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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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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593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05.06 00:15
조회
1,157
추천
29
글자
10쪽

네이아르 백작

DUMMY

페르난도 폰 네이아르 백작은 오랜만에 왕성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대가 있었을 시절엔 부름을 받지 않아도 자주 왕래하곤 했지만, 좌천되고 나서는 처음으로 밟는 왕도였다.


“많이 변했군...”


일부러 말이나 마차를 사용하지 않고 걸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왕도에 도착하고 나서 처음 보인 건 아름답게 장식된 광장이 아니라 을씨년스러운 공터였으니까.


“그럼 다음 사형을 집행하겠습니다.”


머리를 깔끔하게 빗은 기사가 말하자마자 보란 듯이 단두대에 끌려가는 건 그와도 면식이 있는 남작이다.


이른 아침인데도 꽤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있었다. 그들은 초췌한 얼굴의 남작에게 돌을 던져댔다.


“죽어라, 이 악마 같은 놈!”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해? 지옥에 떨어지라고!”


백작은 그 중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광장을 벗어났다.


왕도에 한동안 출입이 없었던 게 이런 식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줄이야. 암살당한 국왕에 조금이라도 연이 있던 귀족이 전부 숙청당하고 있다.


“자... 잠깐... 나도 좋아서 그 놈에게 아부한 게 아니라고...!”


발에 쇠사슬을 찬 남작이 애원하지만 사형집행인도, 기사도, 아니 그 곳에 있는 사람 전원이 아무 신경 쓰지 않았다.


“잠ㄲ...!”


철컹.


사형장의 이슬이 된 목은 저걸로 몇 개째일까.

네이아르 백작은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정권의 몰락. 새로운 권력의 탄생.

그게 단 하루 만에 이루어졌다. 단 한 명의 소년에 의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페르난도 폰 네이아르 백작 맞으십니까?”


왕성의 정문에서 그런 질문을 받고 나서야 백작은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왕국기사단의 문장을 가진 기사 둘이 경비병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맞네. 국왕의 부름을 받고 찾아오게 되었네.”


혼란의 시기에 놓인 건 그 하나의 목숨이 아니다. 행여나 떨리지 않게 목에 힘을 주고 말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기사들의 표정에 아까 같은 험악함은 보이지 않았다.


“국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작. 이 쪽으로.”


경비병은 그의 작위를 듣고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기사 하나가 손짓하자 바로 큰 문이 열리고, 백작은 왕성의 안쪽으로 안내 받았다.


여자 기사는 무뚝뚝하게 앞을 걸었다. 백작이 종자도 없이 찾아왔지만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배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말을 걸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면 떨리는 마음이 가라앉으련만, 아무 말 없이 걷는 기사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자니 마음이 계속해서 착잡해졌다.


“많이... 변했군.”


네이아르 백작은 그저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누가 들으면 무슨 소리냐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왕성은 수십 년간 거의 바뀌지 않았으니까.


세밀한 조형물이 세워진 분수도, 계절에 상관없이 이쁘게 자란 꽃과 나무들도 그대로다.

뭔가 바뀌었다고 한다면 그건 이곳이 아니라 본인일 것이라고 백작은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바깥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알현실의 외부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더 웅장하게 바뀌어 있었다. 수년간 국고를 탕진한 결과다.


그의 사랑스러운 딸을 죽이려 한 놈이 이걸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국왕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백작.”


보통 알현실을 들릴 때 대기하는 방에 있을 필요도 없었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온 덕분인지 금으로 빛나는 문은 바로 열린 것이다. 한 나라의 수장을 만나는 것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보디체크도 없다.


백작은 질문하지 않고 흑색 카펫 위를 걸었다. 그의 안내역을 한 기사도 밖에서 대기.

넓은 알현실에는 단 두 명밖에 없으니 걸음소리가 괜히 크게 울렸다.


서른 걸음 정도를 두고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고개를 숙였다.


“페르난도 폰 네이아르입니다.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국왕 폐하.”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자니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자신의 어깨에 손이 얹어졌다.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백작.”


