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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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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우(雪雨)
작품등록일 :
2015.06.29 11:01
최근연재일 :
2015.07.16 19:00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72,389
추천수 :
1,588
글자수 :
132,756

작성
15.07.03 19:00
조회
3,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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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글자
14쪽

서큐버스 <2>

DUMMY


서미랑의 정장 차림에 서재일은 시선을 빼앗겼다.

깔끔한 모습은 물론,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단벌머리에 장식한 토끼 모양 머리핀. 게다가 남자라면 거의 다 좋아할 검정 스타킹까지!

평소부터 누나 덕분에 정장 차림에 호감을 가졌던 서재일은 저도 모르게 서미랑이 모습을 최대한 기억해두려고 애썼다.

“재일 씨?”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나서야 서재일은 정신을 차렸다.

“아, 미랑 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차림새로 보아 발걸음이 관문을 향하던 건 아닌 거 같다. 평소의 그녀는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입고 왔었으니까.

“은행 가던 길이었어요.”

“은행이요?”

“네. 저 근처 중소기업에서 경리직 맡고 있거든요. 거래에 필요한 서류가 있어서 사장님 대신 발급받으러 가는 길이었어요.”

서미랑이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처음 듣는 기업이름이었다.

“잘 모르겠죠?”

“죄송하게도…….”

“아뇨, 설립된 지 3년 밖에 안 된 곳이라서 대부분 모를 거예요. 저도 입사하고서야 알았거든요.”

서미랑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본인 회사에 큰 열정은 갖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재일 씨는 어디 가던 길이었어요?”

“관문 가기 전에 가볍게 산책하던 중이었어요.”

“그렇구나~. 어깨에 그거는요?”

서미랑이 서재일의 어깨를 가리켰다.

한 여름의 더위에 지쳤는지, 사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재일의 어깨에 찹쌀떡처럼 추욱 늘어져 있었다.

서재일은 어제 있던 일을 전부 설명했다. 그러자 부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럼 요일 스테이지에서 크리쳐를 얻은 거예요? 재일 씨 되게 운 좋았네요.”

서미랑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사나를 바라봤다. 딱히 진입자는 경계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더워서 신경 쓸 기력도 없는 건지, 사나는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다.

“완전 귀엽다…….”

서미랑이 사나의 볼을 쿡쿡 찔렀다. 그제야 사나가 실눈을 뜨며 서미랑을 바라봤다.

“퍄퍄…….”

지금까지와 다를 거 없는 말. 하지만 서미랑을 바라보는 사나의 시선은, 행인을 경계하는 고양이의 것과 흡사하다.

“야, 사나 왜 그래.”

“모르는 여자가 자기 아빠한테 접근해서 질투하는 건가?”

“아, 아빠요?”

그의 나이 올해 스물 넷.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는 상황에서 아빠라는 얘기를 듣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크리쳐는 주인을 부모로 인식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아빠죠.”

“아빠…….”

작게 되새기며 서재일이 사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나가 함박웃음을 보였다.

“퍄퍄!”

아빠 소리를 듣고 들어서 그런 걸까. 퍄퍄가 파파로 들렸다.

그 순간 물결치던 감정이 고요해졌다.

‘아빠라…….’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부모님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추억이었던 과거가 지금은 가슴 저린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딱히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라도 부모님의 남은 숨결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 재일 씨? 속이라도 안 좋아졌어요? 표정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은행 가신다면서요? 산책할 겸 같이 가죠.”

“정말요? 안 그래도 가는 길 심심했는데 잘 됐네요!”

두 사람은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은행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눴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사나가 계속 쀼루퉁한 표정을 보였다. 물론 서재일이 바라볼 때는 꼬리를 살랑거렸지만.

“천국이다…….”

잠시 후.

은행에 도착한 서재일은 에어컨 바람에 모든 더위를 싹 잊게 됐다. 사나도 기운을 차렸는지 서재일의 어깨에서 벗어나 머리 위를 빙빙 맴돌았다. 한참을 그러다 속이 어지러워졌는지 다시 어깨 위에서 축 늘어졌지만.

“좀 기다려야 할 거 같아요.”

번호표를 뽑고 돌아온 서미랑이 근처 빈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으며 번호표를 훔쳐보니 대기 번호가 20번이었다.

“어차피 진입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괜찮아요. 밖에서 좀처럼 만날 일도 없는데 얘기나 나누죠.”

“하긴, 관문에서는 잡담보다는 싸움에 집중해야 하니까요.”

“그렇죠. 아, 그러고 보니 몸 상태는 어떠세요?”

서미랑이 위급한 상황에 빠진 게 바로 어제 일이다. 어제 술자리에서도 종종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멀쩡해졌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한 때는 어떻게 되나 정말 걱정했는데.”

