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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흑

천 번은 회귀해야 마법진을 깬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도버리
작품등록일 :
2023.04.10 10:05
최근연재일 :
2023.07.21 16:24
연재수 :
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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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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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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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3. 고블린 초원 (4)

DUMMY

깃털 화폐가 흡수되자 우접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파드드드득!


우접의 깃털 네 장은 식물의 새싹과도 같았다.

새싹이 자라면서 수많은 잎사귀로 뒤덮인 나뭇가지가 되듯, 원래 있던 깃털들 주변으로 새로운 깃털이 수십수백 장 자라나고 포개어졌다.

변화가 멎었을 땐, 얼굴만 했던 깃털 넉 장은 이제 사람 상체만 한 날개 넉 장이 되어 있었다.

Lv.1의 우접은 Lv.2 날개 나비, 익접翼蝶Feathered Wing Butterfly으로 진화했다.


"레벨 업이다."


나 혼자만 레벨 업했군.

뭐 내가 고생했으니 나 먼저 레벨 업 좀 하자.


"좋아, 익접. 단검에 앉아."


파바바밧!


네 장의 날개가 깃털 베개를 터뜨린 것처럼 터지더니, 순응단검으로 빨려들어갔다.

빛나는 환영의 날개 네 장이 평범했던 단검을 감쌌다.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건 아니고 그냥 화려한 버프 스킬을 사용한 것 같은 모습.

어쨌거나 준비는 끝났다.


"고블린은 몰살이다."


나는 목재 가옥 밖으로 나왔다.

팀원들이 분투하고 있는 장소를 한 번 훑어본 다음, 카드를 잡는 마법봉처럼 변한 단검부터 힘차게 던졌다.


슉─!


"키에엑?"


퍽!


빛살처럼 쏘아진 순응단검이 샤먼 한 마리의 뒷통수에 박혔다.

벌써 한 놈 보냈다.

단검에 붙어 있던 날개는 다시 민들레 꽃씨가 터지듯 분해되었고, 내게 날아와서 등과 다리에 붙었다.

이제 문자 그대로 날개를 단 듯 달릴 수 있다. 이 상태로 달리면 시속 60km 정도는 그냥 나온다.


타─앗!


땅에서 발을 뗄 때마다 익접의 추진력으로 미끄러지듯 거리가 좁혀졌다.

정글 고블린 무리가 가까워지자 등에 붙은 날개의 위치를 옮겼다.


"익접, 체인소드."


이번엔 검에 날개가 돋았다.


피피핏!


날개 돋친 체인소드가 고블린 사이를 휘저으며 칼끝으로 붉은 실을 뽑아냈다. 붉은 실들은 공기에 닿자마자 녹아내려 바닥을 질척하게 적셨다.

사지를 잃은 고블린들이 기절하듯 바닥으로 쓰러져내렸다.


"캬아아악!"


후방에서의 공격에 고블린 치프틴과 일반 샤먼이 기겁하며 주문을 사용했다.


번쩍, 피피핑!


치프틴의 Lv.10 계시의 화살과 샤먼의 Lv.10 마력탄Magic Bolt이 날아들었다. 둘 다 유도형 투사체가 날아오는 터라 몸으로 때워야 하는 스킬이다.

보기에는 위협적이지만.


'저런 공격에 맞기에는 내가 너무 많은 일을 겪었지.'


샥!

퍼퍼펑!


계시의 화살은 예단 체인소드를 휘둘러 베어내고, 마력탄은 다른 정글 고블린을 끌어당겨 막아냈다.

이어서 난전을 이어나갔다. 칼날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정글 고블린의 목이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숫자가 꽤 됐기에 샤먼과 치프틴에게 가려면 더 많이 죽여야 했다.


"...좀 지나갑시다."


쓰러진 고블린이 많아 채찍을 휘두를 공간이 생겼다.

체인소드를 예장 상태로 길게 뽑아내어 휘둘렀다.

익접이 깃들어 있기에 신성광휘 대미지가 추가되면서 절삭력이 더해졌다.


번쩍, 서걱!

푸아악!


내 앞을 가로막은 정글 고블린을 모두 해치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일반 샤먼 한 마리까지 목을 베어냈다.


뎅강!


"케에..."


'남은 건... 팀원들이 싸우고 있는 정글 고블린 여섯 마리와 고블린 치프틴.'


정글 고블린 여섯 마리 정도는 팀원들이 처치할 수 있다.

