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격돌
【 이 문을 넘는 순간, 모두가 평등할지니 】
파라멘타의 교훈이자 교칙 중 가장 우선시 되는 제 1 교칙이다. 이 문을 넘으면 대공작의 자제든 준남작의 자제든 서로의 위계는 사라진다. 학생의 신분으로 모두가 평등해진다는 말이다. 물론 선후배간의 위계는 존재하지만,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다.
“ 뭐해? 시드? 가자. ”
1 교칙 문구가 적혀있는 교문을 지나 한 발짝 걸음을 내딛었다.
“ 넌 에이렌과 같은 1년생이니까 좌측 건물로 가면 돼. 전학 수속은 이미 다 밟은 상태이니까 곧바로 배정 받은 반으로 가면 될 거야. ”
유렌은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이젠 에이렌과 단 둘이 남겨졌다. 며칠 같이 지냈음에도 에이렌은 아직까지 내가 어색했는지 한참이나 떨어져서 걸었다.
‘ 이게 얼마만이냐.. ’
적어도 200년 만에 온 거였다. 안타라스 차원에서 귀족의 아이로 태어난 건 몇 번이나 전의 인생이었으니까.. 전 인생은 왕족이었기에 성 내부에서 전담 교육을 받았으니 파라멘타에 올 일은 없었다.
‘ 역시나 변한 건 없구나.. ’
수천 년간 이카루스 제국의 모든 것이 변해도 파라멘타 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고 이 자리에 늘 서있었다. 내가 처음 안타라스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쭉.
그래서였을까?
아주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드륵!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 됐다. 에이렌은 그런 시선들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자리로 달려갔다.
‘ 역시나인가.. ’
대충 둘러봐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대다수에 혐오감이 가득 차 있었다. 하기야 순수 혈통의 귀족들에겐 내 뒤에 붙어 있는 수식어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을 터였다.
천민
양자
그리고 병사장 출신의 준남작의 가문. ‘미르시스’
애초에 내가 천민 출신의 양자가 아니더라도 순수 혈통 귀족이 아닌 미르시스 가문 자체가 무시를 받고 있을 거였다.
“ 천민 주제 여기가 어디라고.. ”
대다수의 아이들이 속으로 적대감을 표현했다면, 제일 앞에 앉아있는 두 녀석은 겉으로 표현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 뭘 봐? ”
‘카이주’ 가슴에 달린 이름표에 적혀있는 이름이었다. 카자 돌림으로 시작하는 이름이라면, 카이나트 백작의 아이가 분명했다.
“ 뭘 보냐고 자식아? ”
확실히 천민들의 학교인 레그멘타의 아이들과는 달랐다. 레그멘타에서 폭군이었던 막콥과 이 앞에 앉아있는 카이주가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자세 자체가 달랐다.
그래봤자 나에겐 동네 꼬마나 다름없었지만..
- 휙!!
카이주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뻗었다. 파라멘타의 교칙상 교내 폭력은 중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먹질을 한다는 건, 여간 꼴통이 아니란 얘기였다.
- 턱!!
내가 나서기 전에 누군가가 그의 주먹을 막아냈다. 고개를 돌린 자리엔 제온 파르치 공작의 넷째 딸인 메리온이 서있었다.
“ 뭐하는 거야? ”
집에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어투로 차갑게 말하자, 짐짓 당황한 카이주가 두어 걸음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 아니 그냥 뭐.. ”
“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자리 앉지? ”
“ 어.. 알겠어.. ”
메리온이 공작가의 딸이어서가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분위기부터 기세까지 모든 것이 카이주를 압도하고 있었다.
‘ 역시 파르치 가문이라 이건가.. ’
첫 만남 땐 제르제온과 테레온의 가려 그녀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었다. 그 둘 만큼이나 강한 아이였다. 힘이나 검술 쪽의 강함이 아닌 정신적으로 강한 아이.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 뭐해? 시드? 저기 앉아! 저기가 네 자리니까. ”
“ 예. ”
메리온의 말에 짧게 답하자, 그녀가 두 눈을 치켜떴다.
