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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715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03.02 00:13
조회
2,730
추천
52
글자
9쪽

살육에 취하다

DUMMY

시이나 덕분에 이 세계에 대한 것은 대충 알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가 마왕이라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다. 나는 내 의지로 이 역할을 부여받은 게 아니라 억지로 떠넘겨진 것이었으니까.


나는 시이나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집을 나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단 서부 평야지대에서 성벽 사이에 위치한 농작지로 ‘전이’했다.


전이마법은 기본적으로 한 번 가본 곳, 혹은 시야에 보이는 곳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가본 적이 있거나 시야에 보이기만 한다면 갈 곳을 상상하고, 마법을 발동하는 것으로 손쉽게 먼 거리를 이동하는 편리한 마법이었다.


나는 전이마법을 몇 번 연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트레아 왕국의 북부 산맥지대.


그곳에는 최근 들어 마구잡이로 생겨난 짐승형 마물들이 여행자를 습격한다고 했다. 여담이지만 마물과 마족의 차이는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로 갈렸다.


마물은 일반적인 짐승과 별 다를 게 없다. 차이가 있다면 그 위험도겠지.


타이밍 좋게도 내 앞에 무리를 지어서 몰려 있었다. 검은 개의 형태를 가진 그것들은 누군가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나를 바로 눈치 채고 으르렁거렸다.


내 힘이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할 좋은 기회였다. 물론 마안을 사용하면 이 정도 하급 마물은 나ㅡ마왕에게 강제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래서야 아무 의미가 없겠지.


내가 접근하자, 마물들은 나와 포위되었던 사람을 가두는 식으로 둘러쌌다.


놀랍게도 나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흰 모자 밑으로 보이는 적당한 길이의 머리는 밤에도 빛나는 은색. 비에 젖어서 백색의 재킷과 스커트가 비쳐보였다. 가슴은 시이나보다 조금 작았다.


내 가슴 정도까지 오는 키의 소녀는 대뜸 항의했다.


“왜 방해한 거죠? 이 정도는 저 혼자서도 문제없었어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원거리 마법 이외의 것도 실험해볼 생각이었다.


손을 펼치자 저 마물들보다 더 짙은 검은색으로 빛나는 장검이 나타났다. 오로지 내 마력으로만 만들어진 검은 섬뜩한 날을 두르고 있었다. 나는 그걸 잡고 가볍게 몇 번 휘둘러보았다.


“잠깐만요. 지금 제 얘기ㅡ”


나는 마물들 한가운데로 돌입했다. 달려드는 마물 하나의 몸을 손쉽게 꿰뚫고 나온 검의 끝에는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흐름에 맡겨 몸을 움직였다. 베고, 찌르고, 피하고, 밟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의 몸은 충실하게 움직여주었다.


내 검이 획을 그을 때마다, 마물 서너 마리가 두 동강이 났다. 검 끝을 내렸을 때는, 그 많던 마물들이 전멸해 있었다. 사방에 피 냄새가 진동했고 마물들의 몸뚱이에서는 내장이 흘러내리며 김을 모락모락 만들었다.


“하아. 하.”


이 정도 움직였다고 해서 숨이 차지는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몸이, 가슴 부근이 뜨거웠다.


재미있다. 죽이는 게 재미있다. 보통은 이런 걸 미친 생각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런 미친 생각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죽일 때만큼은 총탄에 죽었을 터인 내가 이제는 살아있다는 감각이 너무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확실한 생과 사가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그 결과를 결정하는 건 나다. 그러니 그 감각의 규모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사실이다. 나는 살고 저것들은 죽었다. 나는 살아서 움직일 수 있고 저것들은 사지를 잃었다.


이 붉게 물든 광경은 나의 작품이다. 나만의 작품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냈다.


그래. 지금 이 순간, 나는 진정한 의미로 살아있었다. 다른 생명을 취하며 내 생명의 존재를 계속 확인하려 했다. 이전 세계의 살육이 따분했다면 이건 재미있다.


나는 그렇게 또다시 살육에 취해있었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환희는 엄청나다. 수많은 문장으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끌어낸다. 그 중에는 벌써 살육이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나의 검 끝이 은발의 소녀를 향했다.


“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했지?”


소녀는 고개를 꼿꼿이 하고 나를 응시했다.


“그럼 내 상대를 해주지 않겠어? 여기에서 끝내기엔 너무 시시하거든.”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의 예리한 검이 소녀의 피를 뒤집어쓰는 것을. 맑은 소리를 내는 저 목을, 노골적으로 비쳐 보이는 가슴을 아무 저항 없이 가르는 것을.


아름다울 것이다.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ㅡ알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상대해드리도록 하지요.”


은발 소녀가 내가 했던 것과 흡사한 방식으로 무기를 소환했다. 내 것과 대비되는, 백색의 검 두 자루였다.


나는 예고도, 준비동작도 없이 소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흑과 백이 맞부딪힌다. 소녀는 자유자재로 쌍검을 휘둘렀다.


내 목, 가슴, 다리를 정확히 노린 베기가 날아들었다.


