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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글쟁이 세피아톤

테이머 아카데미 유학생이 되었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세피아톤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2.05.20 17:59
최근연재일 :
2022.07.02 18:00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17,991
추천수 :
763
글자수 :
270,102

작성
22.06.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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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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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17쪽

유혹

DUMMY

####




담묵색의 허공이 안개처럼 사위를 채색한다. 눈을 떠도, 감아도, 비벼도 무엇 하나 바뀌질 않는다.

차라리 유령들이 그득한 동굴처럼 음산한 비명이라도 메아리쳤으면 좋겠네. 이대로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혀있다간 무(無)로 돌아갈 것만 같아서.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명예, 부, 지위, 꿈, 자유······. 내겐 뭐 하나 남은 게 없으니까. 그나마 꼽아보자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몸뚱이 정도겠지. 차라리 땅에 묻혀 고운 흙으로 변하고 싶다. 날 양분 삼아서 자라는 곡물이 누구의 배를 채워줄 수만 있다면······.

적어도 욕심 가득한 졸부의 인형 노릇을 할 때보단 천 배 나을 테니.


그나저나 결국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구나.

날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길바닥에 내버렸는지.

잃어버린 기억에는 소중한 추억이 한 줌이라도 있었는지.


“슬슬 눈을 뜨게나.”

“······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날 불러 깨웠다. 그 순간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담묵색 안개가 걷히고 창백한 섬광이 내 눈을 맹렬히 찔러댔다.

아니, 그건 내 착각이었다. 어둠을 간신히 밀어내는 희미하고 음산한 조명. 단지 오랜만에 빛을 본 덕분에 안구가 고통을 호소하는 것뿐이다.


여긴 어디지?

난 얼마 만에 눈을 뜬 거지?

누가 날 부르는 거지?


“정신이 드나, 윤나래 양.”

“······!”


나긋나긋함 속에 매복해있는 적의.

알비노 환자처럼 새하얀 피부.

풀풀 피어오르는 약품 냄새.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우으으윽, 으아아아아아!”

“함부로 움직이지 말게. 이 고정용 밴드, 비록 소모품이긴 해도 소중한 자산이란 말일세. 자네 양아버지께서 넣어주신 지원금으로 구매했지.”


움직일 수가 없다. 아무리 맹렬히 몸을 비틀어도 어깨와 팔꿈치, 무릎 뼈가 비명을 지를 뿐이다.

나는 단단히 결박돼있었다.

광기가 서린 백금발 남교수에게.


“자네한테 딱히 악의가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네. 단지 내 소중한 연구소가 난장판이 되는 꼴은 보기가 싫어서 말일세.”

“연구소?”


고정된 시야에는 그저 기묘한 구조로 얽힌 철골, 반원 형태로 우뚝 솟은 회색 천장이 비칠 뿐이다. 생소한 장소다. 아카데미에 이런 방이 있었던가?

정체불명의 약품 냄새가 코끝을 계속해서 찌른다. 보건실이나 병원에서 접할 수 있는 소독약 내음과는 사뭇 다르다. 무언가 위험하고 불길한 물질이란 직감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야? 당장 보내줘!”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하지만 썩 추천할 만한 선택지는 아닐세.”

“뭐?”

“바깥에 나가봐야 자네가 있을 장소가 없으니까.”


곧이어 아달베르트 교수는 내 얼굴에 폰을 들이대고 홀로그램 영상 하나를 내보였다. 반투명한 청색으로 채색된 감시카메라 영상. 그걸 마주한 순간,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가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닥쳐, 브루노! 알랑방귀 그만 뀌고 청소나 제대로 해! 이게 뭐야? 하얀 장갑 끼고 문지르니까 때가 나오잖아!」


············.

저장된 영상이 아니다. 내 아카데미 전용실에서 촬영되고 있는 영상이다. 그걸 구분할 정도의 지식은 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실시간으로 흘러가고 있는 시간. 3월 14일 오전 11시 42분. 정신을 잃고 무려 하루가 지났다.


“설마,”

“이사장님께선 자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네. 이를 어쩌나? 돌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하게 생겼군.”

“······.”

“이해하네. 죽은 사람 흉내 내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능글맞게 혀를 쯧쯧 차는 아달베르트 교수. 반사적으로 의문 부호가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한 명 더 있는 것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저런 아이를 무려 수십 명이나 봤으니까. 나처럼 반쯤 끌려와 성형수술과 교육을 받은 고아 소녀들.

