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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569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07.22 00:47
조회
647
추천
13
글자
10쪽

첫 번째 함락

DUMMY

“이런 젠장... 젠장! 젠장할!”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격소리가 귀를 울린다. 메르히 소령은 남작의 성에 주둔하라는 명령을 좋다고 넙죽 받아들인 걸 뼛속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굉음이 한번 터질 때마다 온 성이 흔들리는 탓에 현기증까지 날 지경이었다.


사람을 단순에 붉은 살점 덩어리로 바꿔버리는 마법이 계속해서 날아드는 덕분에 제대로 된 반격은 하지도 못하고 희생자만 불어나고 있었다. 적군이 충차나 사다리 따위를 이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해둔 뜨거운 물이나 궁병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본국으로부터의 증원은 없는 거냐! 저런 대군을 상대해서야 승산이 없어! 게다가 이 폭격은 또 뭐냔 말이다!”


이미 얼얼해진 손으로 주먹을 쥐고 책상을 내려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지휘실 밖에 서있던 병사가 뭔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소령님. 왕성에서 직접 새로운 명령서가 도착했습니다.”

“뭐? 어딨어, 당장 줘보게!”


반가운 소식을 듣고 소령이 부리나케 병사의 손에서 종이봉투를 빼앗았다. 왕실의 문장이 찍혀있으니 분명 국왕이 직접 하달한 명령서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령이 왔다고 하면 분명 지원을 보낸다고 하는 게 아닐까.


기대감에 부풀어 빳빳한 종이에 쓰인 내용을 재빨리 읽어 내려가던 소령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읽은 게 아닌지 다시 정독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추가병력을 보낼 수는 없으니... 끝까지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고?”


메르히 소령은 자기도 모르고 명령서를 잔뜩 구기고 있었다.


“이건... 여기서 죽으라는 명령이 아닌가!”


그럴듯한 소리를 잔뜩 써놨지만 결국엔 아무 힘도 되어줄 수 없다는 내용이다. 넋을 놓고 있기도 잠시, 다시 성을 뒤흔드는 굉음에 소령의 정신이 돌아왔다.


“이런 미친 짓에 어울려줄 수 있을까 보냐!”

“소령님?”


군이라는 조직에 개처럼 충성했지만 돌아온 것은 먹다 남은 뼈다귀처럼 버려버리는 대우다. 새로 즉위한 알레인 국왕을 믿고 귀족 숙청에 적극 협조한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래서야 차라리 하루라도 일찍 제국으로 망명하는 게 나았을 정도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왕국기사단은 그대로 유지한 채 나머지 귀족체제를 전부 없앤다는 것 자체가 수상쩍었던 것이다. 평등은 무슨 평등이냐. 지그문드, 그 빌어먹을 자식. 이래서야 지오돌프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결국 자신도 정치장단에 놀아났을 뿐이구나, 라고 한탄하며 소령은 물었다.


“성에 남은 현존 병력은 어느 정도지?”

“국경의 패잔병을 합쳐서 600입니다, 소령님. 성벽 안쪽으로 피신한 주민들은 대략 450입니다.”

“요컨대 천명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건가...”


소령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 제국군의 마법사들은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폭격마법을 마구 쏘아대고 있다. 아예 성을 가루로 만들 작정이다.


이미 성벽은 거의 무너진 거나 마찬가지. 폭발로 인해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까지 하고 있다. 저런 마법에 대항할 수 있는 마법사는 하나도 없었다.


있는 건 기병과 보병, 그리고 조금의 궁병들 뿐.


승산이 없는 싸움에 부하들을 말려들게 하는 건 지휘관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소령은 생각했다.


“전 부대에게 전해라. 투항할 의사를 밝힐 테니 전투를 중지하고 폭격을 피해 몸을 숨기라고.”

“예? 하지만 소령님!”