국왕이 흔히 입는 로브를 걸친 것 외에는 전혀 꾸미지 않은 전 왕국기사단 단장이자 현 국왕. 지그문드 폰 알레인은 손사래를 치며 백작을 일으켰다.

기사단장 시절에 허리에 차고 다니던 애검도 여전했다.


“하지만, 국왕의 자리에 오른 이상...”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 말의 뜻을 읽지 못해 고개를 들자 알레인 국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권위를 내세울 의향은 없다는 겁니다, 네이아르 백작. 이렇게 둘만 있을 때는 말도 놓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옛날처럼, 말이죠.”

“...자네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지그.”


몰락가문에서 태어나 검 하나로 1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기사단장에 올랐던 청년.

하라는 대로 말을 놓았지만 지그문드 폰 알레인은 이전 같으면서도 좀 다른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게 뭔지 백작이 생각할 틈도 없었다.


“이 정도의 소란을 일으켰으니 분명 제게 심경의 변화가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겁니까.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죠, 백작.”


즉위한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국왕, 아니 지그문드는 능청스럽게 말을 넘겼다. 하지만 백작은 물어야 했다. 가슴에 품은 질문을 하지 않고는 그의 가문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나만 살아남은 건가?”


국왕의 시선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게 느껴졌지만 백작은 굽히지 않았다.


“고위 귀족들은 전부 처형당했어. 지오돌프 놈에게 억지로 협력한 자들조차 끌려가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벌하지 않는 건가?”

“오랜만에 뵙는 자리입니다, 백작. 꼭 여기서 그런 얘기를 꺼내셔야 하겠습니까?”

“부탁이네.”


네이아르 백작을 바라보는 지그문드의 눈이 날카로워지나 싶더니 그건 곧 사라졌다.


“당신은 억지로라도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긍지는 기사도의 일품입니다. 그걸 버리는 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소년... 때문인가?”

“각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그 분께서 저를 이끌어주신 것도 있습니다. 미리 준비해놓으신 밑 작업을 무시하는 건 부하의 도리로써 어긋납니다.”

“부하...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의외의 말에 백작의 기세가 흐트러졌다.

알트레아 왕국의 국왕ㅡ일국의 수장이 부하를 자칭할 정도의 연유가 있다는 것인가. 그 모험자 소년이 의뢰를 완수하고 꺼낸 말은 바로 믿기 힘들었지만 이제 그 말에 하나의 거짓이 없음은 확인했다.


“물론 그분의 명이 아니었다고 해도 백작을 다른 귀족 쓰레기들과 동일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을 겁니다.”


지그문드 전 기사단장의 눈은 어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은 그 눈에 담긴 것에 조금 오한을 느꼈다. 더 이상 올곧은 눈이 아니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찾아옵니다. 찾아왔습니다, 백작. 핍박받는 나날은 이제 끝입니다. 되갚아줄 시대가 돌아왔습니다. 왕국의 진정한 힘을 보일 시대가 온 겁니다.”

“되갚아준다니... 이미 지오돌프는 처리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쓰레기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것들이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기에 앞서서 국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 위대한 제국조차 손을 대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저건 광인의 눈이다.


자신을 포함해 주위를 모두 불살라버릴 광인의 눈이었다.


“지그문드... 자네...”


백작이 말을 잃었다.


“슬슬 각하께서 명하신 시간입니다. 잠시 저를 따라 와주시겠습니까, 네이아르 백작.”


지그문드는 알현실 왕좌 뒤에 마련된 뒷문을 열었다.


“왕궁도서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리 왕성이라지만 호위 하나도 없이 국왕과 백작이 복도를 걸었다. 미리 명해놨는지 사용인 한명도 없었다. 아마 보안을 위해서겠지.


지그문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두 번 도서관의 문을 노크했다.


“페르난도 폰 네이아르 백작을 데리고 왔습니다, 각하.”


그러자 문이 바로 열렸다. 그 문 뒤에 서있을 사람을 생각하던 백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도 없다만?”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랜만에 잠깐이나마 이야기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백작. 그럼.”


