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블린으로 살았을 때 썼던 그것
<< 제스페르 가(家)의 영지, 카라나트 홀 >>
“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
제스페르 가(家)의 휘하 귀족인 듀라튼 백작이 들고 있던 컵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 당장 내일이야!! 내일!!!! 고작 천민 애새끼 두 명 납치해오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
“ 그게.. 누군가의 습격으로.. 나갔던 노예상 전원이.. ”
“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용병 열둘이 천민들만 사는 알파네스에서 습격당할 일이 뭐가 있다고!! ”
“ 그게 저희도.. 의문인 게.. ”
- 퍽!!
보고를 하던 병사의 명치를 걷어 찬 듀라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파라칸 그 놈의 성질을 몰라서 그래!? ”
“ 죄.. 죄송합니다.. ”
듀라튼이 이어서 호통을 치려는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 똑똑
“ 누구야!? ”
“ 파르멘입니다. 백작 님. ”“ 뭐야!? ”
“ 파라칸 백작님께서 즉시 자신의 저택으로 들라고 명하셨습니다. ”
“ 이 변태새끼가.. 벌써.. ”
벌써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오늘 해가지기 전까지 2명의 어린 노예를 파라칸에게 바쳐야만 했다. 시간이 다 되지 않았음에도 듀라튼을 호출했다는 건, 고용한 노예상들이 납치하는데 실패했다는 게 벌써 파라칸의 귀에 들어갔다는 얘기였다.
‘ 제스페르 가의 정보통은 정말이지.. ’
매 번 한 발짝 앞서 있었다. 괜히 이카루스 제국에서 최강의 가문이라 칭해지는 게 아니었다. 천민들만 사는 알파네스에서 벌어진 일까지 단 몇 시간 만에 알아낸 것이다.
“ 지금 당장 가지. ”
“ 예!! ”
보고를 올리던 병사가 욱신거리는 명치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에겐 천만 다행이었다. 만약 파라칸이 부르지 않았더라면 듀라튼에게 몇 대 더 얻어맞았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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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칸의 저택 내부로 들어서자 듀라튼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기둥 곳곳에 묶여있는 어린 노예들이었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묶여있는 그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성적 희롱을 당했는지, 풀린 동공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 빌어먹을 새끼.. ’
죄다 자신이 잡아다 받친 노예들이긴 했지만, 실상을 두 눈으로 직접 보자니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참했으니까..
‘ 기필코 올라가리라.. 어떤 짓을 해서든.. ’
벗어나는 방법은 이 역겨운 모든 것들을 짓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는 일밖에 없었다.
- 똑똑
파라칸의 방 앞까지 도달한 듀라튼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 들어와. ”
- 철컥
문이 열리자 서재에 앉아 자신의 검을 닦고 있는 파라칸이 그를 맞이했다. 파라칸은 뒤룩뒤룩한 살집으로 구성 돼있는 그의 몸을 시작으로 그 끝에는 돼지인지 사람인지 구별이 불가한 머리통이 달려있었다. 제스페르라는 이름이 그의 뒤에 붙어있지 않았더라면, 귀족이라고 절대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 듀라튼 바테라스. 파라칸 백작님을 뵙습니다. ”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 듀라튼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같은 백작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가 가르칸 제스페르인 이상 듀라튼은 죽을 때까지 그에게 예를 갖추어야만 했다.
“ 실패를 했다지? ”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곧바로 답했다.
“ 예.. 그게 갑작스러운 습격에 인해서.. ”
“ 용병 열둘이 알파네스에서 습격을 당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
그는 마치 듀라튼의 변명을 예상이라도 한 듯, 날카롭게 되물었다.
“ 저도 그게 의문인데.. 아무래도.. ”
“ 오십. ”
듀라튼이 채 말을 잇기 전에, 파라칸이 그의 말을 잘랐다.
“ 예? ”
처음에 듀라튼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 내일 자정까지 50명을 내 눈앞에 데리고 와라. ”
“ 예에!!?? 그.. 그건 말이 안 되는.. ”
“ 그럼 오늘 약속을 지켰어야지. ”
“ 그건 필치 못 할 사정으로 인한.. ”
“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데? 고용한 용병 열둘이 천민들만 사는 알파네스에 습격을 당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
“ 그건.. ”
“ 그러니 잔말 말고 데리고 와. ”
“ 허나 그 정도 인원을 단 번에 납치하려면 천민 학교 자체를 습격하지 않는 한.. ”
“ 역시 똑똑해! ”
또 다시 듀라튼의 말을 끊은 파라칸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 그렇게 하도록 해. ”
“ 레그멘타 자체를 습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
“ 그래 ”
“ 하지만.. ”
“ 그래봐야 인간쓰레기들보다 못 한, 천민 놈들만 다니는 학교가 아니던가? ”
“ 예.. 허나, 다른 선생들은 몰라도 레그멘타에는 알렌 준남작이 있어서.. ”
“ 알렌? ”
“ 예.. ”
“ 아.. 그 병사장 출신? ”
“ 예.. 제 아무리 병사장 출신이라지만.. 실력만큼은 웬만한 기사를 웃돌고 있어.. 용병들만으로는 무리가.. ”
“ 불러. ”
“ 예? ”
“ 내가 소환 명령을 내리지. 알렌을 이 곳으로 잠시 오라고 말이야. ”
“ 무슨..? ”
“ 알렌이 나를 만나기 위해 왔을 때, 그 때 습격하라고.. ”
“ 아.. ”
알렌이 없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다른 선생들은 아이들을 지켜야한다는 책임감이 없어서 용병들을 보면 알아서 뒤꽁무니를 뺄 것이고, 그 후엔 일사천리 일 테니까..
