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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흑

천 번은 회귀해야 마법진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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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버리
작품등록일 :
2023.04.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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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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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2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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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블린 초원 (1)

DUMMY

사흘 동안 나는 이금기를 도와 체인소드를 제작했다.

이금기에게 전적으로 맡겨둬도 만들긴 하지만, 시행착오 때문에 반 년 이상 걸리기에 내가 직접 돕는 게 빨랐다.

각 파츠가 얼만큼의 각도로 조립되어야 하는지, 도검 강재가 얼마나 낭창낭창하게 휘어져야 하는지, 채찍에 쓸 힘줄은 어느 정도로 경화시켜야 하는지...

이런 종류의 기술은 머리로 알더라도 손끝으로 익히지 않으면 진짜 아는 것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야 여러 번 만들어 봤으니 헤멜 일이 없다.


"이게 진짜 되네..."


이금기는 다소 어벙벙하게 소감을 말했다.

조이면 둔기, 칼날을 빼면 칼.

풀면 채찍, 혹은 채찍검.

거기다 길이를 적당히 조절하면 아주 짧은 단검과 장검, 짧은 채찍과 아주 긴 채찍으로 조절도 가능하다.

이런 신병이기를 사흘 만에 만들었으니 이금기 입장에서는 기적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금기가 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예 같이 공방을 하나 차리자고 하고 싶구만. 그렇다고 S랭크 헌터를 붙잡아 둘 수도 없고... 쩝."

"제가 대장장이가 된다면, 사람들은 저를 헤파이스토스의 제자冶匠神弟Hephaistus's Disciple 이완명이라고 부르겠죠."

"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내 디자인을 받아 나와 함께 작업했으니 장인된 입장에서 배울 점도 많았을 것이고, 이 거래가 윈-윈 수준이 아니라 이금기에게 큰 이득이라는 것도 진실로 실감했으리라.

이번 작업에서 배운 기술을 어디 써먹을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냅두면 잡템 만든다고 우리 장비 만드는 거 까먹는다.


"저기요, 사장님. 다른 물건은 나중에 만드시고 저희 물건부터 만들어 주셔야 해요. 특히 제 방어구부터요. 나머지는 외주를 주든가 맘대로 하시고."

"알았다, 알았어."


이금기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다음, 나는 친구들 넷과 협업 팀 열 명을 불러모았다.

고블린 초원의 신탁을 수행할 때가 되었다.



###



우리는 북서부 권역 보더서울의 고블린 초원 상설 게이트 앞에 모였다.


고블린 초원은 상설 게이트다.

모종의 이유로 클리어 후에도 게이트가 사라지지 않고, 일정 시간 이후에 들어가면 처음과 똑같이 리젠되는 게이트를 상설 게이트라고 말한다.

이런 게이트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신학자들은 '신이 인간을 성장시키기 위해 만든 인스턴스 던전'으로 인식하고 성역으로 만들려다 여러 차례 진압당했으며, 마도공학자들은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을 통해 이를 이해하려 하고 인위적으로 재현해보려다가 수백 명이 미쳐 버렸다.

그러자 인류는 늘 그래왔듯, 상설 게이트의 원리적 이해를 포기하고 어떻게 써먹을지부터 고민했다.

그 결과 상설 게이트들은 인류의 새로운 농장, 목장, 양식장이자 광산, 발전소, 공장이 되었다.

엔트 과일로 샐러드를 만들고 미노타우로스로 스테이크를 구웠다. 마석으로 스마트폰을 충전했으며, 산업 폐기물을 게이트에 버리고 리셋했다.

헌터들이 목숨을 좀 걸기만 하면 자원이 복사가 된다는데, 골치 아프게 고민할 건 또 무엇인가? 그저 사냥하고 보상을 얻으면 될 뿐.


때문에, 상설 게이트들은 수십만 번 공략하여 검증된 정석 공략이 존재했다.