“전부 재일 씨 덕분이죠~. 제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 말에는 진심어린 감사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여자기도 하고, 진입자가 되기 전에도 딱히 신체능력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아직도 위급한 상황이 되면 많이 당황해요. 만약 그때 재일 씨가 익스펠러의 약점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강제로 회사 잘렸을지도 몰라요.”

“하하…….”

계속되는 칭찬에 서재일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어나더 에피소드에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파티원을 구해 감사인사를 받은 적은 많았지만, 현실과 게임의 차이는 있는 법이다.

서미랑과 만난 지 이제 겨우 이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목숨을 걸었던 사이라 그런 지 대화는 부담감 없이 자연스레 흘러갔다.

“근데 경리 일은 왜 하고 계신 거예요? 관문에서 버는 돈이 더 많을 텐데.”

“제가 좀 워커홀릭이거든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계속 일만 하다 보니까, 이제는 일 하지 않고 얌전히 놀면 어째 찜찜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녁때까지는 일하고, 퇴근하면 관문으로 향해요.”

“관문…… 좀 무섭지 않아요?”

“무섭죠. 잘못하면 죽는데 안 무서울 리가 있나요? 열심히 일해서 번 돈 써보지도 못하게 되는데.”

“…… 돈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돈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재일 씨는 돈 싫어요?”

“설마요.”

현재 자신이 관문을 정복하려는 이유도 바로 돈 때문이다. 돈에 안중이 없었다면 진입자가 되었어도 관문에는 진입하지 않았을 거다.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스트레스 푸는 용으로는 관문이 딱 좋은 거 같아요. 강현 오빠들이랑 같이 파티 맺는 거 아니면, 전 항상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만 사냥하거든요.”

“그 이상 갈 생각은 없어요?”

“당분간은요. 아! 하지만 재일 씨랑 함께라면 그 이상을 노려볼 수도 있겠네요. 믿음직하시니까.”

상체를 앞으로 쭈욱 숙인 서미랑이 고개만 살짝 치켜들며 서재일을 바라봤다. 상쾌한 웃음에 얼굴이 붉어진다.

“재일 씨는 최종목표가 어떻게 돼요?”

“전…… 열 개의 관문을 전부 정복하는 게 목적이에요.”

“진짜요?”

“남자라면 꿈은 크게 가져야죠. 물론 실현도 해야겠지만.”

“하핫. 왠지 재일 씨라면 가능할 거 같아요. 관문에서의 모습만 보면 초보 같은데, 막상 스테이지로 들어가면 베테랑처럼 변하고. 또 크리쳐도 얻었잖아요?”

서미랑이 서재일의 어깨에 앉아있는 사나의 볼을 푹푹 찔렀다. 그러자 사나가 매섭게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윽고 서미랑의 차례가 왔고,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사장이 발급받으라 한 서류를 전부 발급받았다.

마지막으로 ATM에서 돈까지 뽑은 그녀가 서재일에게 돌아왔다.

“자,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회사로 안 돌아가도 돼요?”

“사람 많아서 늦었다고 하면 돼요~. 가끔씩 월급루팡이 되어도 괜찮거든요.”

“하하…… 미랑 씨도 은근 야무진 구석이 있군요.”

“바보 같이 성실하면 사기당하기 쉽다고 배웠거든요.”

잡담을 나누면서 두 사람은 은행에서 나왔다.

강렬한 햇빛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때였다.

“앗?!”

서미랑이 갑작스레 비명 질렀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돈 봉투가 온데간데 없었다.

“도, 돈! 내 돈?!”

서미랑이 저 멀리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이 무더위 속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수상하기 짝이 없다.

“야! 이 도둑놈아!”

소리 지르면서 서미랑이 수상한 사내의 뒤를 쫒으려고 했다. 하지만 짧은 치마와 굽이 높은 하이힐은 그녀의 추격을 방해할 뿐이었다.

“내 돈…… 백만 원이나 되는데…….”

기어코 서미랑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진입자의 기본 연봉이 높더라도, 백만 원이 적은 금액은 아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려고 한다.

“경찰 부르고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세요.”

그런 그녀의 어깨에 서재일이 손을 올려놨다. 눈물 맺힌 눈으로 바라보니 믿음직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저 새끼 제가 잡아올 테니까요.”

뭐라고 말을 걸기도 전에 서재일이 무리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어디로 갔지?’

북적북적한 인파를 쭉 뚫으면서 서재일은 소매치기 범의 소재를 살폈다.

‘저 앞에 있는 신호등을 건너기 전까지는 일직선이라 마땅히 도망칠 곳도 없을 텐데.’

놈은 가까이에 있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독특한 그 차림새!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퍄퍄!”

성인 남성이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골목을 지나쳤을 때, 사나가 서재일의 머리를 때렸다.

