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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글쟁이 세피아톤

테이머 아카데미 유학생이 되었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세피아톤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2.05.20 17:59
최근연재일 :
2022.07.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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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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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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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0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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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위험한 초대(2)

DUMMY

응접실을 나서고 우리가 향한 곳은 나선 계단이었다. 한 바퀴, 세 바퀴, 열 바퀴. 꼭 쳇바퀴나 러닝머신처럼 가도 가도 끝이 없군.

반사적으로 엘리베이터는 없냐고 서민적인 불만이 튀어나올 뻔했다. 부자들은 이런 불편함도 하나의 격식이라고 보는 거겠지.


“에고, 다리야. 괜히 구불구불하게 만들었나.”


······꼭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여길세.”


저택 미로 투어를 끝마치고 마침내 당도한 전시실. 딱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대영 박물관 미니 버전.


“많다······.”


희귀 몬스터들을 본뜬 조각상, 고대 건축물의 외벽, 귀금속이 박힌 황금 잔 등등. 값나가는 물건들이 시대와 지역 구분 없이 대충 보기 좋은 구도로 정렬돼있었다.

뻔뻔함과 착취가 일상인 부자들은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 걸까.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네가 찾는 물건들일세.”


뒤이어 윤현수 이사장이 자신만만하게 구석을 가리켰다. 두꺼운 방호 유리에 싸인 채 고고한 미를 뽐내는 고서 몇 권. 보관 상태가 양호한지 약간의 변색 말고는 본래 형태가 온존돼있다.


“와이즈 대륙의 유적에서 발견한 유물들이지. 로기아의 전설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어디 읽을 수가 있어야지.”

“감사합니다. 잠시만 구경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게. 함부로 건드리진 말고.”


뚜벅뚜벅.

윤현수 이사장은 쿨하게 전시실을 나섰다. 별로 아끼는 물건은 아닌 모양이군. 그냥 잠깐 읽게 해달라고 하면 안 될까.

이럴 때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있지. 연락처를 구해놓길 잘했네.


“교수님, 주말에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노아 라이즈벨트 군?」


폰으로 그분을 호출했다.

임승우 교수. 유일하게 이 건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 후덕한 인상답게 탐스럽게 초코바를 빨고 계시는군. 팔자 좋은 게 부럽다.


「웬일이죠? 휴일인데 푹 쉬시지.」

“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로기아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거 같습니다.”

「켁, 켁켁켁켁.」


미안합니다.

초콜릿으로 체하실 줄은.


「정말? 한 번 보여주세요!」

“혹시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옆으로 비켜나 방호유리 속의 고서들을 비추었다. 교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 반응도 잠시,


「에이, 설렜잖아요.」

“설마 아닙니까?”

「400년 전의 저명한 사관 울리오 프랑켄이 집필한 사서입니다. 심지어 사본이군요. 로기아에 대한 내용은 없어요.」

“아.”


낚였군.

뭐, 고고유물에 이런 사례가 한둘은 아니니까. 아마 이사장 할배도 몰랐을 거다.


「그런데 어디죠, 학생? 박물관?」

“윤현수 이사장님의 별장입니다. 수집품을 모아놓은 전시실에 초대받았어요.”

「엥? 거긴 왜?」

“어, 개인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힘드네요. 죄송합니다.”

「흠.」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가주는 교수님. 꼬치꼬치 캐묻는 분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혹시 거기에 이런 물건은 없었나요? 우측 하단이 살짝 부서진 검은색 석판. 꼬불꼬불한 상형문자가 쓰여 있을 텐데.」

“석판이요? 그런 건 없······.”


그때였다.

별 기대감 없이 실내를 쭉 불러보다가 문득 장식물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천장에 길쭉하게 박힌 돌 장식. 우아하고도 원초적인 미가 은은히 풍기고 있었다. 수집품 진열대에 놓인 물건이 아니라서 슥 지나치고 말았는데.


“저런 거 말씀입니까?”

「오오오오! ‘구원의 예언!’ 로기아의 모든 것이 담긴 보물!」


교수가 호들갑 섞인 찬사를 보냈다.

