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느린 결말

낙오자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05.25 06:23
최근연재일 :
2022.07.07 04:08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363
추천수 :
51
글자수 :
66,820

작성
22.06.26 23:26
조회
14
추천
0
글자
11쪽

허물 (3)

DUMMY

현상은 적합자가 낙오자로 전환되는 과정을 총칭한다. 그렇다면, 현상은 얼마나 오래된 규칙일까. 체류지의 역사에는 수많은 기록들이 쌓였으나, 우리는 그로부터 기준을 알아내지 못했다. 누군가의 삶 전체를 수치로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으니까. 혹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세계의 의도를 해석하기란 요원한 일이기도 했다. 갇힌 눈은 바깥을 보지 못하니, 체류지의 학문이 세상을 번역하기를 포기한 이유였다.


이후로, 우리는 처음처럼 직관에 의존했다.


허락된 계층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려라. 다만, 체류지는 그 너머와 가장 가까우리라. 현상과 전이의 연관성이나, 과정 중 간혹 시공간이 분리되는 상황들이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기에 가끔, 우리는 체류지를 다르게 부르고는 했다.


‘세상의 끝.’


이렇듯, 허물을 마주한 나는 벚꽃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현상이 숨을 내쉴 때, 허물은 빛을 발했다. 얇은 피막 너머로 실루엣이 보인다. 얇고 긴 팔다리, 길쭉한 머리와 짧은 몸통, 끝으로 다가오는 자가 상상하던 분노는 그러했다. 사람과 먼 형상을 확인하며, 나는 품 안에서 금속 막대기를 꺼냈다. 엄지와 소지를 벌려 양 끝의 걸쇠를 푼다. 펼쳐진 봉의 길이는 168cm, 이는 푸른 꽃잎의 신장과 동일했다.


“처음은 같이하지.”

“제가 상반신을 보죠.”


우리는 양옆으로 갈라졌다. 겨울비의 소태도가 검집을 긁었고, 나는 봉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며 눈을 감는다. 옅은 명암만 남아있던 시야가 암전되고, 내가 만든 진동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어두운 공간을 울리는 파동, 박자는 점차 빨라진다. 그렇게 적절한 강도가 되었을 때에, 나는 그를 내 심박으로 삼았다.


눈을 부릅뜬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혈류가 거칠다. 시선은 목표 주변을 흐릿하게 처리했으며, 봉을 휘감은 손은 단단했다. 봉 끝이 긴 곡선을 그린다.


가죽을 두드리는 먹먹함과 곧바로 이어지는 살을 찢어발기는 감각. 피막은 가볍게 찢어냈고, 웅크려 있던 놈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붉은 눈자위가 아직 뿌옇게 물들어있다. 엄지와 검지를 살짝 당겨 봉을 거둔다. 손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는 봉을 놈과 직각이 되도록 고쳐잡는다. 내 심장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고, 시야는 붉게 물들었다.


예열이 너무 과했을까? 괜찮다. 아무렴, 화끈하기는 할 테니.


“가겠습니다.”


굉음이 터진다. 벽면을 타고 전해지는 울림은 서로 맞닿아 더욱 크게 변모한다. 공격은 겨울비에게 신호가 되었으며, 허물들에게는 기다림이 끝났음을 알렸다.


머리를 울리는 이명과 들끓는 피에 적응하며, 잠시 어긋난 초점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피막 속의 허물은 가루가 되어 휘날리고 있다. 감정은 형상을 빚어도 이렇듯 공허하다. 붉은 명암으로 이루어진 동굴, 깊은 곳에 매달린 허물이 피막을 찢는 모습이 보인다. 놈들이 나와 같은 바닥을 밟는다.


신장은 대략 230cm, 하체의 비율은 70% 남짓, 팔의 길이는 다리와 동일. 봉 끝으로 전달되었던 느낌은 경도는 높고 탄력은 없었다. 효율적인 공격법은 점 타격, 무기는 할 수 있는 한 길게 잡는다. 분노에서 비롯한 허물은 피아를 구분하는 능력이 적으니 난전은 피해야한다.


서로의 거리가 멀어진다면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었으니, 왼쪽 시선만을 돌려 겨울비를 바라본다. 오른쪽 눈은 내게 다가오는 허물을 본다. 더욱 많아진 정보량에 지긋한 두통이 밀려온다.


공격 간격이 짧은 겨울비가 먼저 직선으로 나아간다. 자세를 낮춰 파고들며 소태도로 발목을 잘라낸다. 몸과 떨어진 부위는 가루로 흩날렸으며, 균형을 잃은 녀석은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이어서 땅을 딛은 손목에 반동을 주며 남은 손을 한껏 위로 치켜든다.


