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me the 국용!(1)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재물을 모아 도로를 지을 생각이오.”
“무엇이옵니까?”
이지강이 불신 반 기대감의 시선으로 향을 바라봤다.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한 재물을 확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하면서도 지금까지 향이 보여준 성과들을 생각하면 무언가 방법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특별할 게 없소. 국용을 쓰는 것이지. 매해 5만 섬씩 10년쯤 들이면 황해의 철광과 흑연광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충청, 강원의 석회 산지로 이어지는 도로 정도는 닦을 수 있지 않겠소?”
이지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저하! 지금 풍저창(豊儲倉)에 있는 미곡의 양이 14만 섬이옵고 1년에 국용으로 나가는 미곡이 5만 8천 섬이옵니다. 옛말에 ‘나라에는 3년의 비축이 없으면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다.’라 하였으니 이미 재정이 위태로운 상태이옵니다. 매해 5만 섬이라니. 그래서야 위급할 때 쓸 양곡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통장 잔고 마이너스 찍힌다!’라는 이지강의 악다구니에 향이 당황했다.
“엥. 전세로 거둔 미곡 중 조정으로 올라온 양만 30만 섬에 가까운데 풍저창에 곡식이 그것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광흥창(廣興倉)에서 매해 녹봉 등으로 나가는 미곡의 양만 11만섬이옵고, 의창(義倉)에서 환상미(還上米)로 쓰이는 곡식 역시 상당하옵니다. 게다가 지난 수년간 기근이 심하여 전세를 감한 곳도 여럿이니 풍저창의 미곡이 적을 수밖에 없사옵니다.”
향이 짧게 신음을 흘렸다.
‘조선 조정이 거지인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고 보니 심하긴 하네.’
예전에 향이 본 기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조선의 예산.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을 기준으로, 조선 조정의 공식적인 예산은 중앙 100만 섬, 지방 100만 섬으로 총 200만 섬쯤이라 한다.
비리, 운반 중의 손실을 감안하면 실제 예산 규모는 400만 섬(중앙 150만 섬, 지방 250만 섬)이라는데..
이를 GDP로 환산하면 GDP의 약 5% 정도가 조선의 국가 예산이다.
비유하자면 한 스무 명쯤 되는 대가족의 총수입이 4천만 원인데, 공용 생활비로 쓸 수 있는 돈이 400만 원뿐이며 그마저도 여러 이유로 사라져 200만 원만 쓸 수 있다는 소리다.
당연하게도 20명의 생활비로 200만 원은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다.
스무 명이 살 집의 관리비만 200만 원은 나가지 않을까.
상황이 이러하니 무언가 큰 사업을 벌이려면 예산에 구멍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호조판서 이지강이 거품을 물며 도로 건설을 반대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뭐만 만들면 국용이 없다고 하더니 진짜 개거지네..’
그렇다고 도로를 안 지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향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군자창(軍資倉)의 군자미(軍資米)가 한 30만 섬 있다던데 맞나?”
“32만 7,320여섬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럼 황해, 충청, 강원의 자원 산지들과 연결된 도로들을 지을 때만 군자창의 미곡을 좀 보태 씁시다.”
이지강이 아연실색했다.
“저하! 군자미는 전란에 대비해 선대왕들께서 각별히 모은 것이옵니다. 쉽게 쓸 것이 아니옵니다.”
“그런 것치고는 환상미로는 잘만 쓰잖소.”
세종의 치세 초반은 기근과의 싸움이었다.
향이 빙의하기 전년인 세종 3년에는 기근이 너무 심각하자 민심을 달래기 위해 임금인 세종이 초막살이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곡식이 부족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기관인 의창에서 매해 수십만 석의 곡식이 빠져나갔고, 이를 메우기 위해 창고에 쌓여 있던 군자미가 쓰였다.
그러니까 군자미를 군사 목적 이외의 용도로 쓰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이지강의 생각은 달랐다.
“원래 50만 섬에 가까웠던 군자미가 근래의 기근으로 30만 섬까지 줄었사온데 여기서 군자미를 더 꺼내쓰다니요. 무리한 이야기이옵니다.”
“에이, 30만 섬이면 10만 섬쯤 빼어 써도 괜찮지 않을까.”
이지강의 낯빛이 차가워졌다.
“이미 저하께서 10만섬을 끌어다 쓰셨사옵니다.”
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대장간을 차려 국용을 보태주면 보태준 적은 있어도 군자미를 쓴 적은 없는데?”
