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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낙오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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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05.25 06:23
최근연재일 :
2022.07.07 04:08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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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6,820

작성
22.05.2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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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맴도는 것들 (5)

DUMMY

비슷한 말들을 자연히 떠오르게 하는 익숙한 문장이다. 가끔 그리했듯, 일부러 덮어둔 사실을 가감없이 벗겨내어 그 순간을 부담스럽게 만들고는 했지. 어릴 때는 그런 아버지가 못내 미워져 서럽게 운 일이 많았다. 물론 지금은 그런 그가 좋았다. 적어도 의심할 일은 없었으니까. 그는 살며, 내게 일말의 불안도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한 마디이기에 울적함이 가셨다. 먼 하늘의 우레도 차츰 멀어지고, 다시금 타닥이는 소리가 커진다.


"믿고 싶은 거겠죠."

"그래, 너도 확신은 없구나."


아버지는 소리내어 웃었다.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보아하니, 이어지는 대화가 기꺼운 모양이었다. 잦아들지 않은 웃음과 함께, 그는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어 모닥불을 헤집었다. 잿가루와 불씨들이 휘날리고, 그의 말문도 한 걸음 더 트인다.


"보기에 어떻지? 나는 모르겠거든."


문장이 오갈수록 딛을 수 있는 땅이 넓어진다. 그의 불안을 끝낼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순한 편이다. 한결같이 그러했듯, 아버지도 의식의 부산물로 빚어낸 객체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정말 그렇게 결론지어야할까. 현상이 일정한 조건에 따라 형성된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자세를 바꾸는 건 나의 자유였다. 선택을 했기에, 책임이 나를 마주보고 있지 않은가.


기로 앞에 섰을 때, 돌아오지 못할 언젠가가 두려워 도망쳤다면... 나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을 터였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이 순간을 기약했다. 결론을 내린 직후, 경험이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들고 기억은 찰나가 되어 한 공간에 펼쳐진다. 모든 시절의 장면이 한 곳에 있다. 수많은 아들과 그보다 많은 아버지를 찾는다. 되새기는 시절만큼, 쓸모없는 겉치레로 지어낸 문장들이 지워진다.


"알고있던 그대로죠."


막연한 위화감이 미처 가시지 못해 빈자리가 생경하게 느껴질 뿐이니, 지금의 그에게 없었던 기억도 잃었다며 위로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말뜻이 온전하게 전달되어 끝내 냉막하게 느껴지도록, 나는 목소리의 고저를 일부러 흐릿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못내 허무한 듯 표정을 잃었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며 가볍게 미소짓는다. 마치 '아들놈이 그렇지, 뭐.' 그렇게 말하는 듯 보였다. 그는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 그러니 괜찮다. 이 대화에 따르는 책임은 내 감정 뿐이다. 그저 수없이 흘러내려 마르면 될 일이다.


"그래서, 해주고 싶은 말은 있나요?"

"네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고?"


장작은 재가 되었고, 나뭇가지는 불씨로 흩날린다. 검게 그을려 떨어진 나무껍질은 자갈에 부딪혀 조각났으며, 갈대를 헤치고 다가온 바람은 죽어가는 불을 한사코 살려내었다. 우리는 곁에 쌓인 갈대를 모닥불 위에 쌓았다. 짙은 연기구름이 피어오르고, 우리는 점차 흩어지는 온기 안에 기거했다.


"나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의 끝음절을 따라서 불꽃이 흔들리고 있다. 약간의 매캐함, 살며시 닿아오는 화기 역시 그랬다. 멈춘 건 우리 둘 뿐이다. 시작이 그랬듯, 어느 끝조차 자연히 흘러가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노를 저어야했다. 몸 전체를 움직여 물밑바닥을 긁는다.


"그래도 이야기를 듣겠느냐?"


그가 나를 바라본다. 내가 그에게 그랬듯, 전체를 훑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시선이 싫지 않았으나, 마주 볼 용기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또다시 말을 고른다.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얕은 곳을 찾는다. 한 길을 알 수 없는 속내이기에, 걸음을 조심스레 딛어야 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옮겨 말라붙은 개울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 주변을 살피던 그는,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적한 오솔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흙길 위에 찍힌 발자국들은 한 순간도 올곧지 못했다. 같은 자리를 수없이 맴돈 흔적이 여실하다.