“ 등교 할 때 교문에 적혀있는 거 못 봤어!? 여기선 모두가 평등해. 존칭은 생략하라고! ”
너무 오랜만이라 깜빡해버렸다.
“ 응. ”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리온이 가리킨 방향의 자리로 가 앉았다.
“ 자 모두들 자리에 앉자! ”
메리온의 뒤이어 선생으로 보이는 자가 들어섰다. 그의 한 마디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드디어..
첫 수업의 시작이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그 바람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
아이들의 새근새근 조는 소리와 슥삭슥삭 움직이는 연필소리가 하나가 되어 음악을 만든다.
오랜만에 평화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 때의 기억들..
‘ 시드!! 너 또 땡땡이야!? ’
그녀의 목소리..
- 딩동댕동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에 잡념에서 벗어났다. 아니, 잡념이 아닌 나의 유일한..
행복했던 기억.
.
.
.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인다는 건, 단 하나의 이유였다. 다음 수업이 야외에서 행해지는 검술 수업이란 얘기.
“ 넌 없지? ”
“ 응? 뭐가? ”
“ 검. ”
또 잊고 있었다. 파라멘타에 입학하는 순간, 자신의 검 한 자루를 꼭 지니고 다녀야만 했다.
“ 오늘은 일단 목검을 들고, 내일 유렌 언니를 만나서 구하러가자. ”
메리온이 유독 나와 에이렌을 챙기는 것을 보면, 미르시스 가문과 파르치 가문 간의 사이가 각별 하다는 게 또 한 번 느껴졌다.
‘ 그러고 보니 내 검 한 자루 없었군.. ’
먹고 살기 바쁜 천민으로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문득 전 인생의 나의 애검들이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 온다!! ”
이곳저곳 흩어져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아이들이 일순간 침묵으로 휩싸였다. 그리고는 누구하나 할 것 없이 엄청난 속도로 훈련장으로 도열했다. 아까의 수업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모두가 긴장으로 가득 찼고, 심지어 온 몸이 얼어붙은 아이도 보였다.
‘ 여간내기가 아닌가보군.. ’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긴장을 한다는 건, 적어도 검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얘기였다.
- 두근
느껴진다.
아주 강한 기운. 이번 생에서 느꼈던 기운 중에 가장 강한 인간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멀리서부터 걸어오고 있음에도, 강한 기세가 느껴지는 것일까? 심지어 여기 있는 모든 아이들을 일부로 기세로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내 수업에서 딴 짓 하는 놈들은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 담긴 것처럼.
“ 늦은 놈은 없겠지? ”
무겁게 내려앉은 한 마디. 하얗게 기른 수염과 온갖 상처가 가득한 몸. 가장 특이한 건, 동공이 없이 새하얀 눈이었다. 단 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직접 작위를 내렸고, 내 바로 옆에서 전쟁에 나섰던 자였으니까..
전(前) 대륙제일검이자 십이왕(十二王) 중 한 명인 검왕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자.
이노키아 왕국의 검왕에게 두 눈이 뽑혀 맹인이 되어 ‘맹인의 기사’라고 불리는 막시먼 메이크네였다.
‘ 전선에서 떠났다고는 들었는데, 파라멘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나? ’
충신 중에 충신인 그였다. 그가 왕하 친위대장을 벗어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자 그럼 수업을 시작하.. ”
갑작스럽게 말을 끊은 막시먼이 일순간 고개를 훽- 하고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두 눈이 없음에도, 마치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 넌.. 뭐지? ”
실수했다. 그것도 엄청난 실수를.. 두 눈이 없는 막시먼은 기운으로 많은 것들을 감지한다. 그 예리함이 내가 숨겨놓은 기운까지 단 번에 잡아낸 것이다.
- 스릉
일순간 검을 뽑아들었다.
“ 네 놈의 정체를 밝혀라!! ”
갑작스러운 상황 연출에 모든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채로 나와 막시먼을 번갈아보았다. 대륙의 명검 제 24검 중 8검인 크로케아가 언제라도 나를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 이대로 가다간 걸리겠군. ’
알렌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막시먼은 힘들었다.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던 찰나.
- 콰콰쾅!!!!
일순간 본교 건물이 엄청난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 이게 무슨!! ”
아수라장.