“조금 있으면 적은 폭격을 멈추고 접근해오겠지... 하지만 성벽이 제 기능을 상실한 지금, 궁병을 배치시킬 수도 없고 저만한 숫자의 대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수도 없다. 이미 성은 포위되고 있어. 후퇴도 무리다.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소령님. 저들은... 저 놈들은...”


병사의 눈에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생리적 혐오가 비춰지고 있었다.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건 메르히 소령 자신도 마찬가지겠지.


“저 놈들은 단순한 제국군이 아니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포로로 받아줄지도 의문입니다! 인간조차 아닙니다, 저 앞에 서있는 놈들은 전부 마족 놈들이라고요!”


바르포르도. 그 흡혈귀 여자의 악명 높은 소문은 메르히 소령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제국의 충실한 번견으로, 제국에 거스르는 것은 사람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하나같이 철저하게 짓밟고 파괴하는 정신 나간 여자다.


저 암캐가 나선 전장은 같은 편조차도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의 지옥도가 된다고 했다. 타다 남은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짙게 대지에 스며들 정도로. 그런 년을 상대로 투항을 요청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소령은 알았지만 그것 말고 뾰족한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개죽음을 당하라고 명령할 생각은 없다. 교섭은 나 혼자서 할 테니 투항하겠다는 의사만 밝히게.”

“그런... 소령님! 지휘관을 홀로 보낼 수는ㅡ”

“괜찮네. 어떻게든 되겠지.”


메르히 소령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지만 끝까지 손의 떨림은 감추지 못했다.




“중장님. 성의 왕국군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벌써?”


성이 박살나는 걸 구경하고 있던 바르포르도는 고개를 돌렸다.


“중장님과 얘기를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폭격을 중지해. 이제부터가 재밌어질 땐데, 포기가 빠르구나?”


의외라고 한다면 적장이 홀로 성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부하들은 눈치 빠르게 교섭용 테이블이나 의자 따위를 서둘러 준비하고 있다.


말에서 내려 의자 하나에 걸터앉은 바르포르도가 기다리고 있자 왕국군의 장교복을 입은 남자가 병사들에 연행되어 왔다.


남자가 무어라 자신의 이름과 계급을 밝혔지만 바르포르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견장의 계급장을 보고 소령이라는 걸 안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합지졸의 지휘관이라고는 해도 적장으로 보고 있었지만. 몇 번 뜨거운 맛을 보여줬다고 해서 바로 꼬리를 만 시점에서 흥미를 잃은 것이다.


“그래서 소령. 하고 싶다는 말이라는 건 뭘까?”


자신의 소개도 하지 않고 꼰 다리를 바꾸며 묻는 바르포르도의 태도에 소령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말한다.


“저희 부대는 완전한 패배를 인정합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성을 넘겨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제 관리 하의 병들과 시민들의 안전은 보장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얌전히 항복할 테니 해치지는 말아 달라, 라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잠시 조용히 있던 바르포르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보고 있는 메르히 소령의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져간다.


“혼자 나와서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소령은 농담이 특기네? 내가 그 제안에 응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소령의 병력으로는 제대로 된 저항은 하나도 할 수 없어. 본인이 생각해봐도 조금 이상하지 않아?”


혼자 계속 웃던 바르포르도는 웃음을 겨우 그치고 턱에 손을 괴었다.


“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건 아니었을 테고. 아니, 알고 있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목숨 구걸을 하러 나온 거야? 그러면 그 도박은 틀려도 한참 틀렸어, 소령.”

“부, 부디 재고를 부탁ㅡ”

“그래도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으니 빈손으로 돌려보낼 순 없지. 소령, 좋은 걸 알려줄게. 네가 걱정하는 저 성 안의 사람들의 운명 말이야.”


바르포르도가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는다.


“내 여단에는 특이한 놈들이 많거든. 나야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굳이 인육을 고집하는 특이한 놈들이 있어. 포로로 잡아봤자 수고만 늘어나니까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좋긴 해.”

