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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낙오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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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05.25 06:23
최근연재일 :
2022.07.07 04:08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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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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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글자수 :
66,820

작성
22.05.25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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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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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맴도는 것들 (3)

DUMMY

한동안 이곳저곳을 살피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현상에 특정한 목적이 있다면 그 뿐으로 충분했다. 아무렴 온전히 집중할 것이 필요했으니까. 그렇다면, 세계는 내게 무엇을 바랄까. 첫 걸음을 딛을, 옳다 믿을 방향을 정하자. 걸음을 돌려 다시 호우의 경계선 앞에 선다. 더욱 굵어진 빗줄기, 차오르던 물은 어느덧 발목을 넘겼다.


생각 이전에, 고개가 먼저 저어진다. 그렇기에 남은 미련을 경계 앞에 두었다. 달라진 세상을 유랑한 뒤 돌아와도 괜찮다며, 이제껏 배운 세상이 사라졌으니 급할 것 없다고, 스스로 그리 믿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멀어지자. 큰 길을 따라가, 내 기억으로 만들지 못할 장소까지 다다르자. 그때가 된다면 자그마한 갈피라도 잡히겠지. 기대와 함께 체류하던 불안이 온 몸짓에 스민다. 잔뜩 힘이 들어간 발걸음은 그러했다.


얕은 물이 범람했다. 발자국은 잠시 머무른 뒤 사라진다. 몽환적인 광경이었으나, 화폭 안에 자신이 있기에 진심으로 꿈이라 부를 수 없었다. 막막함이 사무쳐 오늘 중의 가장 긴 호흡을 내쉰다. 지긋한 숨결은 따스했기에 고여있던 불온들이 흩날렸으며, 그렇게 발끝은 다시 하늘을 우러른다. 몸이 기우는 방향으로 옛적에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발등에 그려놓은 항로이기에, 잡념을 흩기에 더없이 이상적이라 여긴 탓이다.


정처없는 걸음 수십이 겹쳐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의사를 그려낸다. 옅게 깔린 수면은 온 하늘을 담고 있었기에 걸음은 양 시발을 가로질렀고, 붕 뜨는 의식 아래에서 역설적으로 점차 가라앉는 마음을 느낀다. 감각이 길게 늘어진다. 만물은 빗속처럼 휘어졌다. 뜬눈으로 맞이한 꿈결이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지긋이 눈을 감는다. 눈꺼풀 아래에 잠든 현실을 일깨운다.


그리고 눈을 뜬다. 한 번의 외면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세계가 나를 반겼다. 안정을 위해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을까. 빗소리는 여전했다. 어렴풋한 그리움이 그렇듯, 무아는 지극히 짧게 돌아왔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음에도 아쉬움이 짙었다. 또 다른 변화가 생긴 건 그런 때였다.


좁은 골목 안쪽에서 자그마한 찰박임이 들려온다. 사람의 걸음보다 수십 배는 가벼운 소리다. 홀린 듯,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한다. 각기 다른 걸음이 서로를 향해 다가왔으니, 둘은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주친다. 옅은 수면을 가운데 둔 채, 우리는 서로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더없이 익숙한, 그럼에도 한없이 귀여운 생물이 있었다.


"오랜만이네."


젖은 아스팔트 너머의 고양이는 검게 물들어있었다. 본래의 무늬는 희미했으나, 아이의 시선은 여전했다. 이제야 가장 익숙한 것을 찾아냈구나. 나는 천천히 자세를 낮춰 쪼그려앉았다. 무작정 옮기던 걸음은 늘 그랬듯, 우연의 간지러움을 빌려 쉬어간다. 녀석은 내 몸 주변을 쉼없이 돌았다. 꼬리가 가볍게 살랑이는 것을 보아하니, 본래의 세계는 여전히 건조한 모양이다.


"바깥은 살만 하니?"


내 질문에 녀석은 바닥에서 뒹굴었다. 적당한 답이다. 그리하면 내가 이곳저곳을 긁어주었었지. 사는 건 이제까지와 같구나. 조금 안심이 되는 일이다. 허물이 벗겨지니, 웅크려 기다리고 있던 감정이 일어선다. 나는 자연스레 손을 들어 녀석을 만지려들었다. 그렇게 이곳에 대한 결론들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감흥이 향한 곳엔 수많은 물결만 남는다. 잔잔한 수면에 담겨있던 녀석이 흐릿해진다. 내 시선은 파장을 따라 출렁였다. 그런 내가 어찌 보였을지, 녀석은 나를 위해 자리를 옮겨주었다. 길쭉한 동공이 나를 바라본다. 언제까지나 본 일이 없던, 깊게 가라앉은 표정이다.


"...그래, 나는 어쩌면 좋을까?"


녀석의 눈빛에 불안을 털어놓는다. 바랄게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 꿈이 찾아오기를 바랄지, 막연히 상상하는 안식을 선망하여 떠날지. 홀로 남겨진 것은 언젠가 함께있을 때를 그리워할 테니, 나는 녀석에게 물어볼 책임이 있었다. 며칠간 목젖 아래에 숨겨두었던 말을 온전히 알아듣기라도 했을까.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미련한 나는 그저, 남겨질 인연의 뒤를 따라 걸을 뿐이었다.


녀석은 무언가 아는 듯 움직였다. 내가 만드는 물결이 형체를 흐릿하게 만들었기에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간다. 그런 걸음이 너무 느렸을까. 녀석은 이따금씩 돌아보며 재촉하기도 했다. 골목을 벗어나 차량 하나 없는 도로를 가로질렀다. 풀벌레 소리나, 어딘가의 웅성임이 없는 세계다. 고요 속에서 귓가를 맴도는 건 우리 둘 뿐이다.