뭐야, 설마 진짜인가?

실소가 터진다. 이런 곳에 숨겨놓으면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난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라는 문구 하나로 퉁치기엔 도를 넘었잖아.


「저런 걸 장식용으로 쓰다니, 용서할 수가 없군요. 심지어 일부만 뚝 잘라서!」

“자연물로 착각한 건 아닐까요? 암만 봐도 상형문자보단 그냥 무늬인데.”

「갈!!! 무늬라니!」

“죄, 죄송합니다.”


자기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분야가 부정당하면 재야사학가 입장에선 화가 나겠지.


「전 해독이 가능해요. 전설의 테이머, 아스터가 우리에게 남긴 단서입니다. 이건 용기의 로기아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기술한 부분이군요. 나머지 부분이 소실된 건 안타깝지만, 이게 어디인가요.」

“용기의 로기아가 나타나는 날짜와 장소라고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마침 제일 필요했던 정보.


“혹시 읽어주실 수 있습니까?”


재빨리 수첩을 꺼내 펜을 댔다.

망할 아스터 녀석, 스스로 찾아보라더니 이런 곳에 숨겨놨군. 언질이라도 주면 덧나나.

곧이어 예언 낭독이 시작됐다.



「‘창천에 어둠이 내릴 때, 악마의 피가 온몸을 적시고 소리 없는 아우성들이 메아리치네. 스무 마리의 시종이 그를 떠받드나, 안타깝게도 둥근 몸에 발 하나가 모자라 쓰러지고 말았네. 그에겐 네 명의 친형과 네 명의 이복형이 있었으나, 남은 몫을 나누니 초라한 바닥만 드러나네. 이 욕심 그득한 무리를 심판할 자는 단 하나. 땅에서 살아나 하늘을 누벼라, 홍염의 불사조여.’」

“뭔 뜻입니까?”

「허허허허허, 저도 모르죠.」

“······.”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이 없군.

해독 가능하다며, 이 양반아.


「이만큼 알쏭달쏭한 문구일 줄은 몰랐군요. 그래도 노아 군 덕분에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겠어요.」

“혹시 해독하시면 따로 연락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노아 군만큼 저랑 뜻이 맞는 학생이 없으니까요. 주말에 시간 잘 가겠군요. 좋은 소식 기다리세요.」


뚝 끊기는 연락.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첩에 휘갈긴 예언을 읽어보았다. 플레이어가 해독할 수 있으니 넣은 걸 텐데.





“흠~ 이게 첫째 언니의 단서라고요?”

“그래, 짚이는 거라도 있어?”


윤나래의 개인실로 향하는 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프리지아에게 물어보았다. 얘라면 용기의 로기아랑 수백 년을 지냈을 테니.


“푸힛, 푸히히히힛.”

“왜 웃어?”

“참 대단해요. 그 왈가닥 선머슴 언니를 이런 거창한 문장으로 포장하다니. 빛 좋은 개살구라니까.”


얘답지 않게 시니컬한 태도다.

시달린 게 많은 모양이지.


“차라리 제 머릿속에 든 정보가 훨씬 유용할 거 같은데요?”

“말해 봐.”


프리지아가 앞발을 들어 헛기침을 했다.


“첫째 언니 이름은 에델바이스예요.”

“에델바이스?”

“네, 이상한가요?”

“둘째 언니는?”

“바이올렛.”

“셋째 언니는?”

“로즈.”

“······.”


에델바이스.

바이올렛.

로즈.

프리지아.

혹시 작명한 사람 어릴 적 꿈이 원예사였나? 아니면 여자는 꽃이라는 구시대적 묘사에 갇힌 틀딱인 건지.


“첫째 언니는 무지 호전적이고 앞장서길 좋아해요. 항상 흥분해있고요. 싸울 때면 온몸이 화르륵 불타오른답니다.”

“불 속성이란 뜻이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도깨비불에 떠오른 불꽃 분양, 그리고 석판에 불사조라고 새겨진 묘사.


