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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돌청년 클래식 님의 서재입니다.

군주의 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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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프픗
작품등록일 :
2017.01.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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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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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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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회

DUMMY


나는 왜 이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는 충분히 나올만 했다.


가디언 소울 남부 대륙의 주요 세력은 성왕국과 자유 교역 도시 길드, 그리고 구 신성제국령의 영주들이다. 이들 중 성왕국은 내란 때문에 크게 약화 됐고, 구 신성제국령의 알짜배기는 모두 내가 먹었다.


여기서 아린이 나선다면 노른자위 땅을 좀 차지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남부 지방을 통일시킬 수 있다.


이제껏 아린의 정책은 땅을 적당히 차지하고 외부활동을 통해 다른 영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지만... 애버론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된 것이리라. 나는 기대보다는 우려를 담아서 그녀에게 물었다.


"좋은 명분이라도 있어요?"


나처럼 주변 영지들을 정리하는 선이면 또 몰라. 성왕국까지 몰아내려면 필연적으로 적잖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아린은 내가 생각해놨던 것들 중 최악의 답변을 골랐다.


"어차피 우리가 남부를 다 먹을건데 명분이 왜 필요해?"


명분 없는 전쟁을 일삼는 놈들은 미친놈 내지는 양아치 취급밖에 받지 못한다. 좋은 기회가 보인다고 섣불리 달려드는 것은 달갑지 않다.


애버론의 사건이 충격적이었어도 그렇지, 이제껏 정도를 지키며 행동한 덕분에 주변의 신의를 얻어놓고 이제와서 이런다니. 이래서야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의 아린에게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건 꺼려졌다. 나는 좀 더 소극적으로 그녀에게 항의하는 방법을 택했다.


"저는 원주민 영주들에게 영토와 권리를 보전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 넌 그 약속을 지켜. 어차피 너는 명목상 길드의 외부인이잖아."


아린은 자유 교역 도시의 병력을 움직여서 구 신성제국령을 점령할 생각인 듯 했다. 그녀와 나는 명목상 남남이라곤 해도, 사실은 한 지붕 밑에서 살고있는 사이다. 원주민 영주들의 눈이 단춧구멍이 아닌 이상 그녀도 나도 비난을 면치 못하겠지.


나는 그 오만한 계획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내 표정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 듯, 오해하지 말라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내가 다 먹어치우겠다는게 아냐. 어차피 우리 길드에서 병력을 일으키면 너희 교단에 가입해서 보호를 받으려는 사람들도 늘어날거 아냐? 그런 사람들은 네가 다 먹어도 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아린은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크게 놀란 표정도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젠데?"


"남부의 사람들이야 다 굴복시킬 수 있다고 쳐요. 하지만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과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하려고요?"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버리면 앞으로의 외교에서 답이 없어진다. 이미 검증된 배신자를 믿고 친교를 나눌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러나 아린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남부를 통일시키면 우리는 가디언 소울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게 돼. 성왕국도 외교 안 하고 잘만 지내잖아? 우린 그 성왕국보다 훨씬 거대한 세력이 될 수 있어."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댄 아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미리 대답을 생각해놓은 듯 목소리에 거침이 없다.


"외교권이 있으면 뭐해? 그 상대가 모두 얼간이, 겁쟁이들이잖아. 그놈들은 힘들게 연합시켜봤자 별 도움도 안 돼. 놈들과는 동맹을 맺는게 아니라 복속을 시켜야지."


"다른 길드원들은 모두 동의했어요?"


"날 뭘로 보는거야?"


아린은 애매한 대답을 하며 나를 노려봤다. 당연히 동의를 받았다기 보다는, 길드 마스터인 자신의 명령인 만큼 마땅히 따를 것이라는 말투다.


그녀는 이제 나를 구슬리는 것 같은 말투로 설득에 들어갔다.


"어차피 너도 그 정도 땅덩이로 만족할 생각은 없잖아. 이번 일이 잘 되면 너도 나도 단번에 세력을 대폭 키울 수 있어."


글쎄... 이대로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어서 성왕국을 무너뜨리고 남부를 집어삼킬 수 있다 쳐도. 그리 밝은 미래는 그려지지 않는다. 지금 아린에게 협력하면 또다시 그녀의 밑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로잡힌 것이나 다름없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좀 더 신중히 생각했어야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방을 나섰다.


저택의 길드원들은 살짝 주눅든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역시 이번 건은 아린의 독단으로 밀어붙여진 듯 하다. 스낵바의 구석에 박혀있던 다르몬드는 나를 보자 조용히 물어온다.


"어떻게 됐어요? 이대로 강행한대요?"


"못 말릴 분위기야. 너랑도 따로 이야기 된게 있어?"


"저는 남부를 다 먹어치운 다음에 움직이라네요."


"뭐라고?"


설마 그녀는 다르몬드의 힘을 빌려서 서부까지 점령하려는 것인가? 하기사 서부는 남부에 비하면 굉장히 황량하고 메마른 땅인지라 그 규모가 크지 않다.


'남부 다음엔 서부. 서부 다음엔 동부겠지. 북부는 메마른 땅이니까 줘도 안 할테고... 만약 먹으려고 해도 충분히 먹을 수 있어.'


그 모든 것을 이루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못하리라. 게다가 지금 상태의 아린이라면 그리 온건한 통치를 펼칠 것 같지도 않다. 그녀는 이제 다른 영주들을 완전히 굴복시키려 하니까.


다르몬드는 한숨을 내쉬며 내게 속내를 토해냈다.


"이건 정말로 무의미한 정복전쟁이 될거에요. 제 신도들을 이런 싸움에 동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


"그러게요. 여길 나가면 마땅히 갈 곳도 없는데."