고블린 초원의 경우 15명까지는 같은 공간으로 입장된다. 따라서 5명씩 3팀으로 이루어진 총 15명의 공략대가 진행하는 것이 정석이다.

우리도 그렇게 모였다.


"팀별로 소개나 할까요. 저희는 청사 팀입니다. 평균 각성 C랭크, 실적 9급의 첫 출전이에요."


1팀은 내 팀. 염상현, 김용재, 우재유, 형승훈, 이완명.

임시로 붙인 팀명은 '청사' 팀이었다. 형승훈 빼고 청룡 길드의 신입이니까 푸른 뱀이라는 뜻... 내가 지은 게 아니라 염상현이 지었다.

딱히 더 나은 이름이 없어서 그냥 냅뒀다.

다른 팀들에게는 우리 전부 C랭크라고 말해두었다. 괜히 S랭크라고 말해서 동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희는 골든 타이거즈라고 합니다. 평균 B-랭크고 실적 8급입니다. 반갑습니다."


2팀은 20대 중반의 평균 B랭크 헌터 아카데미 학생들, 이종환, 김재현, 전근효, 김영방, 양강원의 팀이었다.

이쪽 팀도 '골든 타이거즈'라는 만만찮은 이름이었다.

골든 타이거즈는 게이트 공략도 여러 번 해보고, 아카데미에서 각 직업별 헌터 전공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만 학자금 때문에 돈이 부족해서, 공짜 게이트 입장권을 준다니 달려온 팀이었다.

돈이 쪼들린다고 한 것에 비해 장비는 꽤 좋은 것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한마음게이트회예요. 각성 랭크는 C+, 실적은 우리도 아직 9급이고."


3팀은 평생교육원에서 헌터 교육을 이수 받은 윤정명, 이석환, 박두열, 이승근, 윤보희였다. 50대 중반의 평균 C랭크 퇴직자들이 모인 곳으로, 팀명은 '한마음게이트회'.

여기는 이번이 2번째 공략이었다.

저번 공략은 공략대행업체를 고용했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같은 초보끼리 힘을 합쳐서 클리어해보자고 온 것이었다.

연금술사 형승훈이 속삭였다.


"다들 인상이 좋네요. 팀을 잘 고른 것 같아요."

"고르긴 잘 골랐지."


내가 수백 차례의 테스트 끝에 엄선한 조합이다.

고블린 초원을 공략하는 데에는 이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제격이다.

나는 상설 게이트 관리소에 사전 구매한 입장권을 보여주고, 입장용 팔찌 15개를 받아 왔다.

팔찌 하나에 백오십만 원 꼴이었다.

Lv.5~10의 마석 300여 개를 모아야 본전인데, 실제로는 다 해봤자 150여 개밖에 안 나온다. 대신 난이도는 높지 않다.

그래서 내 돈 주고 들어가기에는 아깝고, 남이 사주면 들어가는 그런 선물 같은 게이트랄까.


"15명 모두 허가 받았어요. 언제든 진입해도 됩니다. 진입 전에 전략을 다시 한번 짚어볼까요?"

"제가 하죠. 골든 타이거즈의 마법사 김영방입니다."


키이잉...


김영방이 마법으로 고블린 초원의 환영을 만들어 냈다.


"가볍게 브리핑할게요. 고블린 초원은 과녁판처럼 세 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어요. 최외곽의 첫 번째 구역은 짧은 풀 초원, 두 번째 구역은 긴 풀 초원, 그리고 정중앙의 정글입니다."


김영방은 푸르스름한 환영을 보여주면서 헌터 아카데미에서 배운 정석 공략법을 설명했다.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동심원이 겹쳐 나타나고, 고블린들을 의미하는 작은 점들이 그 위에 덧입혀졌다.

그냥 태블릿으로 보여줘도 되는데 마법사들은 꼭 마법사인 티를 내고 싶어한다.

김영방이 외곽에서 중앙쪽으로 손가락을 그었다.