하지만 치프틴은 좀 버겁다.

15인 게이트의 보스답게 강하다. 고블린들은 제정일치 사회라서, 고블린 치프틴은 사제 주문도 쓰고 전투 기술도 뛰어났다.

익접 사용법도 연습해볼겸 내가 처리해야겠다.


"익접, 치프틴 눈에."


파바바박!


"캬아아악!"


날카로운 깃털 촉들이 벌떼처럼 날아들어 고블린 치프틴의 눈에 박혔다.

마치 눈에 핏빛 깃털이 돋아난 것 같다.

남는 깃털을 계속 날려 다른 부위도 공격해보았으나 눈알, 콧구멍, 입, 귓속 같은 여린 부위가 아닌 이상 공격이 통하진 않았다.


"뭐... 이 정도 공격력이었지."


익접의 공격력을 점검해보고 나선, 눈도 멀고 귀도 먹은 고블린 치프틴을 향해 예장 체인소드를 후려쳤다.


팡!


녀석은 감각이 봉쇄된 와중에도 기적적으로 양팔을 들어올려 막았으나, 가속한 예장 체인소드는 팔뚝 두 개와 이마까지 그대로 갈라내며 치프틴의 피와 뇌수를 터트렸다.


푸아악!


"...고블린은 몰살이다."


풀썩.


고블린 치프틴이 모로 누워 쓰러졌다.


지이잉─


청사 팀은 아직 싸우는 중이었다. 나는 치프틴의 눈에 박힌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내며 기다렸다.

깃털을 뽑은 다음에는 고블린 치프틴의 마석도 챙겼다.

보스 몬스터의 마석을 갖고 있으면 어디서든 게이트 출구를 생성할 수 있다.

잠시 후.


"허억, 허억... 처음에 버티다 죽는 줄 알았음."

"와... 그래도 그거 잠깐 버텼다고 다 잡았네."


김용재가 살짝 질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5분도 되지 않아 일반 샤먼 둘, 치프틴 하나, 정글 고블린 15마리를 혼자 죽였으니 압도될 만도 했다.


"이럴 거면 그냥 너 혼자 싸웠어도 다 이겼겠는데."

"나 S랭크잖아. 고블린 치프틴보다 S랭크 자격 시험이 더 어려웠지."

"몰라, 덕분에 빨리 끝나서 다행임."


청사 팀은 주변에 고블린들이 내장을 까뒤집고 역한 냄새를 풍기는데도 아랑곳 않고 휴식을 취했다.

열두 시간에 걸쳐 첫 게이트 클리어를 해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바닥에 대자로 누운 형승훈이 중얼거렸다.


"하아... 그래도 하루도 안 돼서 깼네요. 혹시 몰라서 야영 준비도 해왔는데, 괜히 짐만 무겁게 가져왔어요."

"여기서 야영할 건데."

"엥? 왜?"


게이트는 우리가 나갈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굳이 안에서 버틸 이유도 없긴 하다. 게이트 안과 밖의 마력 농도가 다르기 때문에, 너무 오래 있으면 잠수병처럼 게이트 마력 중독에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게이트에서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


"골든 타이거즈 데려가야지. 근데 지친 상태로 그놈들한테 기습당하면 어떡해? 그전에 한숨 자면서 체력을 회복해야지."

"이 자식... 그런 현명한 판단을 하다니. 역시 인생 2회차임."


염상현은 이상한 곳에서 촉이 좋은 편이다.

우리는 인생 1001회차의 지혜를 활용하여 몇 시간 동안 편안한 휴식을 가진 뒤, 아까 골든 타이거즈를 포박해둔 자리로 되돌아갔다.



###



"...살아 돌아왔군."

"너희도 안 죽고 잘 치료됐구나."


짧은 풀 초원에 버려둔 골든 타이거즈를 찾았다.

심연가시 덕분에 상처도 다 치료되었고, 손발의 속박은 이미 풀어져 있었다. 거의 하루나 시간을 줬는데 못 풀면 헌터도 아니긴 하다.


"그래서, 우릴 죽일 방법은 생각해냈어?"

"...솔직히, 네가 그 말을 하고 나니 도저히 모르겠다."


도적 김재현이 순순히 인정했다.


"이 친구는 정직한 도적이로군."


내가 칭찬했다.

하지만 나머지 도적 놈들의 눈에 스쳐 지나가는 감정은 정직하지 못했다.


