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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결말

낙오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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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어귀
작품등록일 :
2022.05.25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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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7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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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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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2)

DUMMY

서로를 붙잡는 상념은 공방의 지척까지 이어졌다. 이제 익숙해진 길, 낮은 정취가 스며있는 거리를 가로지른다. 이 마을은 새로운 날이 밝았음에도 고요했다. 비어있는 집이 많은 탓이다. 언젠가 사람이 많아질 것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세상이 얼마나 혼란해져야 그때가 올까. 북적임은 조금 그리울지 모르나, 낙오자가 늘어나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래,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작은 결론이 온점을 찍을 즈음,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 모서리가 눈 끝에 걸쳤다.


“잿불은 오늘도 작업 중인가요?”

“도깨비가 떠나고 서리 단풍도 공방에 가질 않으니까. 잿불이 날을 잡은 게지.”


널찍하고 평평한 마당 곳곳에 그을음이 남아있다. 건물 안쪽은 부산스러웠다. 이윽고 땟국물이 가득한 남정네가 마당으로 뛰쳐나온다. 마스크를 집어던진 그는 바깥 공기를 들이키더니, 입에서 검은 매연을 뱉어냈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 끝이 푸석푸석하게 타들어있다. 내부의 격벽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고 있다.


“이번에는 뭘 만드시는 겁니까?”


그는 쇳가루와 재가 가득 묻은 보안경을 쓰고 있었다. 작업복의 밑단이나 소매는 타들어 거뭇거뭇했다. 그제야 우리를 알아본 그가 씨익 웃으니, 검댕이 묻은 치아가 햇살을 받아 흐릿하게 반짝였다.


“일단 무작정 만들고 있어서 설명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아마, 마지막 작업이 될 것 같아요.”


그는 완연한 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저 시간을 축내며 현상을 기다리는 나와는 달랐다.


대부분의 낙오자들은 허무 앞의 무력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는 했지만, 비뚤어진 잔재였음에도 다시 한번 타오르는 이들이 있고는 했다. 이후의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라 했던가. 더 나은 선택이 있는 게 아쉽게도, 나는 아직도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달래기 위해 토해낸 이물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어려운 법이었으니까. 시든 벚꽃도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독자를 생각하는 편이 어떻겠냐고 물었지.


타인을 위한 글, 달리 말해 읽혀지기 위한 글이라. 대중이 없는 세상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 하나를 알기가 어려운 삶인질데, 과연 마을 사람들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기록 중 하나가 되어 언젠가의 지침이 된다··· 나를 기쁘게 하지는 못할 일이다.


조건 없는 호의는 오직 받아본 기억밖에 없어, 나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혹여나 미련이 남을 게 두려워 답을 구했으나 부모님은 어떤 대답도 주지 않으셨다. 나는 변했어도 여전히 유약했다.


“눈꽃, 또 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나."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전이 이후에 대한 생각을 좀 했어요.”


우리의 짧은 대화를 들은 잿불은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괜찮을 거에요. 같은 과정을 거친 낙오자들 모두가 한 세상에 몰려있지 않을까요? 분명 알맞은 쓰임새가 있을 거에요."


그는 한 차례 더 해말간 웃음을 보였지만, 티끌만한 일그러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단지 아직 살아있다는 이유로 불가해한 죽음을 경계해야 하는 우리의 찰나를. 산산이 조각난 파편들이 사방에 떠다니는 듯했다. 이런저런 감정으로 점철되었던 이 거리에 영원히 잔류하게 될 사념들이 아른거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아득함에, 내 이름조차 벚꽃처럼 시드는 느낌이었다.


등짝에 쓰라린 통증이 온 건 그때였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겨울비는 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털고 있었다.


“뿌리가 부실한 생각에 좀먹히면 노망이 생기지. 일이나 하자고, 눈꽃.”


그는 외부에 노출된 승강기에 먼저 올라서 내게 손짓했다. 외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투박한 생김새, 온전한 작업을 위한 일환이다. 잠시 다른 꿈을 꾸어도 금방 제자리를 찾게 할 일관됨이니, 나도 할 일을 마쳐야 조금이나마 떳떳하겠지. 새로운 주민을 맞이한다. 푸른 꽃잎의 자리를 이은, 그게 마을에서의 내 일이었다. 금속 표면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평소와 같은 무심한 복장,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이어 코트 안쪽에 미리 매달아둔 장비를 확인한다. 다섯 번 접히는 금속 봉, 적당한 무게감이 안정감을 줬다. 본래, 푸른 꽃잎을 위해 도깨비가 만들어주었던 물건이었다.


“완벽하군.”

