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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낙오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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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05.25 06:23
최근연재일 :
2022.07.07 04:08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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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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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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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맴도는 것들 (2)

DUMMY

아득한 침전 끝, 드넓게 퍼지는 울림이 느껴졌다. 둥글어진 생각에 주름이 잡힌다. 그렇게 꿈의 첫 머리를 만난다.


의식이 허공을 부유한다. 몸은 어디에 있나. 첫 단추를 의문으로 꿰어내니, 온 사방에 흩어진 꿈결이 침잠했다. 죽은 감각들이 머무르던 공간에 파문이 인다. 이슬비가 내리듯, 미약하기 짝이 없는 진동이 퍼져나간다. 홀연히 나타난 변화는 육체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로써 발견한 몸은 지난했다. 시선과 의식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자 모든 선들이 한 점으로 빨려들었다.


늘 그렇듯, 시작은 끝을 기약했다.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진득한 눈곱이 조각난다. 어둑한 방은 푸르게 물들어있었다. 젖은 몸은 하룻밤만으로는 되살리지 못했다. 우렁찬 빗소리는 창을 따라 흐르건만, 내 오물이 가득한 곳에는 물줄기가 흐를 공간이 없던 모양이다. 옹졸하기 짝이 없는 마음이다.


어느 원망 도중에 잠이 들었던가. 뱉은 뒤에 도로 담아낸 말이 없어 가늠할 수 없었다. 쉼없이 번져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밀려드는 허망함에 몸을 감싸안았다. 가족이 아닌 목적을 찾으려는 갖은 노력들은 맞닿은 치열 틈에서 끝나버렸다. 피부에 덧댈 마음이 없다. 한기는 속절없이 스며든다. 비좁은 침대 위를 뒤척여 그나마 따스한 곳을 찾아내려 애를 써보았으나, 부질없는 발버둥임을 알며 제 품이 한없이 비루함에 사무친다.


눈물이 목 안으로 흐른다. 그래서 텁텁한 향이 났다.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린다. 바닷속에 먼지가 자욱했다. 얼마나 많은 재가 휘날렸을까. 검붉은 잔해 속의 온기도 결국 덧없게 느껴질 때가 되었다. 그러니, 미어진 마음도 한 때 스쳐갈 우스움으로 기억할 거라 믿을 수 있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들면 된다. 마지막 남은 믿음은 이렇듯 초라하다.


두꺼운 솜 사이로 침전하는 마음은 고요하고, 비관에 젖은 몸은 이리저리 비틀린다. 빗소리는 균일하여 고동을 안정시키나, 텅 빈 감정은 평온에서도 서로 맞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다. 선명한 굴곡은 곧 틈을 만드니. 뒷전으로 밀어두었던 욕구가 솟구쳤다. 곪은 배가 계속해서 아렸다. 다만, 있는 그대로는 그저 투박한 바람에 불과하다. 겉을 깎아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 나도 이런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침묵 위로 첫 문장이 떨어졌다.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 그에 담긴 의미를 쥐어짜 침상을 벗어난다. 느릿하고 둔탁한 걸음으로 나온 거실, 푸른 적막은 한층 웅장해진다. 굳게 닿은 창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에 잔류하던 열기가 가라앉는다. 천천히 창가로 다가선다. 쉼없이 번지는 세상은 한없이 새파랗게 질려있어,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조금이나마 생기있게 만들어주었다. 저 먼 하늘엔 인상을 한껏 찌푸린 구름들이 가득했다.


슬픔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피부에 눌러붙은 음울이나, 나를 위로하려는 자연물이나. 자리를 옮겨도 상황은 같았다. 빗물은 빈틈없이 쏟아졌으며, 물줄기는 피부 위로 굴곡지며 흘러내렸다. 눈물과 뒤섞여 오물이 된 물은 하수구로 빨려든다. 번진 시야 속에서 얕게 차오른 물이 소용돌이쳤다. 절박히 도망칠수록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물기를 닦아낸다. 그렇게 밤 사이 쌓인 기류를 덜어내니, 그제야 몸이 가벼워진다. 하지만 시간이 사라질 일은 없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그를 증명했다.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랐고, 안색은 푸르고 검다. 기대가 죽어가는 모양새다. 그에 기대와 구토감을 느낀다.


편하기 짝이 없는 상하의를 입고, 선반 위에 올려둔 모자를 깊게 눌러쓴다. 아직 젖어있는 머리칼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허기를 채울 생각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추레한 행색은 빗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과 함께 어둑한 안식처를 나선다.


하나 뿐인 우산은 챙기고 싶지 않았다.