"중앙으로 갈수록 몬스터가 강해집니다. 보스인 고블린 치프틴을 건드리면 게이트 내의 모든 고블린이 총공격 해오니까, 외곽부터 3팀이 나뉘어서 빠르게 한 구역씩 섬멸하고 전진하는 게 정석입니다. 33%씩 미는 거죠."

"천천히 밀어도 됨요?"

"아뇨. 시간이 너무 지나도 고블린들이 우리 위치를 특정해서 총공격을 시작합니다. 빨리 움직여야 해요. 아무리 늦어도 12시간 이내로 공략하는 게 보통입니다. 여기 대강의 지형도를 복사해 왔으니 거점을 타격하면서..."

"어우, 뭐가 이리 복잡해."


한마음게이트회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나이가 드니까 배워도 계속 까먹어. 우리는 청년들 뒤만 따라갈게."

"섬멸전이니까 따로 활동하는 게 빨라요. 고블린이야 강하지 않으니 지도 보시면서 소용돌이 방향으로..."

"우린 머리 아퍼서 그런 거 못해. 그러지 말고, 같이 다니면서 길만 알려주면 우리가 앞장서서 싸울게. 봐, 우리가 장비는 좀 맞췄거든."


한마음게이트회 팀원들의 장비는 상당히 고가였기에 확실히 고블린 정도라면 손쉽게 학살 가능해 보였다.

압구정 헌터리아에서 산 거 같은 비싼 무구들이었고, 그 착용자들은 무구의 가격만큼이나 높은 자신감을 내보였다.


"으음... 정석을 냅두고 굳이..."


골든 타이거즈는 반대로 상당히 난감한 기색이었다.

헌터 아카데미까지 수료한 자기들이 어느 정도 버스를 태우겠다고 생각하고 오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끌고 다녀야 할 줄은 몰랐던 것.

그리고 실전 전투 경험을 쌓는 것이야말로 상설 게이트를 오는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채집할 수 있는 재료는 시장에 다 풀려 있어서, 마석 말고는 돈 되는 것도 없다.

길만 찾아주고 전투에선 빠져 있으라는 건 햄버거에서 패티만 먹고 나머진 다 주겠다는 거랑 비슷한 말이었다.

나는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2구역으로 나눕시다. 두 팀이 같이 다니면서 시계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시고 중간에서 만나시죠. 청사 팀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게요. 긴풀 초원에서도 똑같이 반반 나눠 움직이고, 정글에선 모여서 가고요."

"그래~ 그럼 되겠다. 이러나 저러나 속도는 똑같을 거야. 이게 더 빠를지도 모르잖아. 젊은데 다양한 것도 시도해 봐야지."

"뭐...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네요. 우리가 빨리 움직일게요."


이동속도까지 대강 계산해서.

골든 타이거즈와 한마음게이트회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60%의 고블린을 잡고, 청사 팀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40%의 고블린을 잡기로 했다.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부터 삐걱대는 협동 팀이지만, 결과만큼은 이 조합이 최고다.


"그럼, 조금 있다가 봅시다."


2팀과 3팀을 먼저 게이트로 들여보내고.

우리는 출렁이는 수은처럼 이질적으로 반짝이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게이트 표면으로 짧은 풀 초원의 모습이 일그러져 투영되었다.

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 2팀과 3팀을 확인한 다음, 내가 말했다.


"우리는 최대한 천천히 돌자."


나는 청사 팀을 이끌고 느긋하게 반시계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



짧은 풀 초원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처럼 황량하고 너른 지형이었다.

연두색과 황색이 섞인 건조한 초원 사이로, 그와 비슷한 피부색을 지닌 Lv. 5 짧은 풀 고블린 한 무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슉, 퍽!

"키에에엑?!"


열 마리의 고블린 사이로 갑작스레 화살이 날아들었다.

화살에는 연금술사 형승훈이 만든 독이 묻어 있었다. 화살에 맞은 고블린이 몽둥이를 들다 쓰러지고, 나머지 고블린들은 화살이 날아온 쪽에서 인기척을 감지하고 달려들었다.