진짜 의문은······.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이사장 집안 관계자들만 아는 줄 알았는데!”

“정정해주겠네. ‘자네를 제외한’ 관계자들만 알고 있는 진실이지.”

“뭐?”

“따돌림 당하는 것 같아서 슬프나? 걱정 말게. 곧 자네한테도 보여줄 테니.”


끼기기긱.

날 결박하고 있던 장치가 서서히 각도를 내렸다. 아마 회전 기능이 달린 이동식 침대인 듯하다.

곧이어 시야에 실내 전경이 들어오자,


“······.”


정신이 아득해지며 목소리를 잃고 말았다. 진동하는 휴대폰처럼 눈이 파르르 떨린다. 심장박동이 두 배, 세 배로 빨라진다.

세로로 길쭉한 원통형 인큐베이터들.

그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녹색 액체.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참 안타까운 비극일세. 셰익스피어도 한 수 접고 가겠어.”


쯧쯧 혀 차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아달베르트 교수의 표정에 비감과 동정이 서린다.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워. 자식이 유명을 달리하면 추억의 사진집에만 묻어두면 될 텐데, 굳이 이런 수를 써서까지 곁에 두고 싶을까.”

“서, 설마.”

“그래, 자네는 고아가 아닐세.”


톡.

내 희망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 하나가 쓰러졌다.


“이 연구소에서 배양된 인공 생명체지. 이사장이 간곡히 부탁하더군. 생전의 딸과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


투둑.

기둥 2개가 더 무너졌다.

거짓된 청사진으로 도배한 구조물이 흔들린다.


“오해하지 말게. 나도 이러긴 싫었다네. 우리 디아볼로스 군도 이토록 잔인한 일을 용납하진 않거든. 몇 번이고 반대했어. 다른 요청은 없냐고.”

“······.”

“하지만 고집이 참 강한 분이라서 말일세. 어쩔 수가 없었네. 저 완벽한 피조물을 완성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니까.”


이번엔 침대가 가로로 방향을 틀었다. 바퀴라도 달렸는지 매우 부드럽게 움직인다. 곧이어 내 시야를 맞이한 물체는 상상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지름이 족히 10m는 넘어 보이는 초대형 인큐베이터.

온갖 생물의 피부와 장기, 근육을 짜깁기한 것처럼 흉측한 생명체.

그럼에도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디자인된 체형.


“EI-01. 85종의 몬스터 유전자를 결합해서 만든 녀석이지. 아름답지 않나?”

“······.”

“저게 눈을 뜨는 순간, 이 근방은 온통 쑥대밭이 될 거야. 황홀한 비명과 달콤한 피, 탐스러운 근육 조각이 사방에 튀겠지. 그럼 우리 군의 대업이 위대한 첫 발을 내딛는 거고.”

“그럼 난······ 저걸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부산물······.”


무너진다.

와르르 요란한 굉음과 함께.


친부모는 누굴까 하는 의문.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갈망.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

지금껏 내 마음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들이 볼링 핀처럼 일시에 쓰러진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아아아―!!!


“참 딱하게 됐어. 나도 죄책감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네. 어찌 됐든 자네는 내 성공작이거든. 그런데 이토록 불행한 운명을 마주하게 하다니.”


절망이 뺨을 타고 주륵주륵 흐른다. 아무리 쏟아내도 결코 바닥날 것 같지 않다. 바다에 연결된 수도꼭지처럼.


“그래서 내가 자네한테 특별히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데.”

“자비?”


오열로 인해 신경이 마비되기 직전, 아달베르트 교수가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만년설처럼 하얀 미소에 호의와 동정이 짙게 깔려있다. 가식인지 진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차라리 디아볼로스 군에 붙지 않겠나?”

“뭐?”

“우린 자네가 필요해. 인간처럼 능수능란하게 몬스터를 다룰 줄 아는 간부. 굉장히 귀한 인재거든. 다들 쌍수 벌리고 환영할 걸?”

“······개소리 집어치워.”

“아니, 잘 들어보게. 자네가 원한다면 놓아줄 테니.”


아달베르트 교수, 아니 디아볼로스의 부하는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밉지 않나?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마음이 안 드나? 하나둘씩 떠올려보게. 자네가 그동안 만난 인간들을.”

“인간들······.”

“우선 첫 번째, 이사장 부부. 자네의 자유를 박탈하고, 이미 죽어서 흙이 된 소녀를 그대로 흉내 내게 만들었지. 마치 의지가 없는 꼭두각시처럼 말일세. 자네가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는다면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기는 걸세.”