문이 닫힌다. 이곳의 벽은 두터웠기에, 적막은 더욱 먹먹해진다. 하여, 계단을 딛는 걸음들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다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탓일까. 심상을 닮아 많은 것이 가라앉은 탓일까. 층계를 내려갈수록 함께 가라앉는 의식과 대비되어, 빗소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그렇게 쓸모없이 넓은 로비에 발자국을 찍는다.


빛이 꺾인다. 수 차례 반사된 조명은 그림자를 지웠기에, 이곳은 따스한 색감만 가득했다. 바깥은 반대로 온통 푸르렀다. 물안개가 자욱하고, 희미한 선만 남아 모든 길을 선망한다. 여태껏 살아온 거리였으나, 나아갈 방향조차 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기이한 일이다. 청명(淸明)이 막 지난 시기인데, 마치 장마가 온 것처럼 폭우가 내리고 있다.


저 멀리 떨어진, 여전히 저항을 반복하는 네온의 명멸도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빗발은 여전히 거세지는 중이다. 하지만 괜찮다. 현상은 의지가 없다. 그러니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이 며칠간 사무치도록 배웠던 사실인만큼, 믿지 않을 수 없는 관념이었다.


뜻모를 몽환에 다가간다. 없는 사실을 구태여 알지 못한다 치부한다. 그렇게 문이 열린다. 미약한 비린내가 짙어지고, 서늘한 공기는 몸을 훑으며, 사지의 근육은 제멋대로 수축한다. 몸이 너무 달아오른 탓이겠지. 그리, 저 광대한 빗속을 거닐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경계 앞에서 손을 내민다. 굵은 빗방울이 손바닥을 두드렸다. 전혀 다른 간격, 균일한 감각. 좋은 울림이었다.


그에 한 걸음을 걷는다. 잠든 사이 고였던 물이 족적에 맞춰 밀려난다.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신발에 물이 들어찬다. 그로부터 또 한 걸음을 걷는다. 전신이 순식간에 젖어들었고,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 역설적으로, 살가죽 사이에 스며있던 습기가 걷힌 느낌이었다. 빗소리도 한층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사위는 성난 침묵으로 만연했다. 아스라이 울리는 경적도, 어딘가에 상주할 인기척도 편린도 없다. 예민을 완성하는 감각은 쉼없이 이어지는 파문 뿐이었다.


한없이 뭉개지는 빗속을 거닌다. 옷은 피부에 달라붙어 윤곽을 드러내었기에, 며칠 사이 비루해진 몸이 가감없이 비춰진다.


본디 차들이 점거해야할 도로 위는 빗물과 잔해로 가득했다. 무거워진 흙 알갱이와 찢어진 나뭇잎이 다리 사이로 빠져나간다. 층고가 높은 건물은 안개에 휘감겨 희미했으며, 발길은 더욱 거친 물길이 되었다. 아직 붕 떠있는 마음과는 달리, 지극히 단절된 세상이었다. 잠겨가는 세상엔 눈꺼풀에 매달릴 자리가 없다. 눈 앞이 끝없이 번져간다.


네온사인이 수면 위로 흩어지니, 발치에 맺힌 빛마저 희미하다. 그렇게 길을 잃은 와중에, 몸은 흔적으로 기억한 항로를 걷는다. 달라진 몸은 경험을 비뚤게 했으나, 그 사이 달라진 나를 알기에 헤아릴 수 있었다. 발끝이 지나친 시간 위를 더듬는다. 열기가 식어간다는 건 그랬다.


이 빗속을 맨몸으로 뚫고 온 건 괜한 짓이다. 그런 생각이 스치며, 빛은 좀 더 명확한 실체를 드러냈다. 간판의 색상은 익숙했다. 쉼없이 찾아들었던 편의점이다. 출입문을 열기 위해 목재 계단 두 칸을 오른다. 신발 안에 들어찬 물이 쏟아져내렸다.


방수포를 두드리는 모양새가 세차다. 작은 떨림이 반복되어, 머리맡에 또 다른 수면이 있는 듯했다. 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본다. 온 창공을 채운 빗방울이 만든 굴절 덕에, 깊은 물 속처럼 흐릿한 정경이다. 탁 트인 곳은 없다. 여전히 물안개 사이를 헤매는 의식이다. 이제 다른 자극이 필요하다. 손끝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얇은 지갑이 만져졌다. 보잘것없다. 한 몫의 허기만 채울 정도다.


문 손잡이를 잡는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추레했다.


조명이 무척이나 밝다. 바닥은 광이 났으며, 상품은 완벽히 정렬되어있다. 완전하지 못한 건 자신 뿐이다. 계산대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바깥이 저 꼴이니 창고에서 정리라도 하고 있을까. 나는 문에 달려있는 종을 흔들었다. 맑은 소리가 울려퍼지나 기척은 없다.