“모든 기술이 공격기뿐이에요. 방어기, 상태이상기? 단 하나도 없어요. 무작정 돌격, 주먹질, 발차기, 박치기!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몬스터는 다 깨부숴요.”

“굉장히 알기 쉬운 타입이네.”

“하늘까진 날 수 있지만요. 그건 로기아한테 기본사양이고.”

“넌 못 날잖아.”

“······.”


내 태클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눈썹이 축 처지며 울상이 된 아기고양이. 뒤이어 영 반갑지 않은 메시지가 떴다.



[‘프리지아’가 당신에게 실망합니다.]

[친밀도: 100 → 90]

[‘너브 링크’가 해제됐습니다.]



언니들과 비교당하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지. 가슴에 깊이 남은 상처일 테니. 적당히 보듬어주자.


“그래도 에델바이스 대신 널 골라서 다행이야.”

“네?”

“그런 단순무식한 공격 방식보단 네 능력이 훨씬 마음에 들거든.”

“헤으응.”



[‘프리지아’가 당신에게 감동합니다.]

[친밀도: 90 → 100]

[‘너브 링크’가 활성화됐습니다.]



곧 조종권이 돌아왔다.

참 단순한 아이라니까.


“여기입니다.”


곧 복도 끝에 다다르자, 라틴계 미남 집사가 공손히 날 맞이했다. 마가린을 끓인 것처럼 느글거리는 인상이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이 방에서 아가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디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안내를 끝마치고 천천히 물러나는 악마. 아무리 공손한 태도라도 곱게 봐주기가 힘들다.

이 자식도 한통속이겠지. 속사정을 모를 리가 없다. 오리지널 윤나래의 곁을 쭉 지켜왔을 테니.


흑단 소재 여닫이문을 밀자, 예상보단 수수한 내부가 드러났다. 어디까지나 복도나 응접실에 비해서는.

금빛 틀로 장식된 가족사진, 결단의 책상을 연상케 하는 고급 원목테이블, 그리고······.


“으응?”


눈이 살짝 풀린 금발 소녀.

설익은 복숭아처럼 군데군데 홍조를 띠고 있다.


“이야, 노아 왔네! 아빠랑 이야기는 잘 됐어?”

“어, 부탁한 몬스터도 흔쾌히 보여주시더라고. 스카이랩터, 갓웨일, 빙글챙이.”

“그 인색한 노인네가 웬일이래? 네가 꽤 마음에 들었나봐.”


윤나래는 혀가 살짝 꼬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취기와 정상의 경계선에서 멈춘 느낌. 디오니스 체액의 위력이 새삼 대단하군.


“몸은 괜찮아?”

“뭘 이거 갖고. 그 늙은 여우가 이상한 수작 부리게 놔뒀으면 대참사가 벌어졌을 텐데.”

“하긴.”

“그럼 수업 시작해주세요, 선생님~!”


고성방가를 내지르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팡팡 치는 소녀.

정정해야겠군.

취했다, 단단히.


“딸꾹, 교재는 어디 있어?”

“빈손으로 왔는데 무슨 교재. 그리고 책 한 권을 쓸 만큼 호프 대륙에 대한 정보가 풀려있지도 않을 걸.”

“그럼?”

“말로만 할게. 중요한 거만 받아서 적어.”

“아~ 옛날이야기 듣는 것처럼?”


윤나래는 자신만만하게 펜을 들고 눈을 반짝였다. 막상 종이에 대면 삐뚤빼뚤 상형문자를 그릴 모습이 훤하다.

어쩌겠어, 감내해야지. 날 보호하려다가 저 모양이 된 건데.


“아~ 여기서 턴하면 엘피스 폭포가 나와?”

“그래.”

“잠자리 날개가 달린 요정들이 살고 있고?”

“나비 날개인데.”


대충 지어내자.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윤나래랑 붙어있을 명분을 만들기 위한 거니까. 이러다가 은근슬쩍 주의사항 일러주고 바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면 되는 거다.

그 다음엔 예언을 빨리 해독하고 용기의 로기아를 손에 넣어야지.