'그걸 왜 말하냐는 눈빛. 각도기도 못 재는 놈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놈들이 나를 배신할지 말지는 통계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다.

도적 김재현이나 전사 이종환 정도는 내 무기술 솜씨를 보고 꼬리를 내리지만, 나머지는 직접적으로 설득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고를 친다.

그러니 이 말로 시작해야지.


"고독蠱毒이라는 게 있다. 무협 좋아하는 김재현이라면 알고 있겠지. 설명해줘."

"뭐?"

"설명하라고. 무협에 나오는 초특급 바이오테크놀로지 있잖아."


도적 김재현이 무슨 소린가 하고 생각하다가, 깜짝 놀라서 저번에 심연가시를 이식받은 부분을 보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으니까 빨리 설명해."

"...그, 남한테 먹여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종류의 벌레 말이야?"

"그래. 방금 너희 몸에 들어가서 신체의 일부가 된 것 말이야."


김재현이 현실을 부정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 거짓말. 세상에 그런 편리한 게 있을 리가..."

"글쎄. 그게 왜 말이 안 되지?"

"니가 지금 텔레파시로 조종하는 살아 있는 벌레를 우리 몸에 집어넣었다는 말을 하고 있잖아."

"잘 설명했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궁금하면 말해. 당장 너희 심장을 터뜨려줄 수 있으니까."


아직 심장까진 안 닿았으나 허세를 좀 부려봤다.

초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홀린 듯 상처 부위를 더듬거리길래 일부러 마력 신호를 줘서 심연가시를 꿈틀거리게 했다. 그 분명한 태동에 골든 타이거즈 전원이 사색이 되었다.

설득을 끝냈으니 이유를 말했다.


"너희 쓰레기들을 살려둔 이유는 하나야. 아웃서울에 건물을 지을 건데, 너희가 거기서 일 좀 해줘야겠다."

"뭘 시키려는 거지?"

"노가다."

"...우리보고 노가다를 뛰라고...?"

"그래, 헌터 아카데미 4년제 나오고, 비싼 아티팩트 갖고 싶어서 강도 살인도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 해야 나를 죽여버릴지 대가리를 굴리고 있는 너희가. 아웃서울에서 노가다를 뛰어줘야겠어. 물론 하고 싶어하던 몬스터 사냥도 할 거야. 사냥 당하는 걸 방어하는 입장이겠지만..."


아직까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본보기로 김영방이나 이종환을 죽일까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이번 회차에는 심연가시를 많이 쓸 듯하니, 당분간은 살려두고 번식용 모판으로라도 써먹는 게 낫다.


"이름도 골든 타이거즈? 거창하니까 치즈냥이들로 바꾸자고."

"..."

"꼬우면 덤벼. 충분히 생각할 시간도 줄 테니 천천히 덤벼도 되고."

"...아니, 난 찬성이야.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도적 김재현이 항복하자 나머지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성깔이 있는 놈들이라 완전히 굴복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모르는 척 해주마.'


녀석들은 속마음을 숨기고.

나는 시간이 지나면 녀석들의 신체의 대부분이 심연가시로 대체되어서 걸어다니는 벌레에 가까운 존재가 될 것이라는 걸 숨겼다.

이미 이겼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저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딱히 내가 위험할 일은 없었다.


"나가서 밥이나 한 끼 먹으면서 얘기해 보자고."


밥부터 먹기로 했다.

잘 먹어야 심연가시도 잘 큰다.



###



한마음게이트회 사망 관련 수속을 마쳤다.

한마음게이트회도 다른 팀을 죽일 생각이었기 때문에 블랙박스용 액션캠도 안 달았고, 상세한 소지물품 신고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이 갖고 있던 아티팩트는 내가 분해하고, 치즈냥이 팀의 밀수용 가방에 숨겨서 쉽게 갖고 나올 수 있었다.

이후 청사 팀과 치즈냥이 팀 둘 다 정동부 권역에 있는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삼촌, 친구들 데려왔는데 밥 좀 해줘."

"어, 재유하고 용재 왔구나. 순응은 잘 봤니? 이쪽은 처음 보는 친구들이네."


식사는 우리 집 건물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먹기로 했다.

밥값은 치즈냥이 팀에게 청구할 예정이다.

상혁이 삼촌은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 삼촌에게 친구들을 보여주고 멀쩡하게 돌아간 적이 없다.

