 없나. 겨울비는 그저 귀찮은 모양이다만. 버릇처럼 입술을 살짝 깨문다. 텁텁한 흙맛, 손에 빗물을 모아 얼굴을 닦아낸다.


쉼없이 꿈틀거리는 흙더미 앞에 선다. 그러고보니 현상의 입구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상징후가 나타난 구역에서 허물을 찾아 제거하고, 동시에 껍데기와의 접촉을 막는다. 새로운 낙오자를 맞이하는 일은 그보다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 허물은 현상의 진행도와 맞추어 생성되기에, 신입의 마중은 자연히 이어지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체류지에서 보는 현상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오랜만의 호기심이 즐거워, 흙더미를 신나게 양손으로 파낸다. 젖은 흙은 덩어리져 떨어져나갔고, 얼마가지 않아 단단하고 거친 표면이 만져졌다. 무기없이 바위를 부수는 건 못할 짓이다. 나는 오래 묵은 낙오자가 아니니까. 깔끔하게 포기한 뒤 살짝 옆을 파내려간다. 이윽고, 똑같은 돌덩이를 만난다.


참으로 크고 둔한 녀석이 반가워 방긋 웃는다.


“그래, 부수면 되잖니.”


나는 항상 쉽게 가는 법이 없는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봉이 없어도 방법은 있다. 부속 몇 개 정도는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니까. 어디보자, 어떤 걸 넣어놨더라? 코트 안주머니에서 부속을 꺼내 용도를 확인한다. 화력이 높을수록 검은색에 가깝고, 기호는 효과를 알려준다. 색상은 옅은 회색에 기호는 접촉면에 대한 파쇄 효과다. 한데, 짧은 문구가 추가로 적혀있다.


‘방어도가 높은 껍데기를 위한 부속, 여러 번 재사용이 가능하다.’


한껏 휘날려 적은 필체, 도깨비가 만든 물건들의 특징이다.


“아저씨, 요즘은 껍데기가 도통 보이질 않네요.”


아쉽기에 되려 다행스러운 일이나, 부속의 안전장치를 제거하며 장인에게 용서를 구했다. 신입을 맞이하는 일에 쓰이는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는 마시기를. 첨단이 뾰족한 부속을 역수로 잡은 채 바위에 강하게 찔러넣는다. 손아귀에 강한 반동이 느껴지고, 바위의 표면에는 거대한 금이 생겨난다.


좋아, 반복하자. 그리 되뇌며, 자세를 다잡는 내 눈에 이상한 현상이 비친다. 바위에 일어난 균열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몸을 뒤로 물린다. 어딘가 고여있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듯했던 물살은 급속도로 거칠어져, 주변 바닥을 흠뻑 젖게 할 정도로 쏟아진다. 현상이 끝나 공간이 겹치고 있다. 또한, 수압은 끝을 모르고 강해지고 있다. 현상과 체류지가 동화되는 과정은 이질감을 느낄 새 없이 신속하게 이뤄진다.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뒤 몇 초나 지났지?


굳이 따질 필요 없다. 생각은 이미 한참 느렸으니까. 다급히 결론을 내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겨울비가 나를 보며 껄껄 웃는 모습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고,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금간 바위가 완전히 부숴져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등을 때리는 돌조각을 느끼며 몸을 더욱 일깨운다. 한계까지 수축한 근육에 혈관이 파열하고, 강한 힘을 전달 받은 관절은 삐꺽인다.


그리도 절박했으나, 겨울비의 웃음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그래, 이미 늦었구나. 숨을 한껏 들이킨다.


거친 물결이 몸을 한달음에 집어삼켰다. 힘이 과하게 들어가있던 팔다리는 우스꽝스럽게 휘적이고, 여러 차례 반전되는 시야로는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다. 먹먹한 귀는 쓸데없는 흐름까지 잡아내 머리를 울릴 뿐이다. 상황을 따라갈 수 없다. 호흡이 흔들려 입술 사이로 기포가 새어나간다.


헤엄쳐 벗어나기는 요원하다. 그냥 놓아버릴까? 아니, 숨 따위는 쉬지 않아도 문제없다. 벚꽃의 기척이 유난히 흐린 이유가 그곳에 있었지 않나. 내가 겨울비를 따라나선 이유를 상기하자.


그들을 닮고 싶지 않았던가. 푸른 꽃잎의 여유와 겨울비의 연륜을, 더 나아가 단풍의 초연함과 벚꽃의 허허로움까지. 닿지 못할 이상은 그만큼 더욱 아름답게 빛났기에, 나는 이전의 생과 다른 선택들을 하고 싶었다.


내가 하지 않을 법한 일을 하자.


남은 숨을 내뱉는다. 공기방울이 눈 앞을 스쳐 상승한다. 그렇게 하늘과 땅을 가늠했다. 다만, 내가 가야할 곳은 바닥이다. 손과 발로 급류를 거스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온 몸의 근육을 부풀려 가라앉은 뒤, 바닥에 부속을 박아 중심을 잡는다. 부속이 사용되어 바닥이 갈라진다. 남은 손을 틈새에 끼워넣고, 천천히 자세를 잡는다. 몸을 한껏 웅크려 뛰어오를 채비를 마친다.


