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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평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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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1.01.16 11:18
최근연재일 :
2011.01.16 11:18
연재수 :
1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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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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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
글자수 :
816,019

작성
10.12.18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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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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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평범? (116)

DUMMY

몇일의 밤을 넘어 몇일의 낮을 넘어 소녀는 멈추는 일 없이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앞에 나타나는 세계는 항상 다른 얼굴로 그녀를 맞이한다.


인적없는 숲 속을 지나기도하고, 황량한 황무지를 넘어서,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을 넘어, 도시를 넘어, 부서져버린 성의 잔해를 넘어, 소녀는 걷고 또 걸었다. 그 속에서 갖가지 사람들의 모습이 소녀에게 다양한 얼굴을 비춰준다.


하루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을을 보았다.


하루는 영주의 탐욕으로 찌부러진 마을을 지났다.


하루는 시체만이 남은 도시를 보았고


하루는 평화로운 도시를 보았으며


하루는 평화 뒤에 숨겨진 어둠을 엿보고


하루는 극한에 몰린 사람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고


하루는 그가 죽은 세상에서 한가하게 삶을 즐기는 자를 보았다.



소녀는 많은 것들을 겪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때로는 은혜를 원수로 보답받고


때로는 잘못된 욕망에 노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맛보며


때로는 광기 사이를 뚫고지나왔으며


때로는 찬사를 듣고 돌아서서 저주를 들었으며


마침내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책의 글귀를 경험으로 이해하는데 이르렀다.



그러한 소녀의 앞에, 마침내 뒤쫒던 군의 흔적이 나타났다.


" 어서오십시오 아가씨. "


스스로를 마지막 안내인이라 밝힌 병사는 그녀를 불타는 도시로 안내했다. 형편없이 부서져버린 성벽 사이로 비명소리와 피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소녀는 멍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많은 모습을 보아왔지만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도시는 처음 보았다.


그녀는 사람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다. 도시는 완전히 제압된지 오래였으며 마음없는 병사들의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추살로 살아남은 자들은 한 줌도 되지않았다. 살아남은 자들 역시 은신처가 발각나는 것은 시간문제. 소녀가 이제와서 열심히 뛰어본들,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무의미합니다. "


안내인은 소녀의 얼굴을 보고 그 사실을 잘라 말했다. 그러나 소녀는 이미 뛰쳐나간 뒤였다. 안내인은 최선을 다해 달렸지만 소녀의 뒤를 뒤쫒기는 무리였다. 소녀는 특별히 싸울 줄은 몰랐지만 선천적으로 훌륭한 육신과 영력을 타고났다. 마나변이를 겪었다고 한들, 노력도 하지않는 일개 병사가 따라잡는건 어불성설이다.


허나 안내인은 꾸준히 달렸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이정표삼아,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결코 멈추는 일 없이 꾸준히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그의 눈앞에 멈춰선 소녀가 모습을 들어냈을 무렵, 도시에 더 이상 살아있는 민간인은 없었다.


안내인은 그녀의 앞에 나둥군 열살 가량의 어린아이의 시체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복부가 창에 찔려 고통속에 허우적대다 죽었을 꼬마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배경에 불과하다.


" 주인님께서 기다리십니다. "


소녀는 그의 말에 줄곳 바라보던 꼬마의 시체에서 눈을 돌렸다. 안내인의 뒤를 따라는 소녀의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다. 거기에 담긴 것은 의문과, 그녀 나름의 확신. 멀고 험한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소녀는 찾던 사람과 만났다.


" 오랜만이구나 루시. "


그가 저택을 나선지 몇 일이나 지났을까. 적어도, 계절이 변할만큼 오래되진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휠체어 위의 사내, 라미른 벨람은 혼자만 다른 시간대를 살아온 것 처럼 머리에 서리가 내렸고 얼굴엔 자글자글한 주름이 많이 늘어서 마치 쉰이 넘은 노인처럼 보였다.


루시는 못본사이 퍽 늙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저택에서의 말이 떠올랐다. 라미른에겐 별로 시간이 없다. 그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 아버님. 제가 들어갈 수 없었던 저택의 방... 기억하세요? "


" 기억하고말고. 너는 그 안에서 내가 숨겨왔던 것을 보았을테지? 그래, 장막 안에 가려진 추악한 진실을 보았겠지. 그때는 참 놀랐어. 너는 그저 가녀리고 얌전한 아이인 줄 알았거든. 설마하니, 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비밀의 방을 덜컥 열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


라미른은 도저히 인간을 대상으로한 잔인한 실험을 했었노라고 자인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항상 보여주었던 인자하고 자상한 얼굴로 태연히 말했던 것이다.


