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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붉은머리 에아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4.05.08 15:28
최근연재일 :
2024.06.20 22:40
연재수 :
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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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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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글자수 :
25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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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5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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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변화의 꼬리 (3)

DUMMY

돌주먹을 시작으로, 다른 씨족들도 홀 다르에 속속 도착하게 되었다.

우두머리가 직접 자녀를 끌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장남 혹은 장녀가 호위 전사들을 대동하고서 오는 일도 있었다.

하여 각 무리의 머릿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넷 정도였고 아무리 많아도 다섯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네 땅의 특산품을 들고 왔다. 모피와 향료, 염장한 고기 혹은 화초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북해 근처에 살고 있는 씨족의 경우에는 남다른 선물을 들고 왔다.


"사흘 전에 잡은 것들이오. 지금이 가장 먹기 좋을 때이니 상하기 전에 어서 드는 게 좋을 거요."


홀 다르는 내륙에 위치해 있다 보니 어패류를 쉬이 볼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 때문에 브레고아는 좋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었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는 의지를 대놓고 표명한 것이다. 아스테리아의 혼사를 이루기 위해 여러모로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직 성인식도 연회도 열리지 않았건만, 분위기는 벌써 둘 다 열린 것처럼 과열되었다.

각지에서 온 손님으로 인하여 오래간만에 떠들썩해진 홀 다르의 흑성.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한 하인이 어느 방문 앞에 다가섰다.

하인은 주변을 둘러보는 체하더니 문을 똑똑 두드렸다.


"첫째 안주인 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들어와라."


프라는 창가 너머로 바깥을 보고 있었다. 바깥에는 한 소년이 길가를 따라 마을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레 프라의 곁으로 다가간 하인은 천 주머니를 건네었다. 프라는 주머니를 받더니 줄을 풀러 입구를 열었다.

안에는 진녹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말이 진녹색이지, 실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수고했다. 가서 일 봐라."


하인은 깊게 절을 한 뒤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이윽고 프라 홀로 남게 되었다.

안팎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나고 있는 가운데, 프라는 창가에서 벗어나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주머니를 탁자에 놓은 프라는 침대 밑에 손을 뻗었다. 곧 그녀의 손에 자그마한 가죽 상자가 나왔다.

상자 뚜껑을 살짝 여니 쥐의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쥐는 주변에 뭐가 있는지 탐색하려는 것처럼 빠르게 코를 씰룩였다. 이틀간 굶겨서 그런지 움직임 또한 필사적으로 보였다.

프라는 손가락만 한 작은 감자에 검은색 가루를 묻혔다. 이를 오묘한 눈길로 바라보던 프라는, 이내 상자 틈에 감자를 넣은 뒤 곧바로 닫았다.

한동안 방안은 고요했다. 프라는 그 고요함 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였다. 상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발톱으로, 이빨로 사각사각 상자를 갉아먹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쥐는 어떻게든 상자에서 나가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끝내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던 프라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상자를 여니 쥐가 배를 보인 채 누워 있었다. 주둥이 사이에 흰 거품과 함께 검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프라는 상자를 한편으로 치우고 천 주머니 입구를 단단히 봉했다. 조금이라도 가루가 날려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혹여나 주변에 떨어진 가루가 있나 싶어 몇 번이고 살폈다.

이윽고 프라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탈력과 피로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신음과 함께 자리에 일어난 프라는 창가에 다가섰다.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어쩐지 바람이 상쾌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



"난 네가 그럴 때면 담이 센 건지 약한 건지 분간이 안 간다. 그 싸가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이야."


스뇰은 껄껄 웃으며 갓 잡은 노루를 밑에 내려놓았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노루의 눈동자에는 윤기가 감돌고 있었다.

에아론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무서워졌어요. 제가 스바르 형을 이길 수 있을까요?"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알아서 하겠지."

"삼촌, 도와주세요. 나보다 덩치 큰 상대로 쓸 수 있는 기술이나 뭐 그런 거 없을까요?"


에아론이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물론 스뇰은 뭐 어쩌라는 듯한 얼굴로 되받아 칠 뿐이었다.


"저번에 보여줬잖아. 그대로 따라 해."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러면 지면 되겠네."

"삼촌!"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건방지게 소리 지르면 멱 딸 줄 알아."


스뇰이 손에 든 도끼를 앞뒤로 까딱이며 흔들었다. 에아론은 한숨과 함께 밑동 위에 털썩 앉았다.


