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 (124) - 終章
부웅, 날카로운 검날이 아래로 내리꽃힌다.
" 아직도 끝이 흔들린다! 뭐하는거냐! "
사내의 검은 얼핏 보아 깔끔하게 내리그어졌지만 노기사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지 대번에 호통이 날아온다. 사내- 진우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은빛 궤적이 하늘을 수놓는다.
' 이번에는 완벽해. '
" 느리다! 힘이 없어! 그래가지고 누굴 배겠냐! "
진우의 표정이 다시한번 일그러졌다. 고작 단순한 내려치기일 뿐인데 석달이 지나도록 이런 기본기조차 탈출하지 못했다. 말을 배우는 시간조차 아껴가며 검을 휘둘렀지만 도무지 나아질 생각이 없다. 그도 기본기가 중요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본인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트집을 잡혀 끊임없이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자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노기사, 브람스 경은 그 나름대로 탐탁치 않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을 외친다. 100여년 전, 유명한 검사로 이름높은 알베르트 가르뱅이 남긴 가르뱅 식 검술은 기사들 사이에선 굉장히 메이저한 검술에 속한다. 이 검술은 기본기를 마스터하지 않고선 다음 단계를 제대로 익힐 수 없을 정도로 기본기를 매우 중시하는데 이번에 가르치는 꼬마는 진전이 너무 느렸다.
" 허어, 오늘은 여기까지 해두마. 항상 수련을 게을리하지 마라. "
" 수고하셨습니다. "
결국 오늘도 내려치기를 마스터하지 못한 진우는 귀에 박히도록 들은 주의사항을 다시 떠올리며 브람스 경을 돌려보낸 뒤 내려치기를 계속했다. 곁에서 동시 통역을 해주던 렌은 브람스 경이 가버리자 관심없다는 듯 슬그머니 들어가버렸고 마당에는 진우만이 남아 계속 검을 연마했다.
훅! 훅!
검을 내려칠때마다 숨을 딱, 딱 끊어서 검격을 조정하고 리듬을 맞춘다. 옆에서 보면 이제 제법 폼이 잡혔다고 할만하지만 기사들의 눈에는 아직 멀고도 멀었다.
땡그렁!
" 흐아아아... "
한시간쯤 더 휘둘렀을까, 진우는 검을 내동댕이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휘두르는 롱소드는 무게만 3kg에 달하는 것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처음엔 우습게 생각했다가 오히려 검에 휘둘렸을 만큼 초보자에겐 무거운 편이었다. 그것을 두시간이 넘게 휘두를 수 있게 된 것만도 엄청난 발전이었지만 도무지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으니 진우는 앞날이 캄캄했다.
" 아...씨. 나 정말 재능이 없나? "
석달 내내 내려치기만 반복하면서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질 않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그래도 수련을 계속하는 것은 신체능력은 끊임없이 향상되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조차 느끼지 못했으면 진작 때려쳤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기본기가 중요하니 뭐니 하기는 했지만 그놈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몇달이면 마스터해버리고 본격 검술에 입문하는데 이건 뭐 일년 내내 내려치기만 할 기세다.
내가 녀석을 발견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 니가 무슨 세계 최강을 노린다고 재능 타령이냐? 재능이 있건말건 열심히 해. 하다보면 최소한 몸은 좋아지니까. "
" 그래도 기왕 칼을 휘두르는데 잘하면 좋잖아요. "
핀잔을 주었더니 돌아오는 것은 또 투덜거림이다. 그놈 참 징징대기는. 뭐,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내가 보기에도 녀석의 검은 조언자 없이 기본기만 깔짝댄 나보다는 훨씬 좋아졌으니까. 틀이 잡히고, 정말로 검술에 입문한 사람 티가 난달까? 하지만 브람스 경의 눈에 들기엔 아직 날이 멀었다. 기사들은 일반인과 기준점 자체가 틀리니까. 나는 위로하는 차원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 너무 그러지마라. 기사들은 다섯살부터 하루종일 칼만 잡고 사니까. 먹고자고 싸는시간 빼면 온종일 칼질만 연습해도 기사소리 들으려면 13~6년은 걸린다더라. 그런 기사들을 봐왔던 브람스 경이 고작 세달 연습한 네가 눈에 차겠냐? "
" 케엑. 말이 그렇지 어디... "
못믿겠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 녀석. 하지만 사실이 그러니 어쩌겠나. 기사들이 장원이 없으면 먹고 살 수가 없는 이유가 그것때문이다. 그들은 전투 말고는 문자 그대로 아는게 하나도 없다.