유리창을 통해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장대비 속을 거니는 이는 없었다. 여러 잔해와 빗물 뿐, 어딘가의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한 시가 길다며 오던 안전 안내 문자가 없었다. 탁자에 놓인 티슈로 액정에 묻은 물을 닦아낸다. 포털 사이트의 대문도 평소와 다름없다. 검색창에 폭우를 쳐보아도 작년 여름의 기사가 전부다. 아직 꿈결에 파묻혀 있는 게 아닐까. 손가락을 천천히 반대로 꺾는다. 그만큼 지긋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로서 모든 건 더욱 기이해진다.


잠시 상황을 되짚는다. 기록적인 폭우에 반응 없는 사회란 내 경험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여태껏 그러했듯, 나는 무지의 소치를 앎에도 따라가겠다. 식욕이 가리키는 음식들을 집어들었다. 포장을 우악스럽게 잡아뜯고, 식은 속내를 데울만큼 시간을 더한다. 전자레인지의 기동음이 편의점을 가득채웠으나, 누구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어떤 행동을 하던 위화감은 여전하다. 애써 빈자리를 채운만큼 어딘가 공허해진다. 그러니, 하늘은 어둡고 땅은 푸르렀다.


모자를 거칠게 벗겨내며,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쥐어짰다. 바닥은 어느새 물로 흥건해진다. 항상 내려다보기만하던 빗물이 나를 우러렀다. 머리칼을 가볍게 털어낸다. 물 먹은 무심함이 눈 앞을 가린다.


괜찮다. 환경이 한 번 더 바뀌었을 뿐이다.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있다. 상황이 인도하는 길을 찾으면 된다.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현상이 사방에 즐비하다. 이질적인 기상현상, 어디에도 없는 군상들, 꿈이라 착각하지 못할 완전한 무의식인가, 환상이라 착각할 현실인가. 다만 음식은 충분히 뜨거웠고, 사고는 손길을 따라갔다. 단순한 향과 맛 사이에 끼어있는 부족함에 저울을 기울인다. 한낱 청년의 상상이 이리 정교할 수 있을까. 평생, 스스로의 역량이 드높다 평한 적이 없었다.


희미한 이성을 쥐어짜낸 결론이 그렇듯, 꿈이 아니라면 이 장면들을 사실로 받아들여야할까. 애초에 꼬리가 없는 생각이다. 머리가 뒤집혀 머리를 먹을 뿐이었기에, 어느덧 비루한 생각도 끊어졌다. 빗소리 위로 음식을 질겅이는 소음만 남게 된다.


허기가 물러난만큼 잡다한 생각들이 솟아난다. 우산이 의미가 없는 기형적인 날씨다. 사회의 반응 또한 이질적이나, 스스로 느끼는 감각만큼은 선명하다. 우울에 사무쳐 조현 증세라도 나타났는가. 한컷 뒤엉켜가는 생각과 함께, 창밖은 자욱해질 뿐이다. 혼란함에 빗대는 심상이라, 자연히 실소가 나온다.


"쓰잘머리 없네."


되었다. 그러니 길게 늘어진 가설을 구겨 주머니에 넣자. 다만, 언젠가 되돌아볼 요량으로 질감만 기억하면 될 터다. 그렇게 애를 써도 알 수 없음을 인정한다. 마침, 건물 옥상의 자리가 미어터진 시점이었다.


여태껏 쌓인 빗물이 흘러넘쳐 쏟아지니, 비좁은 세계의 비경에 작은 폭포들이 자리했다. 희뿌옇다 못해 칙칙한 하늘을 제외하면 어딜보아도 닫힌 공간이다. 오갈데없는 시선이 드넓은 창공으로 향한다. 구멍 뚫린 천장으로부터 삼라만상이 녹아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래, 죽음이 두렵던 적은 없었다. 세세한 과정을 떠올리며 스스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불안이 공포를 깨웠는가. 공포를 덮기 위해 불안을 키웠는가. 답은 정해져 있겠으나, 나는 언제나와 같이 질문을 반복하며 마무리했다. 한적한 세상도 할 일은 많다. 축낼 시간이 없다. 다시 모자를 쓰고, 싸구려 우비의 단추를 채우며, 나는 그렇게 한없이 익숙한 핑계를 대었다.


유리문을 힘차게 밀어내니, 차오르던 우울은 넓고 얕은 파문을 남겼다. 흐름은 서로 맞닿아 한층 거대하게 변모했다. 온 사방이 준동한다. 그럼에도, 무언가 결여되었다는 이질감이 죽지 않았다. 현상들이 적절히 맞물리지 않으니, 결국 그럴 듯하게 보이지 않는 탓이다.