"차라리 스바르 형이 져주면 좋을 텐데. 전 형 대접받고 싶은 생각 사실 없거든요. 그냥 누나를 위해서 참여한-."


스뇰은 에아론을 힐끗 쳐다봤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에아론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스뇰은 안 듣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누나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고?"

"아뇨, 나쁜 게 아니고요. 글쎄요, 음음.. 아우. 잘 모르겠어요. 이걸 뭐라고 하나요, 삼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에아론은 뾰로통한 얼굴로 무릎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자 스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스뇰은 사냥감의 가죽을 벗기던 걸 잠시 관두기로 했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대회에 참여한 게 누나 때문이라고."

"네."

"근데 뭐가 문제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별 염병을 다 떠는군."


스뇰은 콧김을 큼, 하고 내뿜고는 나머지 가죽을 벗긴 뒤 도축 걸이에 노루를 걸었다. 그러고는 노루 귀와 목 사이를 단검을 푹 찔렀다.

새빨간 피가 꿀렁거리며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냥.. 마음이 좀 그래서요.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서 그래요. 슬픈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삼촌, 제가 이상한 걸까요?"


스뇰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래서 꼬맹이가 싫어. 주절주절 말이 많거든. 제기랄.


"오래도록 지내온 가족이 떠나갈 생각을 하니까 그런 거지.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그런 거겠죠."


에아론은 무릎을 가슴에 더욱 당기며 복잡한 얼굴을 지었다.

성에는 외부인들로 가득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방에 홀로 있는다 하여도 언젠가는 복도로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참고로 외부인들은 족장의 아들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비요른이야 성인식 준비한답시고 밖에 나가서 마주할 일이 없겠지만 스바르와 에아론은 달랐다.

두 사람은 어딜 가건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받았다. 말을 걸지는 않더라도 시선은 꼭 따라왔다.

그나마 스바르는 다른 사람과 제법 말도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에아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아스테리아 곁에 있고 싶었다. 누나 옆에 있다면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나는 아버지와 같이 다녔다. 브레고아가 그리해야 한다고 말을 한 건지, 아스테리아는 성 어디에 있건 브레고아 곁에 서서 외부인들을 맞이하였다.

결국 에아론이 심적으로 편한 곳은 한 군데 밖에 없었다.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내던 스뇰은,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에아론을 보자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누나랑 얘기를 하고 싶으면 가서 해. 나중에 떠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게 맞겠죠?"

"아니면.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에아론은 아스테리아가 좋아할 선물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누나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에아론이 무엇을 주건 아스테리아는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에아론은 이 근처에 꽃밭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응. 고마워요, 삼촌. 힘이 됐어요."


에아론은 후련한 얼굴로 그리 말하더니 후다닥 자리를 떴다. 이제야 비로소 홀로 있다는 사실에 겨워하던 스뇰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저 녀석, 나한테 글리마 배운다고 오지 않았었나?

모르겠다. 하여간 저놈이 왔다 가면 나도 정신이 없어지는 기분이 드는군.

고개를 흔든 스뇰은 손도끼를 높이 들었다. 곧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노루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



사흘이란 시간이 흐르고 밤이 찾아왔다.

홀 다르의 성에는 밝은 빛이 곳곳에 피어올라 있었다. 평소에는 가족들끼리 가볍게 쓰는 식당이, 오늘은 화려한 연회장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북과 피리를 연주하는 악사들이 한쪽 벽에 서서 음악을 노래하였고 사람들은 그 음악을 들으며 술과 음식을 먹었다.

상석에는 홀 다르의 주인과 부인, 그리고 자식들이 앉아 있었다. 다만 모두가 앉아 있지는 않았다. 빈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고 그 자리는 비요른이 앉아야 할 자리였다.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도 아직 어수선한 느낌이 드는 건 주인공이 자리하지 않았음이겠지.

하지만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빈자리의 주인공을 기다리는 내색이 아니었다. 원래 구실은 비요른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지만 본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바로 저기, 브레고아의 옆에 앉아 있는 수수한 인상을 지닌 아가씨였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저 아가씨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었더랬다.

특히 족장의 아들들은 조금이라도 얘기를 나누기 위해 몰래 방에 찾아가려는 발칙한 시도까지 하였다.

하지만 갖가지 시도들은 무위로 돌아갔다.

브레고아가 제 딸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인지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 앞에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씨족들은 그런 브레고아의 처사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자기들이었어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했을 거라 생각했기에.