그제야 이 세상이 익숙했다. 오랜 친구는 단지 있음으로 날을 무디게 했으니 시선은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졌고, 녀석이 정한 방향도 한 눈에 드러났다. 경로의 차이가 있을 뿐,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구나. 마음에 드는 일이다. 나는 그와 점차 가까이 걸었다. 내 세상이 이리 되기 전에는 바깥에 나서기를 참으로 힘들어하던 아이였다.


특히, 검게 칠해진 아스팔트 위에 서있는 걸 싫어했지. 그럼에도, 녀석은 도로의 흰 부분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항상 어리광을 부렸던 아이가 며칠 밤 사이에 예의를 배워왔다. 어느 영원을 앞둔 인연은 그랬다.


진원으로부터 멀어져, 건물과 자연이 점점 뭉개지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미처 살피지 못했던, 오래도록 살아온 지역의 빈 자리다. 온 것이 선명하리 뿌옇다. 까마득히 어린 날, 의욕만 앞서 두껍게 채색했던 풍경을 닮아있었다. 지나치는 와중에 담벼락을 구태여 쓸어보았다. 감촉은 일반적인 시멘트와 다름이 없었으나, 표면이 지나치게 매끄럽다. 이 세상은 익숙한 사이에도 여전히 기이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본래의 질감을 잃어가던 사물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지붕은 흘러내려 기둥과 벽면을 타고 흘렀고, 담벼락은 마당을 가리지 못했으며, 출입문은 스스로를 땅에 뉘였다. 이윽고 최소한의 형태를 유지하려던 건물이 기운다. 일부는 내 앞까지 쓸려내려왔다. 한껏 녹아내리면서도, 표면은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한계에 발끝을 걸쳤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꿈의 중심부는 여전히 굳건했다. 나를 깨웠던 상징도 쉼없이 쏟아지고 있다. 그래, 기틀이 된 우울은 아직 건재했다.


이곳이 중심부와 다른 점은 꽤나 명료했다. 단지, 내가 주변을 자세히 알지 못한 탓이다. 어설프게 엮어내었던 구역이 무너지고 있다. 작은 세계가 제 주인을 닮았으니 영원할 수 없었을 뿐이다. 고개를 돌려 친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남아있는 여유는 없다는 듯,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파문들이 보였다. 녀석의 걸음은 매우 가벼웠기에 파장은 짧았고, 내 보폭은 그만큼 넓어질 수 밖에 없었다.


힘차게 발을 구른다. 걸음에 담긴 기세만큼, 고여있던 물들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온통 젖은 옷들은 매 뜀박질마다 물방울을 떨어트렸으며, 물 먹은 신발은 불어난 발만큼을 다시 토해낸다. 먼 발치에서 본다면 분명 경박한 몸짓으로 보이리라. 저 멀리 앞서가는 친구의 웃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건물들이 낮아진다. 그럼으로서 하늘은 더욱 광활해지고, 발붙일 검은 땅은 좁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점차 속도를 높였다. 잔해를 뛰어넘으며, 무너지는 세계를 앞지르며, 삶이 약속한 끝으로 다가간다. 다만 이때까지의 생이 준 가르침과는 다르게 시작이 될 끝이리라. 나는 그리 믿었고, 때문에 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조금은 마지막이 가까워졌을까. 우리는 도로의 끝에서 멈춰섰다. 그제야 거칠어진 호흡을 고른다.


그곳부터는 전혀 다른 풍경의 시작이었다. 문명이 끝나 초록이 만연했다. 물에 젖은 잎사귀는 차분하며 젖은 토양은 온화하다. 자연스럽게도, 풀과 흙이 만들어내는 향 역시 첫 감상과 닮아있었다. 또한, 통상적인 감각을 넘어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순간, 확신이 든다. 넘어가게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면... 이제 헤어져야하는 거지?"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흙길이 시작되는 경계 앞에 엉덩이를 내릴 뿐이었다. 흰 바탕에 누런 얼룩의 친구는 더이상 검게 물들 수 없다. 털을 정돈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주제를 모르고 추측하건대, 그는 이미 준비가 되어있었다.


흙을 밟는다. 부드럽고 기름진 표면은 어쩐지 생경하게만 다가온다. 밑창이 지표를 긁으면, 흙내음은 더욱 진하게 풍겨온다. 달리 수사할 방법이 없다. 그저 어색했다. 첫 걸음은 내가 믿어왔던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했기에, 나는 방금 전까지 서있던 위치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닥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가 하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훑어보기도 했다.


"아직 있어."


그런 모습이 안쓰럽고 처연하게 느껴져 말을 건넨다. 그러자 친구의 귀가 쫑긋선다. 내가 있을 위치를 가늠하던 녀석은 작게 울었다. 낮은 떨림, 굳게 닫아둔 방문을 긁으며 내던 소리다. 준비가 되었다 해서 처음이 무뎌질 리가 없다. 내가 며칠전 깨우친 일을 뒤따라 배우고 있구나.


"갈게."


이 정도면 되었다. 삶이 약속한 결말이 어떠한 죽음이듯, 만남 끝에 닿는 곳 또한 어느 이별일 테니. 구태여 쌓아올려 더욱 미어질 필요는 없었다. 우리들의 어미가 모든 자식에게 말했듯, 모두가 언제나 미숙할 생일까. 태어나 끝내 스러질 때까지, 서로 끊어져있던 울음은 그제야 손을 맞잡는다. 삶의 저변에 자리한, 아득하리 옅은 우울들과 얽힌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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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맴도는 것들 (4) 22.05.26 32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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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맴도는 것들 (2) 22.05.25 50 1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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