다들 2kg씩은 쪄서 돌아갈 것이다. 치즈냥이들 팀은 심연가시만 2kg 늘어나겠지만...


"알았으니까 너희 좀 씻어라. 어디 갔다왔길래 이렇게 냄새가 나냐?"

"이따가 말해줄게."


잠시 후, 뽀송해진 몸으로 저녁놀이 비치는 옥상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많이 먹어라."


순식간에 각종 요리들로 이루어진 한상차림이 나왔다.

상혁이 삼촌의 차돌된장찌개와 간장불고기 볶음밥도 더할나위 없었지만...


치이이익!


1001번의 회귀를 통해 완성된 나의 고기 굽는 실력은 천하일절을 넘어 고금제일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외부는 마이야르 반응과 캐러멜화의 묘리를 담아 과자처럼 바삭했고, 내부는 콜라겐 용해의 묘리를 담아 크림처럼 녹진하게 녹아내렸다.

불판의 모든 부위를 통달하고 불길의 모든 변화를 이해해야 나올 수 있는 극상의 고기구이.

김재현의 눈은 고독을 먹였다고 했을 때보다 더 흔들렸다.


"이 고기는... 대체 무슨 고기지?"

"평범한 돼지고기다. 단지 나의 손맛이 더해졌을 뿐."


내가 최고의 도축업자이자 고깃집 사장이던 시절, 사람들은 나를 신을 굽는 자The God Roaster, 신육의 이완명이라고 불렀다.

맞나?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나처럼 회귀를 하지 않고도 이 정도 요리 실력을 갖춘 상혁이 삼촌이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삼촌은 식당을 해야 해."

"음식 파는 건 성격에 안 맞더라.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만들어주는 것만 좋아."

"그야 재료값 안 아끼고 막 퍼주니까 그렇지. 내가 그건 해결해줄 수 있어."


상혁이 삼촌이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완명아. 순응 끝났다고 바로 돈을 벌 필요는 없어. 넌 아직 20살도 안 됐고, 네가 부양해야 할 사람도 없고 말이야. 비록 우리가 부자는 아니어도..."

"완명이 부자임요. S랭크로 청룡 길드에서 계약금도 받았고..."

"S랭크...? 청룡 길드?..."


상혁이 삼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염상현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너 말 안 했음?"

'이번 회차에는 깜빡하고 말을 안 했나 보네.'


오래 살다 보니 이번 회차가 저번 회차 같고, 저번 회차가 이번 회차 같아서 그렇다.

사람이 깜빡할 수도 있지.


"지금 말하려고."


삼촌에게 그간의 일을 요약하여 말했다.

순응시험에서 S랭크로 각성한 것.

염상현, 김용재, 우재유과 함께 청룡 길드에 입사한 것. 추가로 형승훈까지 해서 팀을 만든 것.

고블린 초원 게이트를 클리어한 것.

거기서 치즈냥이들을 만난 것에 대한 순화된 설명.

그리고 당분간은 이 9명짜리 팀도 이끌고 있다는 것까지.


"...좋은 소식인데 믿기질 않는구나."

"가게 내자는 것도 진심이야. 아웃서울에 땅을 살 건데, 거기서 가게를 차려서 돈 많은 사람한테만 팔자고. 1000명한테 1만원씩 팔든 1명한테 1000만원씩 팔든 매상은 똑같잖아."

"그런 곳에 누가 와?"

"진정한 강자만 밥 먹으러 올 수 있는 거지. 약자들은 뭐 배달시키든가."

"...강자존 마교 식당이네."


무협충 전사 김재현이 빈정댔다.


"응, 니가 점소이야."

"..."


회귀자의 좋은 점.

아 그때 그 말 할 걸... 싶었던 거를 몇 번이고 다시 말할 수 있다.


"고독을 먹고 마교 식당에서 점소이를 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덕업일치 아니냐."

"..."


찌르르르릉!


김재현의 침울한 얼굴을 구경하고 있자, 건물의 구식 초인종이 옥상까지 들리는 큰 소음을 내었다.

갑작스런 초인종 소리에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또 누구를 초대했나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왔군."


회귀자의 나쁜 점.

했던 일 또 해야 한다.

내가 올 게 왔다는 분위기로 일어나자 삼촌이 물었다.


"또 다른 친구 불렀어?"

"아니. 디너쇼로 보여줄 공연을 준비했달까. 다들 내려와서 봐봐."