굳이 불만이라고 한다면 저기 앉아 있는 있는 돌주먹 부자라고 해야 하려나.

이 자리에서 붉은머리와 그나마 어깨를 견줄 만한 세력은 돌주먹이 유일하였다.

그 때문인지 돌주먹은 다른 씨족들과는 달리 붉은머리 족장과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돌주먹은 원래부터 친한 사이였다는 듯 브레고아와 살갑게 술잔을 나눴다.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에 각 씨족의 우두머리들은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여기저기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돌주먹의 철면피스러운 행동은 여전히 이어졌다.

여하간 흥겨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던 그때, 이윽고 빈자리의 주인이 등장하였다.

시선을 돌린 사람들은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청년을 보자 다들 눈빛을 빛냈다.


"아하.."


이 자리에는 비단 청년들만 자리하지 않았다.

훗날 비요른의 짝이 될 앳된 소녀들도 함께 하고 있었다. 소녀들 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자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소녀들은 저마다의 눈빛을 드러내며 비요른을 쳐다보았다.

차분한 태도로 연회장을 가로지른 비요른은 아버지 앞에 다가섰다. 브레고아는 크게 두 팔을 벌려 비요른을 안아준 뒤 자리에 앉게 했다.

브레고아가 악사들에게 손짓했다. 악기 소리가 사라졌다.


"모두 이곳까지 찾아와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리겠소."


씨족의 족장들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잘들 알다시피 내일 드디어 비요른의 성인식이 시작되오. 비요른이 과연 붉은머리의 온전한 전사가 될지는 오직 키놀께서 아실 것이오. 그러하나 나는 내 아들이 제 용기를 모든 이들에게 증명할 것이라 믿고 있소."


브레고아가 비요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비요른은 여유롭게 목례를 해 보였다. 브레고아가 술잔을 들자 사람들 또한 브레고아의 행동을 따라 했다.

브레고아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둘러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비요른을 위하여."



*



깊은 밤이 찾아왔지만 연회장의 분위기는 좀체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르익으면 무르익었을 따름이었다.

연회장 한가운데에는 무도를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 젊은 남녀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춤을 췄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듯하나 속내는 아니었다. 단지 춤을 출 기회가 있기에 그런 것뿐, 이들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소녀들은 비요른을, 청년들은 아스테리아를 보고 있었다. 간혹 어떤 소녀들은 스바르 혹은 에아론을 염두에 두고 있기도 했다.

붉은머리의 장남과 이루어질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차남과 막내는 다를 것이다.

어차피 차남 같은 경우는 내년에 성인식을 치를 예정이니 지금부터 알아두는 게 좋았다.

막내인 에아론은 아직 성인이 되려면 한참 남았지만 뭐, 미리 눈도장을 찍는다고 나쁘진 않겠지.

그래서 스바르와 에아론도 큰형인 비요른처럼 다른 소녀와 짝을 이뤄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에아론은 춤을 추다가 얼마 안 있어 자리에 앉았다.

청한 소녀가 별로 없기도 했을뿐더러 원체 춤을 출 줄 모르다 보니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에아론은 옆 옆자리에 앉아 있는 누나를 쳐다봤다. 아스테리아는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애당초 브레고아도 그녀 보고 앞으로 나서라고 하지 않았기에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청년이 아스테리아에게 다가가 춤을 제안했다. 그 청년은 다름 아닌 헤르토, 돌주먹 족장의 아들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춤을 추시겠습니까?"


다들 눈치만 보고 나서지 않고 있던 참인데 이를 헤르토가 깨버렸다. 아스테리아는 망설였다. 어쨌든 오늘 연회의 주인공은 비요른이었다. 자신은 나설 생각이 없었고 설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가거라."


브레고아가 속삭였다. 아스테리아는 난감한 얼굴을 지었다.


"하지만.."

"어차피 다들 즐기고 있지 않느냐. 어서."


아스테리아는 헤르토의 손을 받아들였다. 무대로 올라선 두 사람은 되도록 남의 관심이 닿지 않는 곳에서 춤을 췄다.

물론 이런다고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청년들은 아스테리아에게 함부로 춤을 청한 헤르토를 언짢은 얼굴로 혹은 초조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 없소. 날 보시오."


헤르토가 말했다. 아스테리아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얼마 안 있어 바로 사라지기는 했지만.


"홀로 있는 것보다 그래도 같이 있는 게 더 낫지 않겠소?"

"꼭 그렇지만도 않더군요. 홀로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맞소. 하지만 난 아니오. 난 외로움을 잘 느끼는 편이오."