"이곳은 네 기억으로 빚어졌지. 그리고 너는 단편적인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되묻고 싶구나. 나를 왜 아버지로 여기겠다는 거냐?"


직설적인 말투와 담담한 태도, 아버지는 생전의 모습과 진배없었다. 그러니 내가 알지 못하는 자신이 일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사유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방향이 전혀 다른, 내 생각이 닫지 못하는 방면이 있을까. 아직도 요동치는 감정을 잠재우고, 잠시 그의 입장에서 사고한다.


자신이 죽은 시점을 완전히 인지했다면, 차후에 의식이 돌아올 때에도 스스로를 믿지 못할까? 아니, 아버지는 그런 걸 신경쓸 위인이 아니다. 인격이나 의지에 대한 불안이 만든 자세가 아니다. 철학에서 벗어난, 보다 실질적인 답이 필요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죠?"

"네가 아는 만큼을 알고, 내가 해야하는 것을 알지."

"그러면, 내가 끝에 도착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억은 언제까지나 불완전하다. 내가 품어왔던 시간으로 엮었으나, 공간이 그보다 넓게 창조된 탓은 그러했다. 젊은 경험은 일천했기에 어설프게 채워놓은 풍경들이 많았고, 어설프고 흐릿한 건축물들은 주인을 앞에 두고도 흘러내렸으니 나는 이 세계의 말로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모두 없던 일이 되겠지. 아니, 너는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아직 이 세계를 믿지 못하시는 거군요?"

"그래. 네 엄마가 누누이 말했듯, 우리 둘은 꽤 닮았으니까."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꺼져가는 모닥불을 즈려밟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아들아, 이 상황을 의심하지는 않는 거냐?"


분명, 나에 대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호의였다. 차라리 평소처럼 거실에 모여 담소를 나눴으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스스로 죽었다는 걸 모르는 상태로, 나를 위해 하루의 일상을 돌려주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끝내 더욱 슬퍼지더라도, 나는 못내 그런 광경을 바라고 있었다.


"나도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단지 눈을 떴을 때, 너를 데려와야한다는 사실만 떠올랐지. 아쉽게도 네 어미는 보이지 않았고, 너와 관계없는 생각을 하면 계속해서 머리가 비워졌다. 마치, 해야할 일만을 하라는 것처럼 굴더군. 그렇게 깨달았다. 이 삶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는 걸 말이야."


마침내 무언가 선언할 듯,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전히 딱 맞는 기장의 옷, 하지만 늘어난 나잇살만큼 여유가 없어진 치수가 보인다. 그 맵시가 어쩐지 우스꽝스러워, 작은 웃음기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새어나온다. 그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툭 튀어나온 배가 정겹다.


"...힘을 좀 빼고 말할까?"

"그러는 편이 좋겠어요."


그는 제 뱃살을 연거푸 쓰다듬었다. 한탄 섞인 혼잣말은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 컸다.


"예전 기억이 배경인데 왜 몸뚱이는 지금 것인지..."


아버지는 다소 가벼운 언행을 보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무게 잡기를 포기한 것인지, 우리가 먼저 지칠 일을 염려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죄송하다고 해야하나요?"

"뭘, 감각 없는 세상을 탓해야지."


대화가 너무 길었을까. 걸음을 재촉하듯, 도심 방향에서 우레 소리가 울려퍼졌다. 땅이 미약하게 진동했고, 바람엔 비릿한 향이 섞여들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일어섰다. 갈대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간헐적으로 번쩍였다.


"여기는 얼마 못갈 것 같구나."

"이제 갈 곳은 아예 다른 공간인가보죠?"

"아마 그럴 거다. 반대편이 아예 보이지 않았거든."


아버지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를 바짝 붙어 따랐고, 옛 우울은 우리들의 보폭만큼 따라왔다. 동산 어귀, 나는 그곳에서 지나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신호를 보았던 숲은 이미 빗물이 들어차고 있었고, 물이 지나간 흔적만 있던 개울에 아주 작은 선이 새겨지고 있었다. 한없이 투명하고 맑은 물이었다.


아버지의 걸음소리도 자연히 멈춰있었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발자국 위에 서있는 중년의 남성, 가장 곧게 남은 족적이 제일 선명하다. 어쩐지 미어지는 광경을 뒤로하고, 나는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물어봐야했다. 수많은 말들을 건너왔지만 몇 가지 의구심은 아직도 남아있던 탓이다.