" 정말인데? 브람스경, 글도 스물 둘이 넘어서야 배웠어. 그 부친은 검술 수련한다고 평생 글이라곤 자기 이름 석자밖에 쓸 줄 몰랐다는데 그걸 자랑스럽게 말하더라고. 저 양반들 머릿속에 든건 싸우는 법밖에 없어. 아, 하나 더 있긴하지. 주군을 섬겨라. "
" ..... "
녀석은 기가차서 말이 안나오는 모양이지만 실상이 그런데 어쩌겠나. 장원의 관리도 대게 지배인을 고용해 살피게하고 본인은 무술만 파고든다. 덕에 까놓고보면 머릿속에 든 것은 기사나 농노나 별 다를 것도 없는 것이다. 명색이 귀족인데 기사도 기본적인 교양은 있어야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최근의 일로 여전히 기사는 전투력이 우선이지 나머지는 알 바 아니라는 인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 탓에 요즘 젊은 기사들은 예의나 기품을 찾지만 브람스 경처럼 나이 지긋한 기사들은 단순무식한데다 어설프게 명예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별 시덥잖은 일로도 명예가 어쩌구저쩌구 시비를 걸어 사람 목을 잘라버리는 무법자들이다. 또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요즘 젊은 것들은 겉멋만 들어서 큰일이라고 투덜거리는게 일상이기도 했다.
그 세대에선 특이하게도 브람스 경은 예의를 차리며 경우가 있고 인간성이 매우 좋은 축에 드는 희귀한 기사인 것이다. 또한 가족을 위해 주군을 따라 죽지않고 남에게 의탁할 줄도 아는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 리터너리 씨는 그를 꽤나 좋게 생각한다.
" 그렇지만 뭐, 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들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한번 이야기해보지. 몸을 지키려고 검을 배우는거지 기사가 되려고 수련하는게 아니니까. "
기실 그렇다. 특이하게 검만으로 기사로 인정받은 만큼 브람스 경은 검에 대해선 딱딱한 데가 있었다. 아니, 기사가 검을 휘두르지 그럼 뭘 휘두르냐고 물을 지 모르겠지만 세상엔 엄연히 갑옷이라는게 존재한다. 이야기 속에서는 멋진 기사님이 칼 한번 휘두르면 종잇조각처럼 잘라질 지 몰라도 실제 갑옷을 베는 수준의 검사는 세상을 통틀어 천명을 넘지 않을 만큼 드물다. 그것도 사슬갑옷 종류의 이야기고 풀 플레이트를 일도양단할 검사는 한손에 꼽힐 만큼 드물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들도 실전에선 한두번쯤 가능할까 말까한 수준으로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풀 플레이트는 유명한 메이커에서 나온 명품의 경우 작은 성 한채와 맞먹을 만큼 값이 비싸서 기사들조차 풀플레이트를 입는 경우는 드물지만 하프 플레이트나 블레스트 플레이트 정도는 드물지 않은 만큼 갑옷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존재다. 당장 가죽을 가공해 만든 갑옷만 입어도 한두칼 정도는 막아 낼 만큼 질기지 않는가. 사람들이 갑옷을 비싼 돈주고 사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 대부분의 기사들은 한가지 무기에 파고들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다양한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이 요구된다. 기사는 어디까지나 군대를 이루는 한 축으로 단순히 개인의 무력만 높다고 다가 아닌 것이다. 대게 선봉에 서서 돌격하는 중장기병의 역할을 맡기 때문에 기마창술이 중시되며 돌진 이후에 근접전에서 활용하기 위한 기마검술 역시 중요한 요소고 기사대 기사전에서 적의 갑옷을 깨부수고 데미지를 주기 위한 중병기의 활용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기사의 소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검만으로 기사로 인정받기란 드물고 쉽지않은 일인게 당연했고 검에 있어 까다로워 지는 것은 필연이다.
