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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낙오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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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05.25 06:23
최근연재일 :
2022.07.07 04:08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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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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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2.05.26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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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맴도는 것들 (4)

DUMMY

흙길은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밑창에 엉겨드는 진흙 때문일까. 잠시 걸음을 멈춰 드러난 나무 뿌리에 발을 긁는다. 흙덩어리와 죽은 풀 따위가 묻어났지만 개운하지 않다. 마치, 후회가 남을 짓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털어내지 못한 미련은 몇 마디 말이 되어 머릿속을 떠돈다. 빗속에 남겨둔 옛들은 내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자라나겠지. 진실이 어떻든, 결국 그렇게 자위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 좀 더 그럴 듯한 핑계를 댔어야 했다.


똬리를 튼 감정의 혓바닥이 날름거린다. 생각이 너무 길다. 수없이 배워도, 이미 지나쳐도 미숙한 생이다. 이미 끝난 선택을 후회하는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으나, 도심은 울창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미약한 빗소리만이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다.


다시금 발밑을 주의하며 나아간다. 비교적 길이 닦여있던 초입과는 다르게, 이제는 편히 오갈만한 경로가 없었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비탈을 선택하고, 튼튼해보이는 나무를 붙잡는다. 똑바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나는 경로를 끊임없이 재확인해야했다. 어떻게든 앞을 찾아 걷는다. 그 뿐이다. 더 깊이 들어설수록 주변이 어두워졌고, 모든 사물이 점점 비슷해보였다.


느려지던 걸음은 이윽고 한 자리에 멈춰선다.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다. 그러니 높은 곳을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경사가 진 구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평탄한 숲 지형이다. 바위산 같은 걸 본 기억도 없으니 선택지는 하나겠지. 나는 당장 옆에 서있는 나무를 매만졌다. 꺼끌한 나무껍질을 뜯어보니 지독히도 편안한 향이 난다.


"할 수 있을까?"


밟고 올라갈 부분도 마땅치 않고, 올라가는 도중에 지칠 거다. 어찌 오른다 하여도 특별한 무언가가 보일, 믿음 비슷한 편린조차 없다. 괜한 행동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선택할만한 요소를 찾던 나는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계가 나를 인도하고 있다고, 그저 막연하게 기대야한다.


한 줄기 선이 보인 건 그때였다. 빈틈없이 먹먹한 하늘 위로, 더욱 짙은 매캐함이 피어오르고 있다. 젖은 나무를 태울 때에나 날법한 자욱한 연기다.


모든 정황이 물 흐르듯 이어지고 있다. 나를 깨운 빗소리와, 첫 걸음을 떼게한 허기, 다른 곳을 찾게 만든 기이함, 수면 아래에서 만난 작은 인연까지, 전부를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석연찮다. 단지, 내가 모르는 사실이 여전히 많다는 이유로 지나쳐야할까. 빗속에서 판단했듯, 아직 근거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세계를 따라야한다. 끝으로 하여금 시작을 알 수 있도록.


가볍게 발을 구른다. 땅 위로 드러난 바위를 딛으며, 서로 뒤엉킨 뿌리를 뛰어넘는다. 깊은 숲은 개척되지 않은 산지와 같았다. 몸의 움직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들이는 신경만큼, 멀어보였던 연기구름이 가까워지고 있다. 또한, 숲의 끝도 함께 보였다. 곧은 줄기들 사이로 스미는 빛줄기를 보며 발끝에 더욱 힘을 준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고, 모든 윤곽들이 한층 흐릿해진다. 그와 동시에, 반대로 선명해지는 의문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날렵하지 않다.


무언가 달라졌다. 밀려드는 생각만큼 천천히 힘을 뺀다. 속력은 줄어들고, 점차 튕겨오르는 듯한 뜀걸음이 된다. 발목에 느껴지는 부담이 너무 적다. 거칠어야할 호흡은 고요하다. 제 상태를 하나씩 확인하며 시선을 내린다. 젖은 옷가지에 땀이 스미지 않았고, 마르지 않은 바짓단은 깨끗했다. 직후, 어떠한 생각이 스치며 멈춰선다.