"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목숨이 아닌가요? 남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면서까지 무엇을 원하시는건가요? "


루시는 침착하게 말을 잇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저택을 갓 나왔을 무렵의 그녀라면 흥분으로 할말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세상은 그녀를 변하게 만들었다.


" 내 몸이 영혼을 담기에 비좁다는 것은 들었겠지. 덕에 이렇게 형편없이 늙어가는 것도 말이야. 자기 영혼을 감당하지 못해서 죽어가다니 참 한심한 일이지. "


그는 자신의 몸을 보며 조소하고는 오히려 루시에게 물었다.


" 너는 지금까지 오면서 뭘 느꼈느냐? "


루시는 뜻밖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참만에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각각의 생각을 가지고, 각각의 위치에서 살아간다는걸 느꼈습니다. "


" 흐음. "


라미른은 자신의 의도가 틀렸는지 눈살을 살짝 찌뿌렸다. 허나 그것은 순간일 뿐. 나름대로 수용을 했는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생각대로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있다. 허나 네 말대로 그들은 다양하지. 모두가 생명이란걸 가지고 있지만 그 가치가 모두 같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깨달았을까는 모르겠다만 세상이란, 결국은 최상위의 한 줌의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거든. 가장 앞장서서 문명의 수레를 이끄는 자의 생명과 수레 위에 걸터앉아 그저 묻어갈 뿐인 자의 생명의 가치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때로는 앞장선 한명의 목숨을 위해 수레위의 만명을 생명을 버리는 일이 모두를 위해 더 유익할 수 있는 법이지. 그래, 요컨데... "


라미른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르켰다.


" 나처럼 말이다. "


루시는 생각에 잠겼다. 라미른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 어차피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머리로는 온전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론은 간단했다. 그녀는 지금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고르면 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 아뇨, 달라요. 사람의 목숨은 재각각. 그 무게에 차이는 없습니다. 아버님이 있어서 백만의 사람이 더 오랜 삶을 살아갈 수 있더라도, 지나가는 거지가 아무일도 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그것이 생명의 무게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 어째서? "


" 저도, 아버님도. 살아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있으니까요. 살아있는 것은 가능성.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 신이 우리들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그 순간까지, 무엇을 어떻게 살아왔건 생명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우리들이 무언가를 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명은 존귀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



라미른은 루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 겉의 가녀린 모습과 달리 창 사이로 비치는 마음은 곧고 튼튼해서 결단코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과 같다.


" 좋은 눈을 하게 되었구나. "


그는 진심으로 기쁜 듯,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이곳이 학살의 장소가 아니고 평온한 정원이었다면, 손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소소한 기쁨이 깃든 평화로운 웃음이었다.


" 개념인이라, 원하던 것과는 다르지만 나쁘지 않아. 옛날에 살았던 재미없는 머저리들도 가끔씩은 옳은 말을 남기는군. 건전한 몸에는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라... "


라미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치 개구쟁이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 그러하다면, 너는 어째서 사람을 죽였느냐? 그가 물론 죄를 지었음은 틀림없으나 네 말이 위선이 아니라면, 그의 존귀한 생명을 해쳐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


소녀는 그가 죽였던 목자의 일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고였지만 그녀 나름의 대답을 찾아낸 후였으므로 구차하게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인간의 몸이 그렇게까지 약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떨어내기 위해서 쳤을 뿐입니다. "


" 그렇다고 한들, 결과적으로 너는 그를 죽였지.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너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 듯하구나. "


" 그가 저를 해치려했으니까요. 그의 생명이 존귀하듯, 저의 생명도 존귀합니다. 그가 저의 생명을 존중해주지 않겠다면 저 역시 그의 생명을 존중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가능하다면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짓는게 가장 좋겠지요. "


망설임없는 루시의 말에 라미른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편히했다.


" 너는 비로소 완전해졌구나. "


마치 최고의 작품을 완성한 장인과 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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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무슨 노인이냐 하실지 모르겠는데 세계관내에서 서른 넘으면 중년이고 쉰이면 죽을날 받아둔 노인이라는걸 참고사항으로 첨부합니다.


이제 평범? 파트도 종장에 다가가는군요. 남은 화수가 적고 정리할게 많은만큼 다음편부터는 다소 늦어질 듯 합니다.


참고로 120화에 평범? 파트가 끝난다고 끝이 아닙니다.


최종장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시길...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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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평범 (131) - 終章 +1 11.01.03 618 7 9쪽
130 평범 (130) - 終章 +2 11.01.02 589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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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평범 (122) - 終章 +1 10.12.25 656 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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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평범 (120) - 終章 +3 10.12.22 674 9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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