다리를 본다. 허벅지에 수놓아지는 근육의 갈래를 보고, 그를 더욱 크고 단단하게 만든다. 차가운 물 속에서도 달아오르는 피부가 느껴진다. 저항을 줄여 빠져나가자. 압착되어 비틀어지는 근육, 그와 동조해 찢어지는 피부 탓에 물 속에 피가 섞이고 있다.


피를 보자 허리가 빳빳하게 서고, 등근육이 파도치듯 일어난다. 그렇게 두 다리를 곧게 편다. 잡고 있던 땅가죽이 벗겨지고, 힘을 못 이긴 검지와 소지의 손톱이 빠져나갔다.


포말이 가득한 수면을 뚫고 솟구친다. 공기를 느끼니 자연히 호흡을 몰아쉰다. 희석되어 옅어진 피냄새, 뒤늦게 두 다리를 찢어낸 고통이 몰아쳤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겨울비가 있는 방향을 본다. 재미난 일을 보는 듯한 가벼운 표정, 그에 이 순간이 조금 즐거워졌다.


부속을 쥔 손을 두 발 아래에 둔다. 또다시 피부가 갈라져, 선홍색 혈액이 뿜어진다. 혈향이 더욱 짙어져 물냄새가 완전히 사라졌다. 저 아래에 있는 선배의 태도가 그렇듯, 스스로도 가벼이 여겨야 하는 일이다. 그대로 몸을 쏜다. 그에 겨울비는 박수를 치고, 부속을 쥔 팔은 뜯겨나가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그림이 완성되었다.


부슬거리는 단비가 내려 무지개가 떠오른 하늘, 그 위로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졌다.


바닥을 쓸며 내려앉는다. 팔 하나가 없어 균형이 무너진 탓이었다. 밀려오는 통증을 하나씩 가라앉힌다. 빠진 손톱은 서서히 자라났고, 우악스럽게 뜯겨나간 팔은 스스로 조여들어 지혈된다. 찢어진 다리는 실타래를 엮듯, 가닥이 서로 뒤섞여 피부를 재건한다.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아 행동의 대가를 치른다. 회복할 게 더는 남아있지 않았으나, 의도한 상흔은 환상통으로 이어졌다.


뜯긴 단면을 붙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생각보다 여운이 길다. 너무 즉흥적인 결단이었을까. 경험에 갈증을 느껴 진창을 굴렀구나. 바보 같은 짓이다. 모든 과정을 되짚으니, 되려 낙오자같지 않은 일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성공했다는 만족과 괜한 일을 했다는 자책이 공존했다.


“눈꽃, 네가 한 일이 어떤 건 줄 아나?”


겨울비의 질문이 들려와,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엔 뜯겨나간 신체가 들려있었다. 내 의식이 닿지 않아 핏기가 빠져있었기에, 창백한 팔을 서둘러 단면에 가져다댄다. 뼈를 제 위치에 맞추며 평소의 몸 상태를 떠올린다. 서로 붙잡는 세포들을, 이어지는 감각들을 엮어 원래대로 구성한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만한 짓이었죠.”

“의도를 묻는 게 아니야. 네가 완성한 감각을 묻는 거지.”


붙인 팔을 천천히 움직여 보며 일어선다. 완성한 감각이라. 몸을 사용하는 영역을 확장했을 뿐이다. 단지 찰나의 순간에 최대한 노력했을 뿐, 그 이상으로 특별한 게 있었나?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딱히 다른 점은 없었다. 사람이라면 시도하지 않을 범위까지 나아갔을 뿐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았죠.”

“그래, 목적을 위해 형을 벗어났지. 그건 껍데기의 방식이다.”


···껍데기의 방식. 그의 냉정한 말에, 나는 염원하던 내게서 또 한 발자국 멀어진다.


“낙오의 의미를 찾는 게 그리도 어렵나, 눈꽃.”


그리 말을 끝맺는 겨울비의 눈길은 아버지를 닮아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낙오자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허물 (4) 22.07.07 18 0 13쪽
10 허물 (3) 22.06.26 14 0 11쪽
9 허물 (2) 22.06.13 14 0 13쪽
8 허물 (1) 22.06.12 18 2 15쪽
7 맴도는 것들 (7) 22.06.11 19 2 14쪽
6 맴도는 것들 (6) 22.05.31 29 2 16쪽
5 맴도는 것들 (5) 22.05.27 31 4 13쪽
4 맴도는 것들 (4) 22.05.26 32 7 12쪽
3 맴도는 것들 (3) +1 22.05.25 42 9 10쪽
2 맴도는 것들 (2) 22.05.25 50 11 17쪽
1 맴도는 것들 (1) 22.05.25 95 14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