그동안, 내 쪽의 허물도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나는 벽에 가까이 붙은 상태로 거리를 좁혔다. 왼손으로 각도를 잡고, 오른손은 끝을 받친다. 몸통에 내질러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왼발을 내딛으며 힘을 전달할 때였다.


겨울비가 검을 쥔 쪽의 하박에서 얇은 침을 꺼내는 게 보였다. 곧이어 한 줄기 빛살이 허물의 턱을 관통해 후두부로 빠져나가니, 곧바로 놈이 허물어진다. 바닥면을 따라 움직이다 다시금 솟구치는 참격은 한 호흡 뒤에야 따라왔다.


‘머리.’


왼손을 급히 안쪽으로 당겨 타격점을 놈의 발등으로 향한다. 맞지 않아도 좋았다. 내게 반동을 주면 된다. 봉은 놈의 엄지발가락을 뭉개며 내 몸을 허공으로 띄워냈다. 놈은 갑자기 제 가슴으로 들어온 내게 손을 맞부딪혀 공격하려든다.


봉을 잡은 손을 축으로 몸을 돌린다. 한껏 비틀어지는 손목과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 속에서 놈의 머리를 찾는다. 그 모든 과정 속을 지나며, 손목을 고정하여 회전력을 허리로 전달한다. 근육을 쥐어짜내며 힘을 이동시키는 곳은 다리, 발뒤꿈치는 어느새 놈의 정수리에 당도했다. 조준점 변경은 끝났다. 순간적으로 힘을 실어 발목을 단단히 고정한다.


곧, 두꺼운 석고를 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뇌리를 관통하는 통증이 밀려든다. 피부와 뼈로 느낀 분노는 화끈하고도 알싸하다. 허물의 머리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비산했다.


“머리군.”


겨울비의 전언은 그 뒤에야 들려왔다. 그토록 찰나였고, 순간적인 집중은 모든 변화를 쪼개어 체감했기에 약간의 탈력감을 남겼다. 달궈진 피부 위로, 서늘하고 습한 바람이 스치고 있다. 허물의 첫 만남은 항상 이러했다. 늘 새롭기에 어려웠고, 그건 체류지에서의 가장 큰 자극 중 하나였다.

“무운을 빌지.”

“겨울비도요.”


이번 허물의 파악이 끝났기에, 겨울비는 동굴을 되돌아나갔다. 그는 껍데기의 접근을 확인해야했다. 근래에 슬슬 개체 수가 고갈되었는지, 나로서는 몇 번 마주하지 못한 편린이기도 했다. 납혼당을 거치지 못하고 나아간 낙오자의 이물, 우리는 그것을 껍데기라 불렀다. 내가 먼 발치에서 느낀 바로는 허물의 연장선에 가까운 존재였다.


등을 보이는 겨울비의 그림자 위에 선다. 남은 허물들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나는 출구를 막아설 필요가 있었다. 몇 마리나 될까. 분노의 울음 소리는 깊은 곳에서도 전해졌기에, 꽤 오랜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상념을 끌어와, 과열된 몸과 머리를 가라앉히는 동시에 봉을 조금 가볍게 잡는다. 약점이 정면에 노출되어 있으니, 과한 힘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적당한 열감을 유지하고, 귓속에서 울리는 맥박을 전우로 삼는다. 시야는 아직 붉었다. 하지만 문제없다. 낙오자의 육신은 의식으로 유지되니까. 그러니, 단지 내가 흥분했을 뿐이다. 사선이 선사할 감흥이 그리 기대되었을까? 어쩌면 단순한 놀이로 치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봉 끝을 놈들에게 겨누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웠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진다. 뜀박질의 마지막 순간, 발가락에 힘을 주어 쏘아진다. 봉은 최대한 곧게 뻗어 다음 동작이 유연하도록 대비한다. 한 놈, 두 놈. 작살을 쏘듯 찔러 머리를 터트린다. 힘의 정도를 정확하게 맞추니, 피로 물든 시계도 점차 무채색으로 물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점차 거슬러 오른다. 성난 허물들이 몰려오고 있다. 각 허물은 하나의 분노를 말했으니, 나는 그들이 평범한 군중임을 알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있으나 울음에는 의미가 없었기에, 나는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 예상이 갔다.