“올해 중갑 1만 벌(領)을 생산하기 위해 3만 섬의 미곡이 쓰였고, 승자총과 각종 병장의 생산에 5천 섬이 나갔으며, 석철광과 석탄 광산을 여는 데 1만 섬이 필요했사옵니다. 또 7진을 세우기 위해 백성을 사민하고 진을 차리는 데 3만 5천 섬이 들어갈 예정이고, 이번 강무에 쓰일 예산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2만 섬에 가깝사옵니다. 이를 다 합하면 10만 섬이옵니다. 그래서 창고에는 32만 7,000여석이 있으나 이중 소용(所用)이 정해지지 않은 미곡은 22만 7천여 석뿐이옵니다.”
‘니가 벌린 일 때문에 10만 섬 날아갔잖아!’라는 말에 향의 말문이 막혔다.
“끄응..”
따지고 보면 다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듣고 보니 많이 쓰기는 많이 썼다 싶었다.
하지만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0만 섬. 더 써야 할 것 같은데..”
“?”
“이번 강무에 1만이 동원되는 게 맞소?”
“그렇사옵니다. 삼군도총제부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병 1만이 출정할 예정이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그들을 부릴 생각이오.”
“예?”
이지강이 멍청한 얼굴로 물었으나 향은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자 보시오. 군병 하나가 하루에 먹는 곡식이 얼마요?”
“예전 도량형을 기준으로 2되쯤 되는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
향은 1섬 = 15말 = 150되이던 기존 도량형을 1섬 = 10말 = 10되로 바꾸고 1되를 1L로 규정했다.
그러나 도량형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쌓여 있는 군량과 군량을 배분하는 규칙은 아직 옛 제도를 따랐다.
“그렇소. 내가 계산해보니 2.5되쯤 되더군. 그럼 한 사람이 옛 도량형을 기준으로 한 달에 75되를 먹으니 두 사람이 150되, 그러니까 1섬을 먹겠지?”
“그렇사옵니다..”
“그럼 1만의 병사가 1달에 5,000섬의 미곡을 먹겠군. 10달이면 5만 섬이고.”
“일단은 그렇사옵니다. 헌데 그것은 왜..”
“강무가 끝난 뒤, 병사를 나눠 10개월 동안 도로를 짓게 할 생각이오.”
향이 열 손가락을 전부 펼쳤다.
“도성에서 도로를 지어본바, 아까 언급했던 폭 13미도(m) 도로는 2인 1조로 지었을 때 하루 3미도(m)를 닦을 수 있더군. 그러니 1만 중 2천 정도에게는 돌을 깨고 나르는 일과 막사를 짓는 일을 시키고..”
두 손가락을 접었다.
“나머지 8천을 2인 1조로 만들어 300일 동안 도로를 닦게 하면 무려 3,600대도(km)나 되는 도로를 닦을 수 있소! ”
손가락을 다 접은 향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뭐, 공사가 어려운 구간도 있을 테니 3,000대도(km) 정도가 한계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7진에서 함길도를 거쳐 도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모두 닦을 수 있을 것이오.”
“..”
열이 뻗친 이지강이 입을 다물었다.
‘니가 돈을 잔뜩 써서 통장이 텅텅 비었어!’라고 했더니 ‘마이너스 통장이 남았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지강이 입을 다물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공조판서 이맹균이 이지강을 대신해 말문을 텄다.
“저하, 말씀하신 대로 군졸을 동원한다면 동북면에서 도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닦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잡역에 동원되는 것에 대해 군졸들의 불만이 클 것이 염려되옵니다. 혜량하여주소서.”
‘군인한테 노가다 뛰라고 하면 참 좋아하겠다?’라는 지적에 향이 피식 웃었다.
“그냥 시키면 불만이 없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매일 백미 1근(kg)을 주면 열심히 하지 않겠소? 내가 계산해보니 4만 섬이면 충분하겠더군. 아, 병사들이 쓸 각종 공구도 구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깜빡할 뻔했군. 그게 1만 섬이오. 먹일 군량 5만 섬, 일당 4만 섬, 공구를 매입할 재물 1만 섬. 다 합해서 10만 섬이오!”
“군역을 지는 이들에게 따로 급료(給料)를 내어주시겠다는 말이옵니까?”
이맹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1424년 현재, 조선의 군사제도는 정군과 보인으로 이뤄져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복잡하니 간단히 현대 군대에 비유하자면, 여러 명을 한 조로 짜서 한 사람은 군대에 가고 나머지가 총이나 군복 따위의 물품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급료? 줄 리가 없었다.
이맹균의 입장에서는 향의 이야기가 허공에 재물을 태우겠다는 말로 들렸다.
“저하, 군역은 나라에서 부과하는 역(役)이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이에게 재물을 더 내릴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나라에서 군사로 쓰려 부른 것이지 잡부로 쓰려한 게 아니지 않소. 나라의 녹을 먹는 데다 군역을 지고 있으니 온전히 3근을 주지는 못해도 도로를 열심히 닦을 이유는 있어야겠지.”