녀석은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 또한 진지하게 고민중인 듯 하다. 나는 일단 길드원들의 동향을 보고 마음을 결정하기로 했다.


자유 교역 도시 길드의 최대 장점은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다는 것. 아무리 아린이라도 이걸 건드려버리면 길드원들의 지지를 많이 잃게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가져온 소식을 들은 신도들은 아예 대놓고 난색을 표했다.


"지금 상황에서 또다시 정복전쟁을 펼친다고요? 저흰 이번에 얻은 영토들을 관리하는 것도 버거운데..."


"이 이상 영토를 얻어봤자 인력이 부족해서 관리하기 힘들 뿐입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주변 영주들의 신뢰도 잃게될거에요."


참모진들이 걱정스레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있던 아슬론이 그들에게 일갈하듯 말했다.


"다들 조용해라. 명색이 알룬님의 신도들이면서, 알룬님의 입장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건가?"


"아..."


레니아와 카엘은 그의 말을 듣곤 부끄럽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좋게 말하면 아린의 보호하에 있고, 나쁘게 말하면 그녀의 포로나 다름없다.


그러니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그런 신도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신도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이다. 나는 그런 이들을 도와주고 이끌어주긴 커녕, 오히려 발목만 잡고 있는 꼴이 아닌가.


이제껏 부끄럼도 없이 외계신 노릇을 해오던 나였건만. 이건 꽤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내 표정을 살피던 로웬이 고민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알룬님의 신도들. 그러니 알룬님의 사정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 만약 내가 아린에게 잡혀있지 않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까?"


"최소한 지금보다는 상황이 낫겠죠."


라르고가 남들보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말하자 로웬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자유 교역 도시는 차근차근 전쟁 준비를 진행했다. 대외적으로는 성왕국의 외계신 탄압을 심판한다고 하지만... 다음 차례가 누구인지는 이 주변의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이웃 영주들의 항의를 한껏 받아내야했다. 한동안의 평온을 약속받았던 그들로선 마치 배신당한 기분이리라.


그뿐이랴. 아린은 그 뒤로도 나를 불러서 꺼림칙한 질문을 던졌다. 개중에서도 가관이었던 것이 나오자, 나도 대놓고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로웬이라고 했나? 그 재앙의 씨앗이 성왕국의 사람들에게 걸린 주문을 변화시켰다고 했지?"


"재앙의 씨앗이 아니라 마법신의 파편이에요."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감이 다르다. 나는 참기 힘든 불안을 느끼며 그렇게 딴청을 피웠다. 아린은 흐음, 하고 그것을 대충 넘긴 뒤 경악스러운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걸 잘 응용하면 성왕국의 백성들을 복종시키거나 죽일 수 있을까? 원래는 절대복종 시키는 마법을 멋대로 해제시킨거잖아. 그러니까 그 명령권을 가져온다든지..."


"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거에요?"


아무리 지름길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지. 그래서야 우리가 일찍이 물리쳤던 신성제국의 재림이 아닌가!


아린은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내 표정을 보곤 곧장 제안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가는 불만을 잡아냈다.


'이건 진짜 위험한데...'


그녀가 그쪽에 관심을 보이는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성왕국의 신분제를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하려고 들 수도 있겠다.


나는 그날 밤 다르몬드와 조용히 이 건을 상담했다. 녀석은 내가 아린의 방에서 보였던 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여주며 내게 되물었다.


"정말 그런 질문을 했다고요? 형, 혹시 여기서 나간 다음 지낼만한 곳이라도 있어요?"


"글쎄..."


카르낙 사건때 느꼈듯. 가디언 소울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바깥에 나랑 원수진 놈들이 천지인데 대책도 없이 나가기는 힘들겠지.


다르몬드는 내 말에 시무룩한 표정을 보였다. 결국 마땅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녀석과 헤어진 나는 다음날 아침에 또다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다르몬드 본 사람 없어요? 오늘 아침 먹으러 안 왔던데."


"정기 회의에도 불참했어요. 다른건 몰라도 밥때 놓칠 녀석은 아니지 않나?"


우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녀석이 어젯밤에 도망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린은 녀석을 잡아오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대놓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뒤로 길드원들의 외출에는 큰 제약이 가해지게 됐다. 그녀는 기밀 유출 방지라는 명분을 내세워가며 우리의 행동을 통제했다.


나는 사태가 여기까지 진행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묶여있는 한, 나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남들과 똑같이 피륙을 가진 인간이 외계신 행세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이대로 가다가는 감금을 넘어서 고문을 당하거나, 아니면 내 목숨을 빌미로 신도들이 협박당할 수도 있겠다. 지금 아린이 하는 꼴을 보니 그러한 미래가 그리 멀리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결국 나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결단을 내렸다.


정오 즈음. 내 방에서 창문을 연 나는 아래쪽을 바라봤다. 이곳은 고작 2층. 그러니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도 있겠다. 굳은 손으로 난간을 짚은 나는 다시금 각오를 되새기며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었다.


어차피 지구 쪽에는 별다른 비전도, 미련도 없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분들은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가실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틀 위에 똑바로 섰다. 아래쪽의 길드원들은 그제서야 나를 발견하곤 놀라서 외쳤다.


"야, 너 거기서 뭐해!"


"..."


벌써부터 뒤쪽에서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 근래에 나를 감시하고 있던 저택 관리인의 소행이리라. 나는 그가 방문을 열기 전에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머리부터 땅바닥에 떨어지도록 몸을 던진 나는 섬뜩한 부유감을 느끼며 미리 준비해둔 가디언 소울 앱을 작동시켰다.






작가의말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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