“하지만 저 안에는 무고한 시민들도 있단 말입니다! 제국군은 그런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야만적인 군이 아니었을 터입니다!”


애원하다시피 소령이 외치지만 바르포르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포함해서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해, 소령. 내가 추천하는 건 말이지, 내 병들이 들어오기 전에 자살하는 거야.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건 많이 고통스러울 테니까. 여자와 아이들부터 죽여두렴. 이 전쟁통이 되면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부하를 하나하나 다 통제할 수도 없어.”

“그런...”


소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병사들이 그를 제지했다.


“안심해. 여기서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 편이 더 재미있을 테지.”


바르포르도는 천천히 테이블을 따라 걸어 소령 옆에 섰다. 차가운 손가락이 소령의 얼굴에 닿자 상대가 움찔, 하는 반응을 즐기며 그녀는 말했다.


“이게 우리의 전쟁이야. 힘없는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힐 수밖에 없어. 우리도 강자 앞에서는 똑같은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조차도 기대되는 걸.”

“하, 하지만 제국도 기껏 손에 넣을 왕국을 불 지른다니 그런 짓은...”

“있잖아, 소령.”


바르포르도가 강제로 그의 얼굴을 잡아 자신과 눈을 맞추게 한다.


“이 전쟁은 뭔가를 얻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 아니야. 이전부터 거슬리던 벌레 소굴을 청소하러 온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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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승전 +3 19.08.15 612 15 10쪽
57 기폭 +3 19.08.11 561 12 9쪽
56 습격 +2 19.08.08 588 13 9쪽
55 초전 +1 19.08.03 623 13 9쪽
54 군복 +2 19.07.25 602 12 10쪽
» 첫 번째 함락 +1 19.07.22 648 1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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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환청 +1 19.07.14 660 14 10쪽
50 아침 +3 19.07.11 741 17 10쪽
49 잃어버린 기억 +2 19.07.06 751 33 9쪽
48 노트북이 고장나서 잠시 휴재합니다 +3 19.06.18 818 12 1쪽
47 빙의 능력자 +1 19.06.06 765 17 9쪽
46 살인 청부업자(11세) +1 19.06.02 808 17 9쪽
45 대(對)인간병기 +1 19.06.01 798 17 11쪽
44 전쟁의 피스 +1 19.05.30 808 17 11쪽
43 밤하늘 +1 19.05.26 869 21 10쪽
42 신화의 괴물 +2 19.05.25 903 20 11쪽
41 선전포고 +3 19.05.22 948 24 10쪽
40 헬하운드와 펜리르 +1 19.05.19 968 19 11쪽
39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 +2 19.05.17 936 23 8쪽
38 다크엘프 +2 19.05.16 1,014 22 10쪽
37 시찰 +1 19.05.12 1,007 23 9쪽
36 목적과 이유 +2 19.05.11 1,065 24 9쪽
35 전쟁의 준비 +4 19.05.09 1,132 24 9쪽
34 네이아르 백작 +2 19.05.06 1,157 29 10쪽
33 죄의 운반 +2 19.05.05 1,201 29 9쪽
32 유일한 생존자 +7 19.04.25 1,222 32 10쪽
31 앞으로의 연재 공지 및 1권 후기 +3 19.03.25 1,447 21 1쪽
30 모두 죽었다 +4 19.03.25 1,411 3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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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명령을 내리다 +4 19.03.23 1,396 35 8쪽
27 연회는 시작되려고 했다 +2 19.03.23 1,448 37 9쪽
26 선배의 텃세는 통하지 않는다 +2 19.03.22 1,403 34 8쪽
25 한밤중의 불청객이 찾아오다 +6 19.03.20 1,524 3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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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몰살은 성공적이었다 +6 19.03.10 1,722 36 8쪽
13 도적 소탕전을 시작하다 +3 19.03.09 1,778 3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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