향은 ‘부를 때는 국가의 아들, 다치면 느그 아들, 죽으면 누구세요?’라는 한국식 군대를 극혐했으며 조선에서 그러한 문화가 자리잡게 둘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산성 떨어지잖아!’
초중전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높은 생산성, 더 많은 기술자가 필요했다.
아무런 의욕도 없이 시체처럼 일하는 노예형 인간은 쓸모가 없었다.
‘잘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일꾼이 많아지려면 합리적인 거래가 이뤄질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 도로 사업은 그 기반이 될 거야!’
그러므로 향의 입장에서 군사들에게 일당을 주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뒷배경을 모르는 이맹균에게 향의 주장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래도 4만 섬은 좀.. 게다가 운반은 어찌하옵니까? 300일 동안 곡식을 나눠주면 한 사람이 300근(kg)인데 그걸 어찌 옮기겠사옵니까.”
“30일마다 작업에 참여했다는 관인이 찍힌 군표(軍票)를 나눠주고 도성의 창고에서 바꿀 수 있게 하면 되지 않겠소? 그럼 곡식을 옮기는 데 들어갈 품도 적게 들겠지.”
이쯤 되자 이맹균도 말을 잃었다.
향이 진심으로 10만 섬을 태워 도로를 지을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때.
마음을 다잡은 이지강이 앞으로 나섰다.
“저하, 앞서 고한 대로 풍저창에서는 뺄 수 있는 곡식이 없사옵니다. 따라서 올해는 국용으로 쓰자고 하신 5만 섬도 군자창의 군자미에서 빼야 하옵니다. 여기에 말씀하신 10만 섬을 더하면 합이 15만 섬이니, 군자창에는 5만 7천 섬만 남게 되옵니다.”
이지강의 눈이 질끈 감겼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내년도 흉년이 이어져 백성들이 실농한다면 부족한 국용을 메울 방도가 없사옵니다. 그리되면 지금처럼 도로를 닦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깐 도로를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옵니다. 어리석은 소신은 이에 대한 답을 내지 못하겠사오니 저하께서 답을 내려주시길 청하나이다.”
‘내년이 흉작이면 파산인데 어쩔. 도로 한 해 짓고 나라 조질 거냐? 나는 모르겠드아!’라는 이지강의 선언에 향이 웃음을 흘렸다.
“후후.. 호판, 내가 그런 것도 안 따져보고 이리 큰 사업을 하자고 하겠소이까? 다~ 방법이 있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도로 중간마다 역을 세워 백성들에게 적게나마 세를 거둘 것이오. 또 역에 묵거나 밥을 먹을 수 있는 휴게소를 설치해 수익을 낼 생각이오. 이리한다면 도로의 유지에 필요한 재물을 벌 수 있을 거요. 잘 자리 잡는다면 수십 년 뒤엔 도로를 닦을 때 쓴 재물까지 벌충할 수 있겠지.”
향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한 이지강이 신음했다.
“끄응.. 저하. 말씀하신 대로 세를 거둔다면 도로를 유지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사옵니다. 하지만 당장의 국용을 채울 계책은 아니옵니다. 이는 어찌하실 것인지요?”
“내가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세 가지 방도 안에 답이 있소. 계획대로라면 국용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요.”
- 작가의말
1. 풍저창, 군자창, 광흥창
풍저창은 국가 예산, 광흥창은 공무원 월급, 군자창은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였습니다. 소설 속 풍저창과 군자창의 재고는 실록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예컨대 세종 18년 7월 16일, 국용으로 쓴 예산이 5만 7천 280석, 풍저창의 곡식이 12만 3천 300석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2. 조선후기의 1년 예산
한국경제신문 생글생글, ‘대동법과 공납제도의 개혁, 변화 속의 지속성’
3. 조선시대 1섬의 양.
1되 1.8L는 일제 시대 만들어진 일본의 단위입니다. 조선 전기 기준 1되(10홉)는 572.7ml입니다. 따라서 1섬(석) = 15말(두) = 150되(승) = 약 85.9L였습니다.
4. 조선시대 1일 배급량.
선조 25년(임진년) 10월 19일, 당시 호조판서이던 이성중이 "중국군 10만 명이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 한 달 군량이 4만 석이고 세 끼를 먹으면 6만 석입니다. 산골 고을의 곡식들을 순안(順安)으로 옮기려 하나 산골 고을들도 탕갈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2끼를 기준으로 한 조선군의 최소 군량이 하루 2되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 명나라는 2.7되, 일본은 2.5되(평시 1.7되, 전시 2.5되) 가량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일본의 기준인 2.5되를 기준으로 한 달 75되로 계산했습니다. 150되가 1섬이니 2명이 한달에 1섬을 먹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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