“ 알겠습니다. ”
애초에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파라칸이 제스페르 가(家)의 넷째 밖에 되질 않았어도.. 제스페르는 제스페르였으니까..
<< 제온 파르치 공작의 영지, 툴카탄. 알렌의 저택 >>
“ 뭐라고..? ”
이렇게나 이른 시각에 소환 명령이라니.. 게다가 생전 보지도 못 했던 제스페르가의 넷째, 파라칸의 명령이었다. 제 아무리 알렌이 있는 툴카탄과 제스페르 가(家)의 영지인 카라나트 홀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꼬박 반나절은 달려야만 도달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알렌은 레그멘타에 수업이 있어서 학교를 향해 나서기 직전이었다.
“ 정말인가..? ”
“ 예.. 확실히 제스페르 가(家)의 문장입니다. ”
보고를 올린 병사가 서신을 알렌에게 건넸다. 정말이었다. 이카루스 제국에서 왕족 다음으로 권력을 쥐고 있다는 가르칸 제스페르 대공작의 그 문장이 맞았다. 입을 쩍- 벌린 백호의 얼굴에 뱀의 눈을 가진 문장. 이건 분명 제스페르 가문을 상징하는 거였다.
“ 채비를 하게나. ”
어쩔 수 없었다. 고작 준남작인 알렌이 거부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다.
<< 천민의 구역. 알파네스 >>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거슬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알려줘. ”
파투였다. 정말이지 집착이 강한 아이였다.
“ 나도 강해지게 해달라고!! ”
“ 하.. ”
이럴 땐 무시가 답이었다. 학교까지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파투를 피해 숲이 아닌 협곡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결단을 내린 이상 지체하지 않는다.
- 파박!!
지면을 강하게 박차 쫓아오는 파투를 따돌렸다.
‘ 며칠 무시하면 되겠지.. ’
애초에 천민인 우리들에게 관심조차 없는 선생들이 태반이었기에, 학교에 조금 늦는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간만에 몸도 좀 풀 겸, 조금 더 속도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바람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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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다. 레그멘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어제 내가 죽였던 놈들의 동료들의 짓인 것 같았다.
‘ 제 아무리 노예상이라도 귀족들이 선생으로 있는 레그멘타를..? ’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제 아무리 레그멘타 선생들이 준남작 밖에 되질 않았지만,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고작 노예상들이 습격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 누군가가 있군. ’
대충 짐작이 갔다. 뒤를 봐주는 귀족이 있다. 그것도.. 최소 준남작 몇 명쯤은 무시할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 그러나 그건 나중 문제였다. 지금 중요한 건..
‘ 흔적을 쫓는다. ’
아이들을 끌고 간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파투 녀석 때문에 돌아서 오느냐고 늦긴 했지만..
내 눈을 피할 순 없다.
- 파박!!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학교를 갈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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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쉬어가지. ”
노예상의 대장인 베란헬이 말했다.
어째서 천민들만 사는 알파네스에 오는데 이 많은 병력을 끌고 가라 했는지 아직까지 의문이었다. 심지어 레그멘타의 가장 위험대상인 알렌 준남작조차 없는 이 상황에서 말이다. 12명의 행방불명. 정말 누군가에게 당한 것일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직접 보고를 들었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북부대륙에만 존재한다는 몬스터 짓이 아니라면 천민들만 사는 이 곳에서 용병 12명을 흔적조차 없이 죽일 순 없을 것이다. 가장 큰 가능성은 늦은 밤까지 술이나 퍼먹던 용병들이 귀찮아서 의뢰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가설이 가장 높았다.
“ 쓸데없는 기우라니.. 듀라튼 백작.. 그 놈의 호들갑은.. ”
얼마나 제스페르를 두려워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버리는 것일까? 귀족이 아닌 베란헬이 완전히 이해하기엔 힘든 부분이었다.
‘ 제스페르가 그렇게 대단한가.. ’
모든 귀족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떤다.
‘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
노예나 잡아다 파는 베란헬에겐 그저 의미 없는 이름에 불과했다. 애초에 죽기 전에 제스페르 가문의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니까..
멀지 않은 곳.
쉬고 있는 노예상단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만큼은 잔뜩 분노한 드래곤과 같았다.
‘ 60명 남짓인가.. ’
하기야 저 정도 숫자는 돼야 레그멘타를 습격하여, 저 많은 숫자의 아이들을 납치 할 수 있을 터였다.
눈을 빛낸 시드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었다.
‘ 얼추 비슷한가.. ’
현재의 내 육체와 맞는 길이. 검으로 사용하기 딱 이었다.
‘ 가볼까.. ’
그렇게 지면을 강하게 박차려던 찰나.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 많은 숫자의 노예상들을 다 죽인다면, 제 아무리 알파네스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해도 왕국의 수사단이 올지도 몰랐다.
‘ 흐음.. ’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봐 적당한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 어쩔 수 없군.. ’
오랜만에 사용하는 것이긴 했지만, 현재 상황에선 이것만한 게 없었다. 물론 마법이 훨씬 더 편했겠지만, 마나의 흔적을 남겨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추적을 당하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 옛 생각이 나는군.. ’
오랜만에 만들어보려 하니깐 머릿속 한 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나의 38번째 인생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인생(人生)이 아닌가..?
인간으로 살았던 삶이 아니라..
고블린으로 살았던 삶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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