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물론 '앉아서 질기게 버티며 쓴다'라는 식의 질문은 아닙니다. 지금 쓰고 계시는 글이 어떤 과정을 통해 구체화되었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이죠.
제 경우는 대충 이렇습니다.
1. 착상 : 하루에도 무수히 떠오르는 잡생각들 중 아이디어를 얻는다. 보통 한 장면이나 상황, 설정 같은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덩어리를 키워 나가 이야기가 될 수준까지 커지는 정도.
-하루에도 몇개씩 떠오르는 것이 글감이긴 한데, 저 같은 경우에 1주일에 대략 10개 가량 떠오릅니다. 그냥 '야 이것도 괜찮겠다' 정도의 생각이죠. 물론 이 정도의 생각은 분량이 매우 짧습니다. 그냥 뭐 간단하게 상황이 툭 떠오른다던가 설정이 괜찮은게 뿅 튀어나온다 수준이죠.
2. 1차 솎아내기 : 여태까지 떠올렸던 생각들 중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 잠시 좀 다듬어야 하는 것, 그냥 망상으로 넘겨버리고 영원히 파묻어버릴 것(...)들을 분류한다.
-보통 1번에서 그 즉시 이어집니다. 생각을 막 하다가도 '아, 이건 안될 것 같은데'나 '이건 어디서 본 것 같잖아'라는 생각이 연달아 떠오르는 것들은 곧바로 탈락대상입니다. 보통 후자는 방금 전에 본 것들에서 연관되어 이어진 생각하는 망상 급이기 떄문에 소재로 써먹다간 십중팔구 짝퉁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소설류를 잘 안 보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데, 그 글을 보고 난 뒤에 연관적으로 뭔가 '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들의 태반이 방금 전에 봤던 거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죠-.,-
3. 써볼만하다고 생각되는 걸 일단 한 번 써본다 : 일단 글로 고착화를 시켜봅니다. 장면이라면 장면, 소재라면 소재, 상황이라면 상황, 인물이라면 인물, 설정이라면 설정. 뭐 아무튼 쓸 수 있다면 막 씁니다.
-좀 더 다듬고 설정을 세우고 바닥을 깔고 쓰진 않습니다. 말 그대로 막 쓰는 과정이죠. 일단 뭐라도 쓰고 구체화를 하면, 머리 속에서 굴러다니는 것보단 훨씬 구체적으로 파고들 수 있고, 이 잡생각이 물건인지 아니면 정말 써먹을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4. 2차 솎아내기 : 써본 것을 보며 잠시 좌절하고 폐기처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도 나중에 어딘가에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건 저장을 한다.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겠지-.,-...
-제 컴퓨터에 있는 문서들의 절대다수가 4번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일단 확정짓고 글로 만들어나가기엔 뭔가 지금 당장 확 감이 오는 건 아니지만, 일단 조금 더 다듬으면 어딘가에 활용할 수 있어보이거든요. 실제로 본글을 쓸 때 이 잡동사니에서 재활용한 요소가 꽤 됩니다.
5. 방치 : 4번까지의 과정을 거친 모든 자료를 냅둔다. 어쩔 땐 진짜 이런 걸 썼는지도 까먹을 정도까지.... -.,-
-물론 농담 삼아서 하는 소리 같지만, 실제로 저럽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4번까지 과정을 거쳤지만 저게 진짜로 '어딘가에서 나도 모르게 베낀 것'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겁니다. 둘째는 '까먹고 나서 보면 이게 진짜 괜찮은지 구린지 훨씬 더 잘 알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두 가지를 확인하는 건 지금 당장보단 좀 시간이 지나서야 확인할 수 있겠지요.
6. 창고 뒤적거리기 : 머리를 싸매쥐며 쓸 게 없다고 자학할 때 쓰고 까먹은 것들을 한 번 뒤적거려본다. 물론 대다수는 아직 착상이 안 되는 잡동사니지만 가끔 괜찮은 것들 몇 가지가 보이면 그걸 섞어본다.
-이 과정에서 쓴 것들 중 꽤 많은 것들이 '역시나 어디서 베낀 것 같아...'나 '지금 보니 좀 아냐'에 걸리고 맙니다. 슬픈 일이죠. 물론 그 중에서 살아남은 것들이 있으면 그걸 몇 개 섞어보기도 하고 생각을 좀 더 해봅니다. 진짜로 써먹을 수 있을까? 라고 말이죠.
7. 골동품 다듬기 : 어느 정도 그러모은 거로 일단 글을 죽 써본다. 죽 써본다. 쓸 수 있을 때까진 써본다.
-세부설정 없이 막 써봅니다. 정말 이게 글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넘기고 일단 씁니다. 이전까지 쓴 내용을 바탕으로 엮고 조합을 해서 줄줄줄 써봅니다.
보통 이 과정에선 30에서 100페이지 정도 분량이 되는 것들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글들의 대다수가 이 과정에서 묶여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말 그대로, 소신에게는 아직도 10개의 글이 남아 있습니다...랄까요 -.,-
8. 3차 솎아내기 : 크게 세 가지 과정으로 분류. 계속 쓴다, 잠시 보류, 폐기처분(...).
-계속 쓰는 건 이걸 본격적으로 쓰겠다는 생각이고, 보류는 이 글을 5번 과정, 그러니까 다시 쳐박아두겠다는 겁니다. 보통 여기는 쓰긴 죽 썼는데 진짜 글이 되려면 완전 대공사를 해줘야 하거나, 중간에 핵심을 박아 넣을 만한 아이디어가 없을 경우입니다. 폐기처분은 진짜 드문 경우인데, 이건 혹시라도 누가 내 컴을 들여다 봤을 때라도 보여주기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생각될 경우입니다. 다 쓰고 보니 베낀 거라던가, 짝퉁이라던가 하는 경우 말이죠(...)
9. 설정 구체화 : 쓰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설정을 짜기 시작한다. 이제서야(...)
-옛날엔 설정부터 하고 글을 썼습니다만, 설정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글 쓰기 위해서 필요한 법인데 설정 붙잡기 시작하면 설정'만' 붙잡는 경우가 허다해서 아예 설정을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헌데, 설정을 포기하니 뒷감당이 도저히 안 되거든요. 몇몇 글이 이 경우에 해당되어서 자멸하기도 했습니다. 으하하하....
10.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 : 이제부터 진짜 글을 씁니다. 인고와 근성의 시간!
-드디어 진짜 글쓰기 시간입니다만.... 이 과정을 거친 뒤에도 살아남아서 연재같은 것을 통해 남에게 드러내는 확률은 많지 않습니다.
전 대충 이런 과정을 통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버전도 있습니다.
뭔가 떠오른다 -> 써본다 -> 어 좋은데? -> 막쓴다 -> 어 이거 말되네? -> 계속 쓴다 -> 분량이 파바박 늘어난다 -> 오우예
옛날엔 이런 식으로 '한번 번뜩 떠오른 생각으로 우다다다 쓴다' 였습니다만, 이런 과정으로 쓴 글은 한 번 막히면 나락까지 떨어지더군요. 그래서 이젠 이런 방식은 가급적 자제하고 있습니다.
p.s 문제라면 제 문서의 파일들은 1번에서 10번까지 모든 파일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겁니다. 지난번에 한 번 정리한다고 폐기할 파일들 지우다 연재중인 글을 지운 적이 있어서 피를 봤지만... 아무래도 문서 따로 넣고 카테고리 만들면 그 쪽에 안 들어가게 되어서 그냥 무작위로 섞어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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