잡담이 길었지만, 뭐 요컨데 검에 대한 고집이 높은 브람스 경은 고용인의 목적을 망각하고 욕심을 부린다는 말이다.
" 아뇨, 괜찮아요. 이대로 계속할래요. "
" 그래? 뭐, 그럼 그렇게 해. 어차피 내가 배우는 것도 아니니까. "
이 점을 지적하고 수준을 맞춰주려고 했더니 청개구리 근성이 발휘된 것인지 그냥 하겠단다. 지가 한다는데 뭐 말릴 필요가 어딨나? 그날 이후로도 녀석의 내려치기는 계속되었고 브람스 경의 눈높이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진우는 평소와 같이 검술을 수련하다 브람스 경에게서 뜻박의 말을 들었다.
" 이제 슬슬 내려치기는 그만해도 될 것 같다. 아, 그렇다고 착각하지마라. 네놈이 잘해서 그만하는게 아니니까. 이렇게 기본기만 잡고 있다간 끝이 없겠어. 나도 명색이 검술 선생으로 왔는데 내려치기만 줄창 시키다 끝낼 수는 없잖느냐. 내일은 쉬고 모레부터 구체적인 수련법을 준비해올테니 하루 푹 쉬면서 기다려라. "
말은 그렇게 하지만 브람스 경의 표정은 이제 그럭저럭 봐줄만하다는 뜻이 훤히 비쳐보였다. 진우는 기쁨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잡은지 어언 석달 하고도 20일, 겨울의 초입에 이르러 마침내 내려치기 하나를 끝낸 것이다.
" 이얏호오오오오오오!!!!! 내가 해냈어, 해냈다고!! "
" 말도 못하는게 좋단다. "
마침내 하나를 이뤄낸 기쁨으로 펄쩍 뛰어오른 진우는 동시통역을 위해 자리잡고 있던 렌의 핀잔에 무안한 얼굴로 찌그러졌다. 평소 궁금하다 싶은 대화는 렌에게 물어보면 동시통역을 해주는 덕분에 크게 불편을 모르는 탓도 있었지만 검술에 매진한다고 언어 공부는 소홀히해서 아직도 일상 회화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도 진우는 마냥 좋았다. 고작해야 내려치기 하나일 뿐이지만 얼마나 고생했던가! 괜히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고개가 뻣뻣해져서 폼을 잡아보고 싶었다. 기실 보람있을 법도 하다. 겉만 멀쩡하지 물같던 몸은 탄탄한 근육으로 덮였고 신체 능력이 처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건 사실이었으니까. 최고라기엔 손색이 있지만 이제 어디가서 꿀릴 몸매는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옷이 조금 불만이었다. 처음에는 좀 헐렁했지만 근육이 붙고 덩치가 커지면서 요즘엔 약간 죄는 듯이 느껴졌다. 한번 불만을 느끼니 수수한 디자인하며 여기저기 마음에 드는게 없다. 마침 내일 브람스 경도 하루 쉬기로 했으니 옷이나 새로 사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근데 돈이 없잖아. '
말이야 좀 몰라도 까짓 마음에 드는 물건을 들이밀면서 돈만 내주면 될 일이지만 물건값은 필수였다. 그는 머리를 굴렸지만 그런다고 없는 돈이 튀어나올 리는 없다. 결국 저녁에 커티스에게 말해 옷값을 받았다. 밥버러지를 보는 듯한 렌의 눈초리에 찔끔했지만 그래도 진우는 마냥 좋았다. 젊은 나이 아닌가?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을 시기이니 멋도 좀 부려보고 싶은게 인지상정이다.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돈을 확보한 뒤 다음날 해가 뜨기가 무섭게 집을 나서는 진우의 표정은 한없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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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고보니 쓸데없는 이야기로 한화 우려먹었군요. 딱히 나올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는데 에그... 다음화는 진도를 쭈욱 빼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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