허물들의 간격이 점점 좁아진다. 일렬로 통로를 걷는 그들은 검붉은 맥박과 함께 위아래로 출렁였다. 그래, 분노의 대상은 뛰는 법이 없다. 마주한 사람만 발을 구를 뿐이다. 그러니, 내가 그보다 앞서 걸음을 엮는다. 사뿐히 뛰어올라 딛을 곳에 족적을 찍고, 또 한번 쏘아져 같은 선상의 머리들을 부순다. 이곳부터는 햇빛이 들지 않아, 내가 들이키는 빛은 온통 붉었다.


마치, 새빨간 파도가 밀려오는 듯했다. 그에 몸을 끊임없이 움직인다. 역설적으로, 의식이 점차 가라앉는 걸 느낀다.


얼마나 머리를 부쉈지? 통로는 점점 넓어져, 언제부턴가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때로는 찰나의 선을 찾아내 몇 걸음 나아갔으나, 밀려오는 군중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집단에 숨은 개인은 흐름에 휩쓸려 자아를 잃는다.


강한 한 방이 필요하다. 봉을 한 손으로 잡는다. 손의 위치는 보다 중심에 가까워졌다. 찌르는 공격으로는 힘을 전달하기 어려웠기에, 나는 좀 더 접근하여 봉을 휘둘렀다. 남은 손은 연신 품을 뒤적인다. 이내 금속 막대가 만져진다. 봉의 마지막 단보다 한 단계 작은 크기, 부속이다.


뒤로 훌쩍 물러나며 중간 단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비튼다. 그렇게 열린 끝단에 부속을 넣는다. 어떤 부속을 챙겨왔더라. 아니, 그건 중요치 않다. 화력을 위한 무기라는 건 매한가지다. 봉을 다시 두 손으로 잡는다. 걸음은 붉은 파도에 맞추어 물러난다. 그렇게 직선 통로에 놈들이 가득해지고, 한 차례 휘어지는 길을 만날 즈음이었다.


그래, 바라던 때가 되었다.


시야가 검붉게 물든다. 예열된 몸은 더욱 큰 격류를 감당했기에, 내 고동은 끊김없이 이어져 거대한 이명을 만들었다. 파도를 삼키는 파동이 내 안에 생겨났다. 마음이 행동을 앞서나가, 봉을 피부가 찢어지도록 거칠게 붙잡는다. 급격한 변화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나를 일깨울 고통이 필요했기에, 몸을 뒤로 내던졌다. 벽에 맞닿는 충격과 함께, 등판에 박힌 돌이 느껴진다.


몸을 관통하는 통증에 온 몸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만들어낸 수많은 감각으로 한 발자국을 딛는다. 땅을 흉폭히도 파고드는 걸음이 완성되고, 운동량에 무게가 더해진다. 아까처럼 허리를 비튼다. 모든 동력을 온전히 전달해야한다. 그렇기에, 근육들은 뼈를 긁는 듯한 통각을 전했다. 어깨가 빠지고 인대가 찢어진다. 대신, 대부분의 노력은 심혈을 기울인만큼 온전되어 봉을 통해 빠져나갔다.


반복되는 고통은 의식을 흐렸으나, 또한 수없이 일깨웠다. 그렇기에 끝까지 볼 수 있었다. 회전하는 금속봉이 군중의 첨단에 맞닿는 모습을. 거대한 섬광과 근소한 차이로 따라붙는 진동, 폭발물이 만들어낸 충격파가 밀폐된 공간을 울렸다. 종유석이 빗발치고 석순은 조각나 쏟아진다. 힘을 다한 몸은 벽면에 틀어박혔다. 옷 위를 두드리는 돌조각을 느끼자, 그제야 응어리가 풀린다.


개운하다. 마음이 홀로 동하여 귀찮은 뒷일이 좀 생겼지만 겨울비가 마무리 해주겠지. 그의 투덜거림을 상상하면서 기분 좋게 눈을 감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낙오자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 허물 (4) 22.07.07 18 0 13쪽
» 허물 (3) 22.06.26 15 0 11쪽
9 허물 (2) 22.06.13 14 0 13쪽
8 허물 (1) 22.06.12 18 2 15쪽
7 맴도는 것들 (7) 22.06.11 19 2 14쪽
6 맴도는 것들 (6) 22.05.31 29 2 16쪽
5 맴도는 것들 (5) 22.05.27 31 4 13쪽
4 맴도는 것들 (4) 22.05.26 33 7 12쪽
3 맴도는 것들 (3) +1 22.05.25 42 9 10쪽
2 맴도는 것들 (2) 22.05.25 50 11 17쪽
1 맴도는 것들 (1) 22.05.25 95 14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