손끝을 경계 너머로 보낸다. 서늘함이 피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고, 나는 일그러진 물방울을 코끝에 가져다대었다. 회상하여 떠올릴 때보다 더욱 선명한 향이었다. 그러니 환각 따위는 아니다. 다만, 거짓이 아니라면 현실이어야 할까. 바람 한 점 없는 호우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많은 당연함이 달라졌음을 이해해야했다.


"죽기라도 했나?"


빗물에 파묻힌 세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집힌 세상도 구태여 친절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나는 조금이라도 특별한 것을 찾으려 시선을 옮겼다. 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없었다. 균일한 간격으로 울리는 빗소리만 가득할 뿐, 건물들은 여전히 저마다의 고요에 영원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 사람을 비워낸 공간에 자연이 들어찼다.


아무도 없구나. 완전한 자각 후에야 평안함이 밀려왔다. 가벼워진 몸, 한껏 풀어진 자세로 첫 걸음을 뗀다. 어떤 말로 지금을 표현할 수 있을까. 삶을 엮어 만든 기억에 없는 단어였기에, 나는 걸음 사이에 질문 한 문장을 끼워넣었다. 족적이 늘어가고, 생각이 그만큼 가득해질수록 보폭이 좁아진다.


수많은 경험을 더듬어 윤곽을 빚어낸다. 사후라기에는 적막하고, 무의식이라기에는 정교했으며, 환상이라기에는 너무나 익숙했다. 애초에, 이곳은 무언가의 시작이 될 수는 있을까. 내 삶이 지나온 한 지점, 어느 영원을 갈구한 사념에 불과할지 모른다. 한없이 아둔한 기적이다.


익숙한 감정이 밀려든다. 역경을 넘은 자리에서도 또다시 불안했다. 특별한 풍경에 잠긴 채, 여전히 변함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때문에 간절하게 변화를 바랐다. 사색이 끝난 시점의 보폭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나는 우두커니 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반기는 것은 참으로 칙칙한, 안쓰럽도록 마른 먹먹함이었다.


비가 그쳤나? 아니다. 귀향은 끝나지 않았다. 하릴없이 걷다보니, 댐이 무너지지 않은 곳에 와있을 뿐이다. 두드림은 여전했기에,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느 때보다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지역을 벗어나기를 바란 것처럼, 억눌린 물줄기는 한없이 굵었다. 다만, 배려는 완전하지 않았다. 적어도 두 발은 아직 잠겨있으니, 그는 결국 나와 닮은 것이 되었다.


깊은 감상이 해가 될 상황이다. 그러니 앞으로 갈 길만을 살피자. 언젠가 후회하더라도, 이 선택을 옳다고 믿어야겠지. 나는 우비를 벗어 길바닥에 버렸다. 바람이 불지 않아, 비닐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형상이 하나같이 선명하다. 짙은 외곽선하며, 색의 경계면 또한 뚜렷했다. 본래 흐릿할 곳마저 너무나 짙었다. 본래라면 보이지 않을 세밀함이다. 그렇기에, 이질감이 더욱 확실하게 와닿았다.


이제 막 쌓아가던 건물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새롭게 개통한 도로는 다시 좁아졌으나, 상가의 간판은 최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로서 모든 게 익숙한 느낌을 준다. 그에 더 먼 곳을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빗물에 잠긴 세상을 훑는다. 애써 가려두었던 균열이 눈에 들어온다. 의심은 물속을 밝혔다. 어긋난 풍경으로 하여금, 이제껏 떠오른 생각들이 서로 맞물렸다.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좀 더 내게 있어 편안할, 다른 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들."


근방의 건물에 다가선다. 벽면은 옛 정취가 감돌고 있었다. 표면을 매만지자 빛바랜 염료는 부스러져 떨어지고, 시선은 파편을 따라 내려간다. 신발코가 닿을만한 높이의 상흔, 세월이 비집고 들어간 틈엔 이름모를 풀이 자리해 있었다. 이윽고 눈길은 반전되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향한다. 지붕은 멀끔했다. 새단장을 마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듯, 극히 적은 햇빛마저 반사하고 있었다. 옛 시선의 성장을 반영하듯, 아래는 낡았으며 허공은 창연하다. 상념의 끝이 보인다. 내가 가진 무의식에 어떠한 외력이 개입했다.


먼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향한 아집이었다. 내게 그만큼의 특별함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초월이 자신을 굽어본다 여겼다. 그리고 대답하듯 아스라이 퍼지는 천둥, 마른 먹구름의 음성은 수십 갈래로 쪼개져 있었다. 누군가의 반응이라 생각한 것은 아마, 내가 그를 바랐기 때문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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