인기척이 없는 도서관을 향해 경례를 올려붙인 현 국왕, 지그문드 폰 알레인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여기서 사람을 찾으라고 해도...”


백작은 자신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림자가 늑대의 형태를 갖춰 그의 앞에 걸어 나오고 나서야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마... 마물!”


검을 꺼내려 했지만 오늘은 아무 무기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단순한 마물이 아니다. 그가 30년 더 젊었다고 해도 쉽게 쓰러뜨릴 수 없는 수준의 괴물이다.


“...”


늑대들은 백작이 당황하는 건 안중에도 없는지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백작은 뭔가에 홀린 듯 그 뒤를 따랐다.


바보 같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치려고 해봤자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걸 억누른 채 늑대를 따라가던 백작은 불현 듯 멈춰 섰다.


“오랜만이군. 네이아르 백작.”


검은 마물들이 걸어간 곳에는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서있었다.


“딸과 함께가 아닌 건가? 뭐, 그것도 그런가.”

“자네는...”


검은 코트를 입은 소년은 애완동물을 대하기라도 하듯 허리를 굽혀 늑대들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류셀...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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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신의 사자 +1 19.08.25 560 1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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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제국의 침공 +1 19.07.18 690 1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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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노트북이 고장나서 잠시 휴재합니다 +3 19.06.18 819 12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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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살인 청부업자(11세) +1 19.06.02 808 17 9쪽
45 대(對)인간병기 +1 19.06.01 799 17 11쪽
44 전쟁의 피스 +1 19.05.30 809 17 11쪽
43 밤하늘 +1 19.05.26 869 21 10쪽
42 신화의 괴물 +2 19.05.25 903 20 11쪽
41 선전포고 +3 19.05.22 949 24 10쪽
40 헬하운드와 펜리르 +1 19.05.19 968 19 11쪽
39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 +2 19.05.17 936 23 8쪽
38 다크엘프 +2 19.05.16 1,014 22 10쪽
37 시찰 +1 19.05.12 1,007 23 9쪽
36 목적과 이유 +2 19.05.11 1,065 24 9쪽
35 전쟁의 준비 +4 19.05.09 1,132 24 9쪽
» 네이아르 백작 +2 19.05.06 1,158 29 10쪽
33 죄의 운반 +2 19.05.05 1,201 29 9쪽
32 유일한 생존자 +7 19.04.25 1,222 32 10쪽
31 앞으로의 연재 공지 및 1권 후기 +3 19.03.25 1,447 21 1쪽
30 모두 죽었다 +4 19.03.25 1,411 35 8쪽
29 피의 연회가 열렸다 +3 19.03.24 1,418 38 10쪽
28 명령을 내리다 +4 19.03.23 1,396 35 8쪽
27 연회는 시작되려고 했다 +2 19.03.23 1,448 37 9쪽
26 선배의 텃세는 통하지 않는다 +2 19.03.22 1,403 34 8쪽
25 한밤중의 불청객이 찾아오다 +6 19.03.20 1,524 36 9쪽
24 이제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19.03.20 1,467 36 8쪽
23 금의환향하다 +3 19.03.19 1,523 38 8쪽
22 모두 붉게 물들었다 +4 19.03.18 1,518 37 8쪽
21 던전의 주인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 19.03.17 1,529 37 8쪽
20 한때 사람이었던 것을 만나다 +3 19.03.16 1,567 38 8쪽
19 광맥의 던전에 가다 +3 19.03.15 1,548 37 8쪽
18 그는 시비 걸어야 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 +2 19.03.12 1,562 37 9쪽
17 사슬은 묶었다 +3 19.03.12 1,604 43 7쪽
16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2 19.03.11 1,606 40 8쪽
15 대련을 하다 +2 19.03.11 1,727 37 8쪽
14 몰살은 성공적이었다 +6 19.03.10 1,722 36 8쪽
13 도적 소탕전을 시작하다 +3 19.03.09 1,778 3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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