"그래서, 이번 삶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조금 바뀐다. 무던하나 처연했던 자세와 애증은 남았으나 갈피를 잃은 눈길하며, 옛 향을 부르는 옷가지와 그를 받히지 못하는 현실이 어우러진다. 그런, 모든 망설임과 어중간한 결의 속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이 길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거란다."


잔뜩 뭉개진 첫 음절엔 확신이 없었고, 끝에서야 강해지는 발음에는 나를 향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답변했다.


"나는 아빠를 믿어요."


가슴이 앞서간 믿음에 대한 책임을 먼저 고려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그리 말하였다. 나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길이라 할만한 경로는 하나 뿐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있던 아버지는 뒤늦게 나를 따라왔으나, 기쁨에 휘말려 경박해진 걸음걸이는 숨겨지지 않았다.




두 남자의 걸음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단순히 갈 길이 멀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도록 삭힌 감정을 때맞춰 등장한 상황에 토해낸 뒤였던 탓이다. 뭇 남정네들처럼 침묵과 나직함을 금처럼 여긴 터라,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어색했다. 다만, 해묵음을 벗겨낸만큼의 거리는 줄어들어있었다. 비슷하게 흔들리는 어깨와, 하늘을 보는 신발코의 높이가 그를 알렸다.


'아빠라니.'


나도 참, 감정에 휩쓸려 꽤 오래된 명칭을 썼구나. 명치 어림에서 두근대던 부끄럼을 가라앉힐 즈음에도 산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수백의 걸음이 이미 겹친 통행로처럼 편안하기 그지없다. 이곳 역시 지금껏 만나온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감상을 주고 있었기에, 나는 익숙하고도 간지러운 적막을 깨야만 했다.


"우리, 여기에 온 적이 있던가요?"

"음... 네가 여기 온 적이 있었나?"


아버지는 이곳을 아는 눈치였다. 시선이 한 지점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다. 적지 않은 추억이 쌓인 곳인지, 걷는 속도도 살짝 늦춰진다. 그런데 여기에 네가 온 적이 있었느냐니. 얼마나 옛날 일일까. 다만, 이 길을 나 역시 지난 적이 있을 게 뻔했다.


"아, 갓난아이일 때 왔던 거 같다. 사실 너 임신했을 때 제일 많이 왔었지. 배가 부르고 나서는 못 왔지만 말이야."


최근까지 살던 곳에서 개발되어 희미해진 옛 동네로, 이제 완전히 사라진 지형과 놓친 인연까지, 나는 점점 과거로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작은 이 끝이라 했지. 그래, 내가 세상을 만난 곳에서 아버지는 시작되었다. 나아갈수록 현상의 기준이 나라는 게 더욱 확실해진다. 그럴수록 이곳이 가족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고, 끝없이 확인해 되새긴다.


끝에 다다랐을 때, 다시 올 이별을 통감했어도 행여나 실망하지 않도록.


"슬슬 보인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상념에서 깨어난다. 짙푸른 향기 가운데, 수많은 나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더해 일정하게 이어지던, 신발 밑창과 굳은 땅이 맞부딪히는 감각이 끝났다. 사실, 아직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멀고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그저 덩그러니 자리한 공터가 있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앞서 뛰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굽이치는 산길을 그가 내달린다. 낡은 구두굽이 산의 고요를 깨부수고, 나무들의 합창은 기세를 키워냈다. 뒤편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잎이 휘날리고, 옷자락이 나부꼈다.


잠깐 사이 한참을 앞서있는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 어쩐지 마음이 다급해져 다리는 괜히 삐꺼덕거렸고, 박자를 잃은 뜀박질은 균형을 무너뜨렸기에 시선이 평소보다 낮아졌다. 그 순간, 찰나의 편린으로 남은 기억 속 풍경이 말했다. 한없이 넓게만 보이는 등을 따르라고. 펄럭이는 코트는 그의 풍채를 더욱 커보이게 했기에, 휘몰아치는 숲속 정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그의 걸음을 따르게 되니, 그는 여전히 내 거울이었음을 깨우친다.


공터의 초입에 다다른 아버지의 외침이 아득하게 올려온다.


"엄마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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