그조차 우연한 순간이라 하기 공교롭게도, 나는 숲이 끝나는 경계를 목전에 두고 서있었다. 다른 환경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다만, 그곳에 선택은 없었다. 도시를 벗어나던 감각은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자연히 미간에 주름이 진다. 입술 끝은 이빨 사이로 들어가고, 눈썹 끝은 살짝 올라간다.


"변했다."


체감되는 부분은 없었다. 조금 떨어져, 남을 보듯해야 이질감을 느낀다. 심박은 희미하고 호흡은 그보다 옅다. 노폐물 따위는 배출하지 않으며, 다른 오물이 묻지 않는다. 손을 들어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평소와 같은 적당한 온기, 그렇게 더욱 혼란해진다.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변해야했다면 기준은 무엇인가. 물론 본래의 세계에서 벗어났으니, 내가 믿는 진실들이 부정된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그저, 짐작할 수 없어 불안할 뿐이다.


제자리에서 해소될 불온은 없다. 때문에 가야한다. 숲을 벗어나, 더욱 짙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기의 시발점을 찾자. 길게 자라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간다. 억센 풀이 피부를 스치고, 잎사귀의 질감을 느낀다. 꺼끌하고 단단하다. 드러난 피부가 얕게 베이며 피가 방울졌다. 이번엔 뭐가 달랐을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생각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재촉한다. 열망과 탄식이 한 데 뭉쳐 두근거렸다. 그렇게 갈라진 진의 중 더 밝은 것을 찾아, 숲을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무지의 소치마저 경외롭게도, 시야를 채운 장면은 아득한 광명이 전부였다. 헤맨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텐데, 왜 이리 눈이 부실까. 휘몰아치는 빛줄기가 망막을 지나 머릿속까지 들어찬다. 어느 것도 분간할 수 없다. 하얗게 물들어 맥동하는 시계와 귓가에 소용돌이치는 이명만이 가득하다. 그도 잠시, 곧 지긋한 통증이 밀려오며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가린 막이 벗겨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그에 더해, 온 몸에 엉겨있던 우울이 부서져 휘날리는 것만 같았다. 나를 기다린 풍경은 어떠한가. 끝을 상상하기가 죄스러울 광활한 평야, 먹구름을 비집고 내리쬐는 햇살과 그 아래의 작은 물웅덩이들까지. 평생 남기고픈 모습이었다. 익숙해진 그대로, 바지춤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직도 물이 흥건한 기기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런."


사진으로 남기는 건 포기해야했다. 그러니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의 풍경을 기억하자. 느긋한 미풍은 온화했으며, 구름을 흩어낸 빛줄기는 아련하다. 물을 담아둔 땅은 하늘의 모든 장면을 되풀이한다. 빛을 담는 주체는 한껏 추레해진 나다. 괜히, 옷에 남은 물기를 한번 더 쥐어짜낸다. 몇 방울 더 떨어졌으나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내 행동이 우스워 작게 웃는다. 폐부에 끈적히 달라붙어있던 숨이 허탈하게 새어나왔다.


애초에 풍경을 강조하는 피사체가 나였을지 모를 일이다. 오래전에 버릇이 된 풀이법은 무거웠기에, 감상을 정리하는 일도 이쯤으로 마무리 된다.


연기는 한 층 먼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동산 어귀, 무성하게 자라난 갈대숲 너머다. 들판의 황금밭은 조금씩은 다른 색감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달라 더욱 환히 빛나는, 덕분에 더 그립게 느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결 가벼워진 걸음을 딛는다.


어색한 정경이 왜 미약한 옛을 불렀을까. 경험상, 해답은 항상 가깝고 불안한 곳에 있었다. 결론 이전에 이미 보폭이 커지고 있었다. 점진적으로 몸을 길게 뻗는다. 큰 물웅덩이를 한달음에 가로지르며, 무겁게 나부끼는 옷자락을 느껴가며, 광활한만큼 멀었던 세상을 가까이 둔다.