"키에에에!"

"들켰어!"


타닷!


기습을 성공한 김용재가 뒤로 물러섰고, 나와 염상현이 앞으로 뛰어 자리를 바꾸었다.

염상현은 실실 웃으면서 장검과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다.


"고블린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나를 제외한 네 명에겐 첫 실전이었으나, 누구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몬스터의 레벨은 C랭크를 기준으로 하니, 장비를 좀 갖춘 C랭크라면 같은 레벨보다 좀 더 높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알맞다.

Lv.5의 짧은 풀 고블린 정도라면 순응 직후라서 레벨이 1로 초기화된 C랭크 친구들도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

순응시험으로 치면 F랭크~E랭크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난이도다.

특히 염상현은 S랭크 실력은 아니어도 S랭크 스탯을 받은 덕분에 초기 스탯이 아주 높다. C랭크로 치면 60레벨에 준하는 스탯이고, 레벨이 오를수록 그 격차는 늘면 늘지 줄지는 않는다.

내가 순응시험에서 나머지 3명을 안 살린 정도야 '뭐 어쩔 수 없네... 완명이도 뜻이 있겠지...'라고 생각할 만큼의 큰 선물인 것이다.


"흐압!"


푸악!


전사 염상현이 양손으로 검을 잡고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성급하게 접근하던 고블린 한 마리가 두동강났다. 그 모습에 다른 고블린들이 주춤했다.

그 틈을 노리고 나는 임상현보다 한 발 앞에서 우접을 소환했다.


"우접, 내 손에 앉아."


깃털 나비가 내 손에 앉아서 가속도를 붙여주고.


스릉!


나는 체인소드를 날카롭고 길게, 예장銳長Sharp-Long 형태로 뽑아냈다.

마치 평평하게 만든 등뼈를 손에 쥔 듯했다. 재료로 쓰인 살육 기린이 '뭐예요 돌려줘요'라고 외칠 거 같은 모습이다.

척추동물의 척추를 생체모방해서 한쪽은 톱날처럼 삐죽삐죽하고, 한쪽은 면도날처럼 곧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러면 길게 뽑아낸 상태로도 예리한 참격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칼날 채찍이 부채꼴 모양으로 고블린 무리를 베어냈다.


휘릭─ 서걱!


날카로운 면에 직격한 고블린들의 살점이 길게 갈라졌다.


"키에에엑!"


순식간에 네 마리의 고블린이 중상을 입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 마리의 고블린을 두동강 내고 기세등등해졌던 염상현조차 곧바로 겸손해질 만한 공격이었다.


"마법. 활. 투석. 가만히 있지 말고."


친구들이 멍하니 있을 게 뻔하기에 후속타를 날리라고 명령했다.


"아... 알았어!"


우재유가 Lv. 1 얼음탄Ice Bolt을, 김용재가 활을, 형승훈은 투석구를 사용해 고블린들을 공격했다.

순응시험을 봤다지만 친구들의 공격은 아직 어설펐다. 경험이 일천하니 어쩔 수 없었다.

투자 신탁도 있지만, 그 경험을 쌓으라고 상설 게이트에 직접 데리고 온 것이기도 했다.


"연습 좀 해라."


한 방으로 전력을 절반 베어냈으니, 마무리는 친구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는 체인소드의 핏물을 털어내고, 뭉툭하고 짧은 둔단鈍短 형태로 고쳐쥐었다.

고블린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넣기 위한 위협용으로만 휘둘렀다.


"훠이! 저리 가!"

"키이이이!"


허공에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도망치려는 고블린을 청사 팀 쪽으로 몰아넣었다.

내가 네 마리나 한꺼번에 베어내는 걸 봤기 때문인지, 정신병자처럼 허공이랑 싸우고 있는데도 고블린들은 무서워서 접근하지 못했다.


"컥..."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닥에 누운 고블린들까지 확인사살이 완료됐다.


"헉... 헉... 별 거 없네.... 쉽네."