“잠깐만, 노아.”

“응?”


펜을 어지러이 놀리던 윤나래의 손이 멈췄다.


“아까부터 똑같은 자리에서 빙빙 도는데?”

“뭐?”


예상도 못한 지점에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언제부터 꼬인 거지.


“내용이 하나도 안 맞아. 엘피스 폭포라고 가르쳐준 장소에 갑자기 성당이 들어서질 않나, 목초지였던 곳이 늪으로 변하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고 했나. 역시 한 시간 넘게 떠들면서 끝까지 숨기는 건 무리였군. 여학생들한테 몇 마디 대충 둘러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주제를 지리 말고 문화로 바꿀 걸.


“혹시 너,”

“어, 미안하다.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길치야?”

“······.”


굳이 고백할 필요는 없겠다.


“햐햐햐, 뭔가 쿨하고 영특한 이미지였는데 자기 동네 폭포랑 늪도 헷갈리는 녀석이었잖아! 얘 백치미도 있네? 귀여워라. 누나가 도법이라도 가르쳐줄까? 응? 우리 귀여운 노아 어린이 길 잃고 후에엥 울면 안 돼요~”

“오늘은 그만하자. 너 취했어.”

“뭬이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첫날은 망쳤군.

실내라서 망정이지, 거리였으면 순경 아저씨들한테 민폐만 끼칠 뻔했다. 그 재수 없는 집사라도 불러야하나.


“후으응.”


결국 취기를 이기지 못했는지, 볼이 빨개진 금발 영애는 등받이의자에 기대고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다. 초점이 흐려진 눈이 서서히 생기를 잃어간다. 이제야 좀 얌전해졌군.

흥분이 가라앉은 소녀가 제일 먼저 내뱉은 한 마디. 그건 지극히 원초적인 물음이었다.


“엄마, 어디 있어?”

“······.”

“아빠는? 나 왜 버리고 갔어?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말 잘 들을 자신 있는데······. 적어도 여기보단 훨씬 행복할 텐데······. 집에 가고 싶어······.”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원목테이블에 엎어져서 섧게 오열하는 윤나래.

술은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을 들춘다지. 얘는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어 한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얼마나 가난하고 불행했더라도 상관없다. 부자들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여생을 보내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


미안해. 그럴수록 더더욱 진실을 알려줄 순 없어. 바닥 밑에는 지하실이 있는 법이니까. 만약 그 비밀을 깨달았다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 씨발! 전혀 모르겠네.”


해가 뉘엿거리며 주황색 조명을 흩뿌리는 저녁. 나는 손님방 침대에 앉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리 맛난 간식과 화려한 가구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못했다.

수첩에 적힌 예언 문구.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상태창!”


안 뜬다.


“힌트!”


줄 리가.


“×륜안!”


얄미울 만큼 멀쩡한 시신경.


“프리지아, 머리 좀 굴려봐.”

“검은색은 종이, 흰 건 글씨······.”

“반대다!”

“힝.”


도움 하나도 안 되는 파트너.

빨리 이걸 해독해야 용기의 로기아를 손에 넣을 텐데. 초조함에 다리떨기, 고개 끄덕이기, 헛기침하기, 머리 흔들기 등등 틱장애 증상이 종합선물세트로 나타났다.


“주인님.”

“왜? 뭐 알아냈어?”

“그건 아니고요. 도움이 될 만한 분이 떠올라서요.”

“누구?”


급한 마음에 언성을 높여 닦달하게 된다.


“그 잿빛 머리 가수 언니요. 머리 굉장히 좋으시던데.”

“아, 그렇지.”


은보라.

마침 고맙다고 답례인사도 못 드리고 있었지. 겸사겸사 연락해봐야겠다. 해독까진 무리라도, 어느 정도 실마리는 풀릴지 모르니까.


「노아 씨?」


두어 번 신호가 오간 끝에 반가운 얼굴이 홀로그램에 드러났다. 든든하군. 목상처럼 딱딱한 여자지만 이만큼 의지가 되는 사람이 없다니까.