"그럼 제게 춤을 청한 건, 단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그런 건가요?"

"그런 의미에서 말을 한 건 아니오만.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소."


헤르토가 그 말을 하면서 아스테리아를 제 품으로 바짝 당겼다. 아스테리아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례한 분이시군요."

"당돌하다고 여겨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좋지 않겠소?"


그리고 헤르토는 아스테리아의 귀에 속삭였다.


"알고 있잖소. 이미 우린 혼인할 사이라는걸.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요."


아스테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르토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아스테리아를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바닥에 술잔이 구르고 있었고 에아론의 바지가 푹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술을 마시려다가 그만 잔을 놓친 모양이었다.

아스테리아는 어서 헤르토에게 빠져나와 에아론에게 다가갔다.


"괜찮니?"


에아론은 약간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맛있어서 계속 마시다가 그만.."


다른 곳에 있던 프라도 두 사람에게로 왔다. 프라는 천을 갖고 와 에아론의 바지를 닦았다.


"내가 할 테니 넌 네 할 일을 해라."

"일단 에아론 먼저 방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그러니까 그건 내가-."

"제가 할게요."


아스테리아는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프라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마주 보았지만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남매는, 시끌시끌한 연회장에서 벗어나 복도로 접어들었다.

복도로 나오니 방금 전까지 있던 모든 소리가 다 꿈에서나 들려왔던 것처럼 고요했다.


"이제야 둘이 있게 됐다."


아스테리아는 고개를 내렸다. 에아론이 히죽 웃고 있었다.


"설마 너, 일부러 그랬던 거야?"

"응. 근데 잘 될 줄은 몰랐어."


아스테리아는 약간 생경한 얼굴로 에아론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순진하기 짝이 없던 막냇동생이 그런 발칙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하지만 자신도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싶었기에 마냥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좋았다.


"요즘 글리마 연습한다며? 잘 돼가니?"

"응.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더 이겼어. 대회 열리면 가뿐히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스테리아는 기특하다는 얼굴로 에아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누나의 손길을 받았던 일이 벌써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내일이 네 성인식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에아론은 아스테리아를 올려다봤다. 아스테리아는 얼마 가지 않아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면 네 머리가 붉어지는 것도 옆에서 다 지켜봤을 테지. 기회가 된다면 내가 직접 염색을 해줘도 됐을 테고."


아스테리아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간 제대로 보지 않아서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에아론 키가 조금 큰 것 같았다.

에아론의 연갈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한번 쓸어보았다. 요즘에 빗질을 소홀히 하는지 머리칼이 엉킨 곳이 군데군데 보였다.

아스테리아는 손가락에 침을 묻힌 뒤 머리칼 한 올 한 올 풀어주었다.


"누나, 이제 완전히 떠나는 거지?"


손길이 잠깐 멈췄다. 그러나 이내 아스테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에 다시는 못 오는 거야?"

"글쎄. 아마 그럴 것 같아."

"그러면 내가 직접 보러 가는 건 되고?"

"오게?"

"갈 수 있으면 그러려고."


아스테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힘들 거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말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오면 좋지."

"좋았어. 누나 그러면 이리로 와봐."


에아론은 아스테리아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아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아버지 입장이 곤란해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간 에아론이 화관을 들고나왔을 때 아스테리아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결혼 축하해. 누나. 원래는 당일에 줄까 하다가 그때 되면 다 시들 것 같아서 미리 만들었어. 아, 여기 이 부분이 조금 비뚤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쓰면 괜찮을 거야."


에아론은 까치발을 들어 아스테리아의 머리에 화관을 씌어주었다. 조금 크게 만들었나 싶었지만 의외로 잘 맞았다.

흡족한 얼굴로 바라본 에아론은 아스테리아가 크게 기뻐할 거라 예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누나?"


아스테리아는 에아론을 힘껏 안았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일 테지만 몸이 떨리는 것까지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에아론은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왜 그런 얼굴을 보이는지 왜 슬피 우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누나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는 눈을 감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 오직 연회의 노랫소리와 춤을 추는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만이 가느다랗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남매는 서로에게 의지한 채 언제까지고 포옹을 하였다.

다음 날, 드디어 고대하던 성인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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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찰꾼 스뇰 (3) +1 24.05.19 19 3 13쪽
10 아픔 +1 24.05.17 19 5 19쪽
9 정찰꾼 스뇰 (2) +1 24.05.16 19 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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