"공연?"


이 자리에서 딴 마음 품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공연이다.

다 같이 건물 밖으로 나가자, 정장을 입은 다섯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오만한 표정을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언더문 보호5조 김라온 사원입니다. 보호비 수납하러 왔습니다."


언더문은 회사 이름이다.

'엘골용 데힐업 해본언레 헌미마 가멘팜해 세올클' 중 9위를 차지하는 '언더문'은 경비 및 경호 업체로, 사람들을 야생 몬스터로부터 보호해주는 대신 보호비를 받아간다.

그가 내민 청구서에 적힌 금액을 확인했다.


"177만 7570원."

"먼저 결제부터 해주시죠. 이의사항 있으시면 언더문 고객센터에 청구해서 환급받으시고요."


실질적으로 이 돈을 내야 할 이유는 없다.

대부분의 야생 몬스터는 보더서울의 국경수비대가 방어하고, 인서울에 나타나는 야생 몬스터는 미발견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헌터들의 몫이다.

즉, 이들이 하는 일은 없다.

강제로 걷어가는 보호비는 인서울을 점령한 대기업이 시민들을 착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국가가 한 번 망하고 조세와 치안 등 행정의 일부를 민영화하면서 생긴 악습인데... 이것은 각성자 출현 이후 근현대사의 질곡이 담겨 있는 긴 이야기니 넘어가고.

아무튼 내가 언더문의 핏덩이들에게 해줄 말은 하나 뿐이다.


"돈 없다."

"...개조 시술이나 저주를 받지 않은 인간이신가요? 그럼 혈액으로 결제 가능합니다."


언더문은 뱀파이어가 세운 회사로, 모든 임직원은 뱀파이어 시술을 받는다.

뱀파이어화가 진행된 수준에 따라 직급이 나뉠 정도.

돈 대신 피로 보호비를 지불할 수도 있으나... 거의 기절하기 전까지 피를 뽑아간다. 말 그대로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들인 것이다.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 피도 줄 수가 없다."

"음... 최 주임님, 어떻게 할까요?"


김라온 사원이 뒤에 서 있는 직원들을 향해 물었다. 그중 한 명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쯧, 그런 걸 아직도 물어보면 어떡하냐. 강제집행해야지. 피 뽑아와."

"넵."


스릉.


김라온 사원이 검을 뽑았다.


"잠깐, 잠깐. 왜 이러는 거야!"


상혁이 삼촌이 뛰쳐 나왔다.


"완명아, 우리 보호비 다 준비해 놨어. 보호비 못 낸 적도 없는데 왜 그러는 거야? 부족하면 피를 내면 되고..."

"김재현, 삼촌 좀 붙잡아서 데려가. 살살 붙잡아, 다치지 않게."

"아, 알았다."


마력 신호를 줘 심연가시를 꿈틀거리게 하자, 김재현이 깜짝 놀라서 내 말에 따랐다.

그러나 뛰쳐 나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상혁이 삼촌 뿐만이 아니었다. 청사 팀 전체가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묻고 있었다.

심지어는 김라온 사원조차 머뭇거리는 태도로 물었다.


"저기, 진짜 싸우실 건가요. 저 언더문 정직원입니다."


세계적 기업인 언더문의 정직원이다.

각성자 이후 세상에서, 대기업 정직원이라는 건 그가 상당한 전투 실력을 갖춘 헌터임을 의미했다.

최하 직급인 사원급이라 해도 최소한 각성 B랭크 상위권, 실적 5급 이상의 실력자일 터다. 김라온이 당한다고 해도 다른 사원들이 보호비를 받으러 올 테고.

딱 봐도 어려보이는 내가 언더문 정직원인 자신과 싸우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법도 했다.


"괜찮아. 돌아가서 순응 끝난 새내기한테 당했다고 하면, 더 이상 정직원이 아니게 될 테니까."

"..."


김라온은 물론이고 뒤에 있던 네 명의 직원들까지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김라온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피징수자의 비협조적 태도로 인한 강제채혈 중 사망은 언더문 측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치즈냥이들, 잘 봐둬. 내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줄 건데..."


배우와 관객이 모였으니, '내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라는 공연을 시작할 차례였다.

이 공연은 수위가 꽤 높다.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니 시청에 주의하길 바라."


스릉!


나도 김라온 사원에 맞서 체인소드를 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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