맞아. 그 우스꽝스런 콧수염을 단 남자. 교육받은 대로 아빠라는 호칭을 붙이긴 했지만, 솔직히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다.

쓰레기.


“두 번째, 항상 자네 곁에 붙어있던 집사. 신변을 지킨다는 말은 명분일 뿐이고, 실상은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교정하는 교관이 아니었나? 사생활 따윈 처음부터 없었지.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그것도 맞아. 난 항상 브루노가 두려웠어. 내 실수를 레이더망에 포착하는 순간, 그 녀석은 칼같이 윤현수에게 일러바치곤 했지. 그동안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 몰라.


죽이고 싶어.

산 채로 씹어먹고 싶어.

다들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세 번째, 아카데미 관계자들. 자네가 그런 악마들에게 붙잡혀서 고문당할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 있던가? 그저 천성이 그런 거라며 적으로 돌리지 않았나? 가면 뒤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것도 몰라주고 말일세.”


······어?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갑자기 방해물 하나에 걸리고 말았다. 통나무나 돌부리처럼 딱딱한 감각이 아니다.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리고 이건 운명이야. 얼마 전에 매우 신기한 현상을 겪었다네. 자네 육체를 완성해도 도통 눈을 뜨지 않아서 고민에 빠져있는데, 정체 모를 목소리가 내게 영감을 주었다네. 그 가르침대로 DNA 구성을 재배열해보니 놀랍게도 의식이 깃들더군. 모든 실험체 중에 최초로!”


아달베르트는 자아도취에 빠져 황홀한 목소리를 냈다.


“똑같은 방식으로 재구현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 난 그때부터 확신했지. 자네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

“우리한테 오게나. 굳이 인간사회로 돌아갈 의무 따윈 없어.”

“있어.”

“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뺨에는 온기가, 눈에는 초점이 돌아온다.


“따뜻하게 말을 걸어준 사람······. 딱 한 명.”

“누구 말인가?”

“가면 뒤로 흐르는 피눈물을 닦아주고, 깜깜한 마음속에 아직 불빛이 남아있다고 위로해준 사람. 절벽에 매달린 나한테 손을 뻗어준 은인.”


이름을 말할 순 없다.

그 소년을 위험에 빠뜨리긴 싫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랑 칼을 맞대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을래.”

“두 번 다시 묻지 않겠네. 누구인가?”

“절대 말 안 해.”

“네리오, 디프테라!”


그러자 아달베르트는 노기가 어린 채 언성을 높였다. 곧이어 빗처럼 뻣뻣한 단발의 여자와 검버섯 가득한 노인이 재빨리 달려왔다. 혹시 부하인가?


“아무래도 순순히 협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고집이 엄청나군. 네리오, 넌 계획대로 보안 시스템에 침입해서 할 일을 하게. 그리고 디프테라!”


교수의 시선이 음흉한 노인에게로 향한다.


“‘디트로톡신’을 준비하게.”

“네이~ 알겠쑵니다!”


노인은 혀 짧은 소리로 대답하더니, 쩝쩝 입맛을 다시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송곳처럼 굵은 주삿바늘을 팔뚝에 예고도 없이 박아 넣었다. 환자를 걱정하는 의사의 배려, 실험체를 다루는 과학자의 섬세함 따윈 일체 없었다.


“아아아아악!”


서늘하고 날카로운 이물질이 살갗을 파고든다. 더 깊숙이, 더 깊숙이. 따뜻한 액체가 순환하는 통로까지.


“디트로톡신 배합을 개시함다! 완성까지는 앞으로 2시간 30분!”

“뭐? 진작 마련해둔 여분이 없단 말인가?”

“워낙 민감한 물질이라 보관이 어렵씀다! 그 대신, 배합이 끝나는 즉시 이 관을 타고 자동으로 투여하도록 장치해두었씀다!”

“알겠네.”


본능적으로 위기감이 들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디트로톡신이라니, 그게 뭐야?”

“궁금함까, 아가씨? 제가 최근에 개발한 인공 신경전달물질으로써······.”


잔뜩 흥분한 노인이 왕방울만한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아달베르트가 곧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제지했다.


“불필요한 설명은 생략하라고 하지 않았나, 디프테라. 쉽게 말해주지. 의지력을 낮추고 우리 군에 대한 충성심을 강제로 주입하는 물질이라네.”

“뭐?”

