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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현의 세계입니다.

분홍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암현
작품등록일 :
2017.06.16 22:52
최근연재일 :
2019.04.02 12:16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11,375
추천수 :
31
글자수 :
220,138

작성
17.08.15 20:01
조회
89
추천
1
글자
6쪽

43

DUMMY

“그럼 다음 사람을 불러주시면 좋겠소.”

“짧은 시간 감사했습니다.”


그라시아는 허리를 굽힐 정도로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그 다음 수장의 오른팔이며 집사를 맡고 있는 룬켈, 룬켈을 보좌하는 아하논과 그 아래 다섯 명의 하인들, 하녀들을 통솔하는 탈라와 그 아래에 있는 열 명의 하녀들의 순서로 질문이 이어졌다.

짧고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록셀의 결백이 밝혀졌다는 것을 제외한 성과는 없었다. 필리오림의 눈으로 판별 할 수 없는 거짓은 없었기에 팔라둔 스스로도 이 결과엔 신뢰할 수밖엔 없었다.

긴 한숨이 가면 아래로 뱉어졌다.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잔 것이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신경 쓸 일이 많은 날들이었다.

성과 없는 수사와 늘어가는 민간인 사상자의 피해, 화난 시민들의 민심, 법관으로써의 사명감, 국왕의 기대와 재촉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고 복잡한 머리에서 비롯된 피로가 내장과 근육으로 타고 들어가고 있었다.

식사도 잘 하지 못하고 일상적인 업무에도 쉽게 피로가 쌓였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는 것이 필리오림으로써의 첫 걸음이라고 배웠지만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평가였다.


“피곤하신가요?”


마지막 순서였던 빨간 머리카락의 하녀, 랑케가 팔라둔의 피로를 감지한 것 같았다. 이미 내뱉은 한숨을 다시 삼킬 순 없었기에 허리를 곧게 펴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유지하려 했다.


“아니, 괜찮다. 자네가 마지막인가?”

“예, 나머지는 물품을 납품하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뿐입니다.”


필리오림이라면 누구라도 사용해야 하는 거짓을 판별하는 술법의 정확도는 매우 뛰어나다. 이는 건국 영웅 중 한 명인 하누 필리오림이 만든 사실을 보는 눈이라는 술법으로 필리오림의 자격을 얻은 이들의 한쪽 눈에 새김으로써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법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술법이지만 인간이 만들었기에 그에 대한 부작용도 있기 마련인데 술법을 새긴 쪽의 시력이 상실되며 집중하지 않으면 쓰지도 못하고 장시간 사용하면 피로가 쉽게 쌓인다.


“그런가. 그럼 나가도 좋네.”


가져온 것은 없었지만 팔라둔도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승에게서 재능의 깊이가 얕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던 그였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그 한계를 경험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 피로를 다른 사람에게 들킨 것 역시 몇 년 만이라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던 랑케가 잊은 것이 있었는지 문고리를 되돌리고 돌아섰다.


“아, 그라시아 님께서 식사 하고 가시겠냐고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해의 기울기를 봐선 벌써 점심 식사 시간인 모양이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살아 있는 이상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마나폴로도 불러주게.”

“네, 알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나갔고 이어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나폴로가 들어왔다.


“성과는 있었습니까.”

“아니, 록셀은 깨끗하다.”

“다행이군요.”


조금 기다리자 식사가 들어왔다. 좋은 재료들만 쓴 것이 상당히 호화로워 보이는 식사였지만 마나폴로는 양이 적다며 툴툴거렸고 팔라둔은 조금만 먹고서 입에 대지 않았다.

식후에 따뜻한 차가 나왔지만 팔라둔은 마시지 않았고 표정이 좋지 않은 마나폴로는 술 대신이라고 생각하며 쭉 들이켰다.


“마차리 쪽은 어떤가.”

“준비는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신경 써주게.”

“예, 필리오림.”


죽음에 직면한 자의 눈이었다. 로투와 싸워, 용의 칭호를 가진 자와 싸워 이길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나폴로의 실력은 팔라둔도 잘 아는 바였지만 그런 그가 이길 수 없다고 평가한 인물이 로투였기에 팔라둔도 그와 같은 감정을 가질 수밖엔 없었다.


“그건 그렇고 린다와 대련이 있었던 것 같은데.”

“상황이 이런 상황이니 할 수 없죠.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꽤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별로요. 그 녀석은 아직 약하니까요.”

“아니, 린다가.”

“그런가요?”


도끼 휘두르는 시간의 반만 떼 그녀에게 신경써준다면 혹은 지금이 평범하게 일상을 보낼 시간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팔라둔이 예전부터 내심 아쉬워하는 부분이었다.


“뭐, 소질은 있습니다. 몇 년 정도만 더 노력하고 실전 경험을 쌓는다면 지금의 제 수준까진 오르겠죠.”

“자네는······”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그럼 가지.”


식기를 한곳에 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가문을 돌아다니며 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그 역시 성과는 없었다.

유력 가문을 용의선상에서 배제하고 나니 더더욱 적을 알기 힘들어졌다. 해가 저물고 관사로 돌아온 팔라둔은 저녁식사를 물리고 이제껏 수집한 정보를 정리했다.


로투, 분홍신, 세뇌당한 암살자들, 인형술사, 용의선상에서 제외된 유력가문의 사람들, 고귀한 시대라는 집단, 유물, 유품, 계속되는 살인, 화난 시민들, 국왕의 기대와 재촉, 입수하지 못한 정보, 무심코 잊기 쉬운 것, 발상의 전환, 마차리, 우파나히, 마나폴로, 니아, 린다, 그라시아, 알리샤······


“시민들의 안전과 법치국가의 기반이 되어 죽는 것은 필리오림으로써 어떤 조건도 없이 해야 할 일이다······”


혼자 있는 방 안에서 그런 웅얼거림이 계속되었다. 무거워지는 짐에 제대로 된 잠도, 식사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금씩 쇠약해져가고 있었지만 세뇌에 가까운 신념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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