“야, 가만히 있어. 지금 급하다고!”

“퍄퍄!”

사나가 아까 전 지나친 골목을 꼬리로 가리켰다.

‘혹시 저쪽에 있는 건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크리쳐가 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칠 리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재일은 골목으로 돌아갔다.

“야!”

그리고 발견했다. 골목의 끝자락을 비집고 있는 소매치기 범을!

갑작스런 서재일의 등장에 당황했는지 소매치기 범이 다급해졌다. 지금부터 이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늦는다.

‘젠장, 이러다 놓치겠어!’

그렇다고 반대편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다. 눈앞에 범인을 두고 놓칠 상황이 오니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때 사나의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야, 사나! 너 혹시 나 데리고 날 수 있어?

“퍄?”

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데리고 반대쪽으로 날 수 있냐고. 반드시 저 녀석을 잡아서 경찰서에 집어넣어야 해! 안 그러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진정으로 남을 위한 그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퍄!”

사나가 함박웃음을 보였다.


<사나의 호감도가 1 증가했습니다.>

<사나의 의지에 따라 유혹을 사용합니다.>


사나의 화살표 모양 꼬리에 분홍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퐁!

이윽고 그 에너지가 소매치기 범을 향해 날아갔다. 뭔가 대단한 일이이라도 생기길 기대했건만, 그걸로 끝이었다.

바뀐 점이 있다면 소매치기 범이 갑자기 멈췄다는 것.

또 다른 변화는 잠시 뒤에 볼 수 있었다.

“…… 멋있는 남자.”

선글라스를 벗고 서재일을 바라보는 소매치기 범의 표정이 심상찮았다는 거다.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하지만 상대가 남자였기에 기분만 상할 뿐이었다.

“뭐, 뭐야?”

이윽고 소매치기 범이 서재일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나가 배를 붙잡고 꺄르륵 웃었다.

‘설마 사나의 짓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느낌상 유혹당한 타깃은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방금 전까지 도망치기 급급하던 소매치기 범이 저런 재수 없는 얼굴로 올 리가 없으니까.

“그 자리에서 멈춰!”

현재 상대방은 자신에게 유혹된 상태!

무얼 시켜도 들을 게 분명하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네 눈앞에서 사라지겠어.”

“그, 그건 안 돼! 제발 어디에도 가지 말아줘!”

“계속 내가 보고 싶으면 우선 돈 봉투를 넘겨! 그리고 경찰이 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알겠어, 알겠으니까 약속만 지켜줘.”

안색이 새파래진 소매치기 범이 서재일에게 돈 봉투를 던졌다.

‘정확히 백만 원이군.’

신속하게 액수를 파악한 서재일은 바로 서미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범인을 붙잡았으니까, 경찰과 함께 이곳으로 오라고.

잠시 후.

경찰차를 타고 서미랑이 찾아왔다.

“재일 씨!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서재일이 서미랑에게 돈 봉투를 건넸다.

“정말로 돈 봉투를…… 대체 무슨 수로 잡은 거예요?”

“사나가 도와줬거든요.”

“그렇군요…… 근데 저 사람, 되게 기분 나빠진 거 같은데요……?”

소매치기 범과 눈을 마주친 서미랑이 질겁했다.

사실 다른 사람이더라도, 남자가 남자를 향해 구애의 표정을 보이고 있으면 이상하게 여길 게 당연하다.

“자! 경찰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어. 이제 날 받아주는 거지?!”

“뭐라는 거야, 미친놈아?! 내가 널 왜 받아줘?”

“뭐, 뭐야……. 난 널 위해서 돈까지 포기했는데, 내 연심을 갖고 논 거였어?”

“처음부터 받은 기억도 없다만.”

더 얘기하면 머리만 아파질 거 같아서 서재일은 바로 경찰에게 소매치기 범을 넘겼다. 경찰차에 타는 와중에도 녀석은 계속 서재일에게 사랑을 구애했다.

“이제 좀 조용하네.”

경찰차가 왔을 때는 구경꾼이 몰렸지만, 한참이 지나자 다들 제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고마워요, 제일 씨.”

서미랑이 고개를 꾸벅거렸다.

“하마터면 제 돈으로 회사 돈을 메울 뻔 했어요.”

“되게 억울할 뻔 했네요.”

“다 재일 씨 덕분이에요.”

방긋 웃으며 말한 서미랑이 대뜸 서재일의 손을 붙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의 손. 누나 제외하고 몇 년 만에 맞닿은 여자의 손은 가슴을 떨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오늘 봤을 때, 어제보다 더 멋있어졌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로서 확실해졌네요. 역시 재일 씨는 멋져요.”

서미랑이 방긋 웃었다.

그 미소에 서재일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그저 고개를 돌린 채, 서미랑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사나를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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