나는 헛기침을 하고 그 알파고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보라 양. 바쁜 주말에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하나도 안 바빠요. 워낙 심심해서 2000피스 퍼즐 풀고 있었거든요.」

“아하하, 그렇군요. 저번 일은 고맙습니다. 덕분에 신세 많이 졌어요.”

「저번 일?」


갸웃 돌아가는 고개.


“은수혁 선배한테 잘못 걸려서 보라 양 신곡 핑계를 댔거든요. 실례인 걸 알지만······.”

「아, 그게 노아 씨였군요. 어떤 학생이 급한 와중에 오빠한테 덜미를 잡혔기에 구해드린 것일 뿐이에요.」

“그게 보여요? 제가 대충 지어낸 가사만 듣고?”

「전부 요령이 있답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미소.

이분의 입 꼬리가 올라갈 때마다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꼭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리고 오늘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군요. 저한테 도움을 청하러 연락하신 거고.」

“아하하, 들켰나요? 보라 양한테는 뭔가를 숨기기가 참 힘드네요. 혹시 방해가 됐다면,”

「보여주세요. 마침 퍼즐도 다 맞춰가서 따분한 참이었거든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올리고 수첩을 내보였다.

임승우 교수가 소리 내어 읽어준 예언. 그 암호 같은 문장들이 알파고 소녀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파이는 걸 보니, 역시 이분한테도 어려운가?


「5분만 주세요.」

“······5분이요?”

「대충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아요.」


경악해서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 무명 가수는 한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받아쓸 필요조차도 없는 모양이다. 이게 암산으로 되는 건가?


「풀었습니다.」

“벌써요?”


3분.

5분을 채우기도 전에 알파고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부만 해석되는군요. 그래도 괜찮아요?」

“물론입니다. 어느 문장이에요?”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 이건 날짜를 의미해요.」

“날짜요?”


곧 풀이가 이어졌다.


「‘스무 마리의 시종이 그를 떠받드나, 안타깝게도 둥근 몸에 발 하나가 모자라 쓰러지고 말았네.’ 이건 연도를 뜻합니다. 스무 마리는 알기 쉽게 20이에요. 딱히 꼬아놓진 않았군요. 그 뒷문장이 핵심인데요.」

“뒷문장이요?”

「‘둥근 몸에 발 하나가 모자라 쓰러지고 말았네.’ 둥근 물체를 세우는데 필요한 발은 최소 셋이죠. 솥처럼요. 여기서 하나가 모자라니 둘. 그리고 쓰러지는 주체인 악마를 상징하는 숫자는 666. 셋에서 하나가 모자라 둘이 됐으니 66. 합쳐서 2066년을 의미합니다.」


2066년? 그럼 올해인데.

두 번째 문장은 의외로 단순하게 풀리는군.


“‘그에겐 네 명의 친형과 네 명의 이복형이 있었으나, 남은 몫을 나누니 초라한 바닥만 드러나네.’ 이건요?”

「형제는 순서대로 이어지는 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친형제와 이복형제는 형식상으론 가족이지만, 근본적으로 섞일 수가 없죠. 닮았지만 떨어진 관계. 즉, 순서대로 이어지는 네 자리 수가 섞이지 못하고 붙어있다는 의미입니다. 12341234, 45674567처럼요.」

“아하.”

「‘남은 몫을 나누니 초라한 바닥만 드러나네.’ 앞의 네 자리 숫자가 반복되는 여덟 자리 수를 나누면, 나머지가 무조건 0으로 떨어지는 값이 딱 하나 있습니다.」

“뭐죠?”

「73.」


계산기를 들고 와서 실험할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이분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2066년이 시작되고 73일째. 즉, 이 두 문장을 합치면 2066년 3월 14일을 뜻하는군요.」

“3월 14일? 그럼······.”


스마트폰을 탭해서 전자 달력을 펼쳐보았다.

그러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다음 주 목요일.

남은 시간은······. 고작 4일.


작가의말

오늘 급히 병원에 다녀오느라 1시간 30분 가량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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