갈대숲이 내게 다가왔고, 가라앉은 정취는 그만큼 멀어진다. 피어오르는 색감이 짙었고, 그만큼 강렬한 매캐함이 맡아졌다. 눅눅한 첫마디에 알싸한 끝음절, 젖은 풀이 타오르는 향은 그러했다. 억센 갈대를 비집고 들어선다. 갈대가 바람결에 휘날리는 소리마저 잔잔하고 올곧다. 이토록 파묻힌 와중에는 매연 향기도 나지 않았다. 지긋하게 족적을 남긴다. 빽빽하게 자리한 갈대들을 피해간다. 발자국이 어지러이 이어졌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이 보였다. 단지 무성했을 뿐, 이들의 치세는 넓지 않았다. 때문에 자그마한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보였다. 곧게 뻗은 갈대 사이로 또다른 생태가 보이고, 환경의 경계가 그어진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불꽃은 그곳에 있었다. 살아남아, 절박히 죽어가는 생명을 멀리한다. 바람에 꺾여 날아간 갈대와 죽어 떨어진 나뭇가지로 타오른다.


내가 찾던 이도 그 자리에 있었다.


"걸음이 꽤 느려졌구나."


참으로 여상한 말투였다. 앞서 떠올렸듯, 나는 그 수많은 우연들을 믿지 않았다. 내 위에 자리한 무언가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해서 모든 과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제 주제가 닿지 못할 이해가 있으리라고, 나는 많은 변화들에 그렇게 적응해왔다. 다소 불쾌한 다름이라도 인정하며 나아지자. 부족한 경험을 부풀려, 가시 돋친 삶으로 세운 다짐은 꽤나 굳건해보였으나, 과장된 탑은 언젠가 무너진다는 것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곧 끝나는 갈대밭 너머, 언젠가 보았던 뒷모습이 선명하다. 잔잔하게 밀려와 일순 강렬해지는 기시감, 기억 저변에 자리한 어느 장면이 자연스레 되풀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작은 몸, 때문에 더욱 커보였던 거울들이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뒤늦게 그때를 떠올려 지금을 알아채니, 그제야 갈대의 키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훑으며 내려간다. 이윽고 어깨 선에 맞추어 멈춘다. 잊어버린 시절이 돌아왔으니, 그의 모습이 비로소 완전해졌다.


누가 계획했던,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호의였다.


힘줄이 돋아난 손이 꺼져가는 불을 살려낸다. 오래되어 빛바랜 코트, 완연한 봄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다. 다만, 그에게는 가장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풍경이 그와 어울렸다. 나는 갈대를 밀어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빈틈없이 깔린 자갈 위를 걸어, 그의 등 뒤에 선다.


첫 말은 어떤 게 좋을까. 오랜만에 만나는 인연은 아니다. 긴 말이 필요한 관계도 아니었고, 구태여 안부를 묻는 게 되려 껄끄러울 상황이었다. 될 수 있는 한 가장 가벼운 안부를 전해야겠지. 우리에게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작은 기색에도 휘날리는 불꽃만을 따를 뿐이다.


"기분은 어때요?"


지나치게 적당해, 일견 모자라보이는 질문이 튀어나온다. 고심하여 골라낸 순간은 바람이 잔잔해져 적막이 깔리던 때였으니, 결국 필요한 요소는 나에게 있었다.


"묘해."


들인 시간만큼 짧아진 대답과 함께 남자는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불똥이 튀어오른다. 곧이어 화염이 더욱 넘실거리고, 우리의 문장은 그만큼 길어진다. 거리는 역으로 짧아졌기에,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가 오고 있는 걸 아셨어요?"

"알다마다, 처음부터 알았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의 동공 속에도 작은 불빛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상상과는 다르다. 순간을 기록한 사진과도 달랐다. 익숙해져 잊힌 당연함들, 알고있다 착각한 그리움이었다. 모든 건 찰나에 일어났다. 급히 새겨놓은 추억이 녹아내리고, 오롯이 내 앞에 자리한 사람만 보였다.


먼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듯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울지 않았을까. 홀로 남은 기억이 안타까웠을 뿐인가. 슬픔은 갈 곳을 잃어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니, 상처가 끝없이 덧나던 이유를 이제야 찾아낸다. 먼 풍경의 빗물이 역류하는 게 느껴졌기에, 나는 세상과 이어진 의식을 억눌렀다. 이 시간은 필히 늘어져야했다.


아직 마주할 것이 많았기에,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또다시 불을 가까이한다. 차오르는 우울이 조금이나마 걷히도록, 마음에 엉겨붙은 감정들을 불사른다. 동행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등을 두드려 주거나 어깨 위로 손을 얹지 않았다.


다만, 그는 물었다.


"내가 네 아비라는 것을 믿느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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