“부작용으로 수명이 반감되긴 하는데······. 자네가 우리 제안을 거부하니 어쩔 도리가 없네. 스스로 택한 길이니 감내하게나.”

“싫어! 이거 빼! 빼라고!”


열심히 몸부림을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사람의 근력으로 풀 수 있는 결박이 아니다. 디아볼로스 군 3인방은 날 흘끗 바라보더니 피식 조소를 흘렸다.


“아참, 디프테라. 이년은 위층으로 데려가게나. 곧 위대한 걸작이 완성되기 직전이니.”

“네에에에에입~!”


위대한 걸작?

설마 저 거대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고 있는 흉물?

저게 깨어나면······.


“나 풀어! 당장 풀어어어어―!!!”

“그럼 편안한 곳으로 모시겠씀다, 아가씨~!”


디프테라라고 불린 노인은 내 결박 장치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나머지 둘은 다른 볼일이 있는지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곧이어 좁고 어두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에 다다르자, 훨씬 밝은 조명과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실험실이 드러났다.


“2시간 30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긴 너무 길군요?! 시간이 되면 돌아오겠씀다! 그땐 훨씬 얌전하고 고분고분해지겠지요!”


검버섯 노인도 자리를 비우자, 난 결박 장치에 온몸이 묶인 채 덩그러니 방치되고 말았다. 곁에는 유리 속에 연분홍빛 액체시약이 찰랑이는 실험기구가 있을 뿐. 투명하고 얇은 호스가 그 유리 내부와 내 혈관을 이어주고 있었다.


“우으으으윽, 우으으으으으으―!!!”


온몸을 비틀며 소용없는 발악을 이어가보았지만 거기까지. 체력이 다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데, 결국 디트로톡신이라는 물질이 투명한 호스를 연분홍색으로 채색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차갑고 섬뜩한 감각이 팔뚝과 어깨, 가슴, 목을 차례로 잠식해간다.

그리고 그 서늘한 감촉이 머릿속을 건드리는 순간, 사고회로가 완전히 새로운 구조로 재구성돼가는 게 느껴진다. 반항심이 가라앉고 평온한 기분이 차오른다.

싫어.

이런 거짓 감정 따위······.


“나가, 나가! 내 몸에서 나가아아아아―!!!”


그러나 구속 장치에 머리를 쾅쾅 부딪치는 것도 잠시, 디트로톡신의 이물감이 자연스럽게 몸을 순환하며 힘을 빼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의지로 힘을 뺐다.

더는 저항할 필요가 없으니까.


······.

왜 거절했을까? 그 달콤한 제안을.

그냥 자신한테 솔직해지면 되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데.

그 증오스러운 사람들을 토막내버리면 되는데.

시답잖은 가면 따위 내버리고 본능에 몸을 맡기기로 한 순간,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쾌락이 내 뇌를 물들여갔다. 모든 고뇌와 갈등, 고통이 증발한다.

아, 기분 좋아.

처음부터 이럴 걸.


“윤나래!”


그때, 실험실 입구를 막고 있던 철제문이 난폭하게 찌그러지며 쓰러졌다.

그 노인인가? 이토록 거친 태도는 아니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그쪽을 바라보자, 어떤 아카데미 남학생이 낯선 얼굴을 내비쳤다.

은발에 하얀 피부, 잿빛 교복 차림. 꽤 이국적인 이목구비다. 혹시 다른 대륙 출신?


“윤나래, 정신 차려!”


그는 다급한 태도로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초면일 텐데도 애절한 집착이 가득 서려있다.

귀찮다. 거슬린다. 당장 쫓아내고 싶다. 움직일 수만 있어도 한 방 먹여줄 텐데. 이 구속 장치를 어떻게 풀 방법은 없을까?


“설마 늦은 건가? 너 눈이 왜 그래?”

“꺼져. 말 걸지 마. 너 누군데?”

“······.”

“혹시 침입자? 잘도 간부들 눈을 피해서 들어왔네.”


털썩.

내 당연한 반문에 남학생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세상을 잃은 것처럼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그러나 별 동정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잘 됐어. 계속 저러고 있으면 곧 잡힐 테니까.


“······윤나래.”


대략 몇 분쯤 흘렀을까?

소리 죽여 오열하던 은발 남학생이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어깨에 겨우 멜 수 있을 만큼 작은 사이즈다. 혹시 무기라도 꺼내려나 싶어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이거 기억나?”


남학생이 조심스레 내민 물건.

그건 고급스러운 가죽 커버 일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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