“또 영문 모를 소리.”


지하로 내려가자, 흙내음이 머무는 공간이 앞에 펼쳐졌다. 서늘한 감촉과 약간의 숯향이 가득하다. 바깥의 소리가 일체 차단되어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만약 무언가를 남기고 가기를 원했다면 나 역시 분주하게 이곳을 오가지 않았을지. 그리 생각하며 벽면의 손잡이를 당긴다.


기동음과 함께 내려가는 격벽, 촌스러워도 견고해보이는 기체가 보였다. 외관은 끝까지 취향이 아니었나. 단지 성능에 심혈을 기울였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 물건들의 장인은 이제 없으니.


광택없는 회잿빛 몸통, 내부가 보이지 않는 짙은 창. 섬세히 음각되었으나 마음껏 날려 적은 문양들, 마지막과 참으로 걸맞은 모양새였다. 서슴없이 들어가니 더욱 별게 없었다. 단지 여러 형태가 그려진 기판과 조종간, 골격이 드러난 좌석이 곧 전부였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멋이 없네요.”

“단풍이 디자인을 해주기는 했었어.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지.”


겨울비는 쓰게 웃으며 기기를 작동시켰다. 사용법은 전부 그림으로 표시했고, 외곽선은 점으로 양각되어있다. 문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듯, 이곳은 국적과 인종이 쓰잘데기 없어지는 장소였다. 역사가 주는 가르침은 온데간데없이 그릇만 덩그러니 흘러들어와 그랬으며, 본인의 생각을 쉬이 꺼내기가 어설퍼 더욱 그랬다. 구태여 말로 꺼낼만한 본심이 없었음에도, 낙오자들은 서로 닮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떠난 뒤에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나요?”

“그게, 그 양반은 뭘 만들던 수정을 엄청하거든.”


겨울비는 좌석 아래를 매만졌다. 체형과 맞지 않는지 온몸을 구겨가며 무언가를 찾는다. 그의 미간이 다시 펴진 뒤에, 운전석이 후덕하니 넓어진다.


기계는 첫인상보다 조용히 움직였다. 졸지에 두 남성의 숨소리만 가득해진다. 그리, 침묵을 쥐어짠 힘으로 차량을 승강기에 올린다. 지상 위에 노출된 차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떤 염료를 쓴 건지, 그제야 앞면의 글자가 홀연히 드러났다.


‘설렘을 잃은 이곳의 모든 홀아비들에게.’


잠시 마당에 정차한다.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는 말을 뒤로하고, 나는 조수석에서 내려서 잿불을 찾았다. 아직 내부가 정리되지 않았을까. 바깥의 그늘에 앉아있는 그가 보인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깊이 가라앉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흔한 사색이었다.


"바로 가시려고요?”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잿불은 내가 다가가자 금방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살짝 올린 입꼬리와 휘어진 눈이 인상을 밝게 만들었으나, 그의 눈동자는 이전과 진배없이 침잠해있었다.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공방 뒤로 돌아가 열 개는 족히 넘어보이는 우산들 중, 적당히 좋은 물건 세 개를 챙겨돌아간다.


차량에 다시 올라타서 우산을 뒷좌석에 두자 겨울비가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색 계열에 금색 실이 수놓아져 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낭창하게 새긴 글자, 누군가 읽기를 바란 문구가 아니었다.


"도깨비가 쓰던 거다."

“사실 단순한 악필이 아니었을까요?”

“때로는 정갈하게 쓰더군. 그게 그의 멋인 게지.”


겨울비는 헛웃음을 지으며 마을 외곽을 향해 운전했다. 못내 옛생각이 들었는지, 입가에는 작은 웃음이 매달려있었다.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을은 드넓은 평야 위에 세워졌기에 체류지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평탄한 대지 위에 각 시절을 떼어다놓은 듯한 장소들이 있다. 꽃망울이 맺힌 작은 동산, 숲 속의 계곡이 도처에 산재했다. 우리는 잠시 쉬어가고픈 때를 지나쳐, 저 멀리 떨어진 바위산으로 향했다. 거대한 지형은 짙은 먹구름과 빗방울에 덮여 둔탁한 윤곽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꽤 거친 현상이다.


“우리 같았어. 너 같기도 했고, 잿불 같기도 했지. 시든 벚꽃이나 서리단풍 같지는 않았어도 말이야. 그래, 이 말이 옳겠군. 낙오자답지 않게 평범한 사람이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딱 적당한 단어라고 되뇌었다. 지극히 평범한, 불운했던 우리라고. 밀려오는 감상에 시선을 저 멀리에 둔다. 하늘이 인상을 한껏 찡그려 화를 내고 있었다. 낙뢰 줄기가 여럿이었고, 뇌성은 웅장했다.