모든 아이들이 혼란 속에 비명을 내질렀다. 건물이 무너지며 날아든 파편들이 야외 수업을 나온 학생들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 죽거나 중상에 빠져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또 하나의 건물이 터졌다.
- 콰콰쾅!!!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나를 의심할 새도 없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막시먼이 뛰어들었다.
‘ 마법인가? ’
최소 7써클 이상의 대마법이었다. 파라멘타의 결계를 뚫고, 오리하르콘으로 지어진 본교 건물을 단 번에 박살 낼 수 있는 건, 적어도 7써클 이상의 대마법 뿐이었다.
‘ 대체 누가? ’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카루스 제국의 모든 귀족의 자제들이 다니는 파라멘타를 공격한단 말인가? 이 곳엔 대공작부터 준남작까지 모든 귀족의 아이들이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7써클 이상의 마법을 발현 시킬 정도의 마법사라면 제국 내에서 손에 꼽혔다. 그 말은 즉, 범인이 한정적이라는 얘기!
- 파박!!
곧바로 지면을 박찼다. 거대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이런 행동을 취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 넌 대체 뭐야!? ”
“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
“ .. 나중에 얘기하지. ”
나와 거의 비슷한 속도. 어느새 따라 붙은 막시먼이었다.
“ 킹슬레이어!!! 앗카스 등장이시다!!!! 에르미안티 놈들을 데리고 와!!!!! ”
※ 에르미안티 - 이카루스 제국 왕족의 가문
어떤 미친놈인가 했는데 단 번에 의문이 풀려버렸다. 홀 블랙을 탈주한 죽지 않는 대마법사 앗카스.
“ 네 이놈!!!!!! ”
나보다 먼저 반응한 건 막시먼이었다.
“ 다시 홀 블랙으로 돌려보내주마!! ”
그의 검인 크로케아가 정면으로 쭉 뻗어지기가 무섭게 엄청난 숫자의 검기가 앗카스의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 애송이는 빠져!! 에르미안티를 데려와라!!!! ”
- 콰콰쾅!!!
그렇게 쉽게 막을 수 있는 검기는 아니었다. 물론 전성기 시절 막시먼의 힘에 비해 많이 부족했지만, 상대가 일개 마법사였다면 흔적조차 없이 사지가 찢겨져 날아갈 정도의 예리함을 가진 검기였다. 그러나 앗카스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 했다. 막시먼의 시야가 온전치 못 했기에 광범위하게 검기를 펼친 탓도 있는 것 같았다.
‘ 윈드계열 마법으로 막아낸 것인가.. ’
보통이라면 쉴드 마법을 발현시켜서 검기를 막아냈을 터, 그러나 앗카스는 달랐다. 강력한 돌풍을 일으켜 검기를 흘렸다.
‘ 생각보다 강하다. ’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히 발현시키지 않는다면 절대 불가능한 방어였다. 마나와 마법의 써클만 높은 게 아니었다.
“ 하압!! ”
고민하는 사이 막시먼이 일순간 거리를 좁혔다.
‘ 급하다. ’
제 아무리 마법사가 근접전에 약하다고 하지만 그 상대가 9써클이 넘어가는 마법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 쿼그 오브!! ”
- 꾸르륵
달려드는 막시먼의 발밑이 일순간 녹아내리더니 강한 맹독을 지닌 물기둥이 치솟았다.
‘ 7써클의 쿼그 오브. ’
살짝만 닿아도 모든 신체가 녹아내리는 위협적인 물기둥이었다.
‘ 당한다! ’
라고 생각하던 찰나, 일순간 몸을 비틀어 피해낸 막시먼이 멈칫 하는 가 싶더니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 팡!!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파라멘타 전체를 울렸다.
‘ 막시먼의 주특기. ’
그를 대륙제일검으로 만들어준 기술. 사람들은 막시먼에 대해서 입을 모아 말했다.
발로 검을 쓰는 자라고.
진짜 발로 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웬만한 헌터들의 눈으로도 잡아 낼 수 없을 만큼 빠른 움직임. 그에 더해서.. 단 번에 힘을 모아 찌르는 힘.
-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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