지금은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하급마물들처럼 어중간한 공격이 아니었다. 하나가 적중하기만 해도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양손을 사용하는 건 어렵기 마련이지만 연달아 팔을 휘두르면서도 소녀의 균형은 흐트러짐이 없다.


내가 검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흘리거나 받아내자 소녀가 말했다.


“당신, 꽤 하네요.”


나는 대답 대신 장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걸 정면으로 받아내려던 소녀가 흠칫하더니 옆으로 피했다. 나의 일격은 단순히 허공을 벤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저만치 앞에 있던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ㅡ숲의 일부분이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박살이 났다.


나도 모르게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대로 내 검을 받아냈더라면 소녀의 몸이 잘 익은 토마토마냥 터져 없어졌겠지. 방금 일격엔 특별히 마력을 조금 담아 보냈다. 그 짧은 시간에 그걸 감지하다니.


속으로는 불평 가득한 소리를 내뱉고 있었던 나였지만, 싸움의 밸런스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나의 검이 소녀가 서있던 공간을 갈랐다. 소녀는 그것을 가뿐히 피하더니, 아직 허공을 가르는 중인 내 검이 만든 빈틈 사이로 날카롭게 치고 들어 왔다.


그 와중 엉뚱한 곳을 베고 있던 내 칠흑의 검. 그것은 갑자기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에 튕겨나간 것처럼 방향을 180도 바꾸어, 가공할 만한 속도를 붙여가며 연약한 육체를 집어삼키려 했다. 역시나 여태 평정을 유지해 온 소녀의 적색 눈에도 당황이 번졌다.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는 두 검을 교차시킨 채로, 소녀는 내 기이한 공격을 겨우 막아냈다. 무거운 공격을 받아낸 가벼운 몸이 그 반동에 저만치 나가떨어진다.


나는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가볍게 쥔 손잡이를 고쳐 잡고ㅡ탐스러운 새하얀 허벅지부터 가녀린 얼굴 까지 깔끔하게 절단할 생각으로 조금 기대감에 부푼다.


팡!


폭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주위를 뒤덮었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소녀의 잔재주. 연막탄이라도 터뜨렸겠지.


난 그걸 대수롭지 않게 한 번 크게 휘둘러 없애버렸다. 재빨리 적의 위치를 확인, 포착.

소녀는 도망칠 생각은 없어보였다. 어느 검술일지 모를 자세를 잡고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공격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소녀가 방어 일변도로 전략을 바꿨을 가능성에 조금 김이 샜다. 전투 경험을 얻는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이런 놀이에 굳이 어울려 줄 필요도 없다. 슬슬 피를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 소녀를 한 번에 죽일까 고민하느라 잠깐 빈틈을 보였다.


그걸 놓치지 않고, 소녀가 위로 도약했다. 수십 미터를 점프했다는 건 다리를 마법으로 강화한 결과인가. 검을 마법으로 소환한 시점에서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뻔한 사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저 위치. 소녀는 가속을 이용해 위에서 내리꽂을 생각이었다. 아니면 내가 했던 것처럼 검에 무슨 장치를 해두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생각이 물렀다. 설마 이 몸이 바보같이 저걸 그대로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가.


허공에 뜬 상태의 무방비한 목표를 찢는 건 일도 아니다. 아예 없애버리는 건 더 쉬웠다.

나는 한 손을 들었다.


“버스ㅌㅡ"


하지만 그 짧은 주문을 다 외기도 전에, 공중에서 소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발동시간이 극히 짧은, 단거리 텔레포트ㅡ


“뒤가 비었어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목에 백색의 검신이 닿아있었다.

소녀는 전혀 숨이 차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정도면 만족하셨나요?”

“...”


내가 말이 없자, 검이 내려갔다.


“당신, 마법사군요?”


소녀는 두 자루의 검을 손에서 놓았다. 검들은 지면에 닿기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


머리가 식자, 내가 조금 불합리하게 싸움을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 이유도 없이, 저 소녀를 죽이려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으니까.


“미안하군. 이런 거에 어울리게 해줘서.”


소녀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도 좋은 연습이 됐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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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세계 정복의 시작 +2 19.03.06 2,000 42 10쪽
10 능력 판정을 받다 +3 19.03.06 2,092 37 10쪽
9 피로 얼룩진 계약을 맺다 +2 19.03.04 2,213 39 8쪽
8 소녀는 순수하지 않다 +3 19.03.04 2,402 44 10쪽
7 퀘스트를 제안 받다 +3 19.03.03 2,504 45 7쪽
» 살육에 취하다 +8 19.03.02 2,731 52 9쪽
5 거처를 얻다 +8 19.02.28 2,975 50 10쪽
4 사람을 죽이다 +14 19.02.26 3,420 56 9쪽
3 아인종 소녀와 만나다 +10 19.02.25 4,125 56 9쪽
2 이세계로 전생하다 +9 19.02.24 5,073 74 13쪽
1 한 번, 죽다. +10 19.02.24 6,954 7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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