“저는 비가 싫습니다.”

“그 말도 참 여러 번 들었다.”


슬며시 창을 올리고 뒷좌석을 살펴본다. 어디 불편할만한 건 없을지, 처량한 이에게 줄만한 건 없을지.


몸을 한껏 기울여 바라보니 양옆으로 열리는 구조가 보인다. 안을 살피니 담요와 수건 여러 장, 물이 찰랑대는 보온병이 보였다. 물건들을 꺼내 좌석 위에 올려둔다. 하나같이 상태가 좋다. 서리 단풍이 미리 넣어둔 물건일까.


현상의 권역에 들어서며, 강판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그 날이 떠오를 만한 엄청난 폭우였다. 와이퍼가 열심히 움직여도 시야가 트이지 않는다. 계기판에 붉은 등이 켜졌다. 차량을 기준으로 물의 수위를 나타내는 그림이었다.


“속옷까지 홀딱 젖겠어.”


겨울비가 조정간을 만지니 몸이 한 차례 붕떴고,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잠잠해졌다. 그제야 주변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지형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작은 폭포와 같았고, 거친 서슬에 깎인 흙더미는 쉼없이 쓸려내려간다. 물살에 떠밀려온 수목들이 아무렇게나 얽혀있다. 뒷일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풍경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허물도 알아서 죽지 않겠어요?”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그럴 일이 없다는 건 이미 둘 다 알고있었다. 허물은 본인이 직접 먹어치우도록 설계되었으니까. 어딘가 태풍의 눈이 있겠지. 우리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굵은 빗줄기는 온 풍경을 흐리게 만들었기에, 나는 챙겨온 우산을 붙잡았다. 도깨비의 작품은 바위산을 기어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겨울비는 도깨비의 우산을 택했다.


그가 먼저 문 손잡이를 잡았다. 미리 여밈끈을 풀어두고, 문을 밀며 우산을 펼친다. 나도 같은 방법으로 땅을 밟는다. 사방을 가득 채운 물보라를 느끼며 천천히 바위산을 올라간다. 흙이나 식물이 엉킨 곳은 미끄러웠기에, 드러난 암석들을 골라 밟았다. 넓게 딛는 걸음에 바짓단은 금시에 흠뻑 젖어들었고, 우산은 어깨 어림에만 효용이 있었다. 단정한 맵시가 망가졌으나 괜찮다. 어떤 진창도 결국 현상에 쓸려 씻길 터였다.


길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확연히 잠잠해진 빗발을 따라 걸으면 되었으니.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도 점차 미약해졌다. 폭우는 그렇게 봄날의 첫비가 되었다. 먼저 산을 오르던 겨울비는 어느 바위 틈 앞에 멈춰서있었고, 그의 주변에서는 바람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동굴이 있다.


그가 발원지를 찾았나? 한결 여유로워진 산행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그에게 다가간다. 마침 적당한 이름이 떠오른 참이었다.


“단비, 어떻습니까?”


뜻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시선을 한 곳에 둔다. 바위 아래에 조그만 틈이 있었다. 바람이 맴돌고 있었으며, 빗물은 구멍으로 흘러들었다. 바닥에 부딪힌 물방울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비어있는 공간을 따라 울린다.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물소리에 나와 그가 서로 마주본다.


“꽤 쌓였겠네요.”

“아마도.”


몸을 한 층 가볍게 여긴다. 그를 위해 행동을 머리보다 앞세운다. 이는 낙오자들의 방식이며, 육체를 기억하는 의식의 한계였다. 우리는 좁은 틈으로 몸을 넣었다. 한 사람은 여유롭고, 두 사람은 비좁은 넓이다. 그도 잠시, 가파른 경사의 입구를 지나니 널찍한 동공이 나왔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렴풋한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희미한 빛을 바라보고 있을 때, 겨울비는 나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밖과 안을 번갈아보며, 홍채가 변화하는 감각을 선명하게 만든다. 경험을 앞세워 상상에 살을 붙이니, 내 동공도 어느덧 그처럼 팽창되어 빛의 주검으로 연명할 수 있게 된다.


겨울비는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장한 내 모습이 기꺼운지, 새로운 낙오자를 만날 때와 비슷한 표정이다. 그런 겨울비의 뒤로는 희미하게 점등하는 허물들이 있었다. 오래된 종유석들 사이, 고치에 매달린 얇은 피막 안쪽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온다. 짧은 맥동 주기, 다소 검붉은 빛깔. 현상의 주인은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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