김용재가 고블린 목에 박은 단검을 뽑아내면서 말했다.


"하악... 진짜... 아무것도 아니네요..."

"개쉬움."


형승훈과 염상현도 한 마디씩 했다.

전투의 흥분이 팀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짧은 풀 초원의 고블린 10마리를 상대로 이 속도라면 실제로 괜찮은 편이긴 했다.

마석을 깨고 섭취해서 레벨을 올리면 더욱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나한테나 아무것도 아니지, 너희한테는 아니야."


방금도 내가 4마리나 일격에 넘어뜨리고, 도주하는 고블린들을 막아냈기에 쉽게 싸운 것이다.

내가 빠져고 남은 팀원만으로도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게 필요한데 직접 채집할 시간은 없는 특수 재료들을 가져오라고 부려먹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려면 나 없이 전투에서 이기는 경험을 주어야 한다.


"너희는 약하니까, 여기서 버프를 좀 해야겠어."

"버프?"

"나 마법진술사잖아. 마법진을 그려줄게."

"아, 맞다. 자꾸 채찍술사라고 생각하게 되네."

"...마석부터 채취하자."


나도 마석 채취용 발골도를 꺼내 마석과 고블린 내장을 적출했다.


"승훈, 첫 수업이야. 무엇이든 재료 수집부터 시작해."

"고블린에게서요? 고블린은 딱히 쓸 게 없지 않나요?"

"뭘 모르는 소리. 고블린은 만물의 기초. 생즉고 고즉생이라는 말이 있어. 생명이 즉 고블린이고 고블린이 즉 생명이라는 뜻. 모든 헌터는 고블린으로부터 태어나 고블린으로 돌아간다."

"...그런가요?"

"고블린 안 잡아본 헌터가 있겠어? 헌터에게 고블린은 마치 어머니의 젖 같은 존재라고. 그런 고블린의 신체는 어떠한 가능성이든 잉태할 수 있는 초록색 기적이란 말이야."

"에..."

"아직 심득이 낮아서 내 말이 와닿지 않는 거지. 대충 흘려 들어 둬. 나중에 아 그런 뜻이었구나 깨닫게 될 거야."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다.

고블린은 자연발생하는 몬스터 중 하나다. 지상 생태계에 잎사귀와 벌레가 있고, 바다 생태계에 플랑크톤과 크릴새우가 있듯이 몬스터 생태계에는 고블린과 그 아종이 있다.


"몬스터 중에 고블린만큼 고마운 존재가 어딨겠어. 전설의 용사도 고블린부터 잡고 성장하지. 고블린이 없으면 인간 세계도 멸망하는 거야. 너무 흔하기에 그 귀중함을 모르는, 산소 같은 존재랄까... 이건 너무 나갔나."

"그런 거 같아요."

"어쨌든 다들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다른 고블린에게서도 적출해 와. 한 50마리 정도 더 잡으면 재료가 준비될 거야."


처음으로 따뜻한 사체에서 마석을 채취해본 팀원들은 새로운 경험에 흥미로워 하거나 역겨워 했다.

학교에서 연습용으로 쓴 더미 인형이나 폐기된 몬스터 사체와는 다르다. 따뜻한 살을 가르고 헤집어 마석을 꺼내는 것은 그다지 재밌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금술사 같은 제작 특화 직업은 재료 채취를 직접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래야 재료의 전체적인 특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으니까.


"마석은 따로 빼고. 눈알, 위장, 심장, 간, 허파도 잘라서 이 자루에 나눠 담아."

"무겁지 않겠어?"

"상현이가 들 거야. S랭크라서 힘이 좋아."

"...알았음."


팀원들은 피칠갑을 하며 재료를 채취했다.

고블린을 몇 무리 더 잡아 재료가 다 모이면, 팀원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마법진을 사용할 계획이다.

고블린 초원에 온 첫 번째 이유는 신탁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실전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팔괘 마법진 중 두 번째, 태괘泰卦를 소환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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