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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흑

천 번은 회귀해야 마법진을 깬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도버리
작품등록일 :
2023.04.10 10:05
최근연재일 :
2023.07.2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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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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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을 귀환 (2)

DUMMY

막힘 없이 17개의 조건을 제시한 후.

일단 받아적긴 했는데 어찌 해야 할지 난감한 스카우터들에게 잠시 숨 돌릴 틈을 주었다.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얼마나 조건에 맞춰주실 수 있는지, 각 길드에서 검토 후 제 메일로 결과를 보내주세요. 금액이 들어간 건 최고가 입찰제로 할 거구요. 내일 오후 2시까지 투찰해주시면 저도 확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좀, 나이에 비해 능숙하신데. 혹시 친인척이 헌터이신가요? 연습이라도 하신 거 같아서."

"친인척은 없고요."


나는 청룡 길드의 이청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단지 시장원리에 맡기고 싶을 뿐입니다. 헌터주의 사회도 자본주의 기반이잖아요."

"...그렇죠."


멍해져 있던 이청룡이 내 말을 듣고 눈을 빛냈다.

이청룡에겐 종교가 있는데, 시장 원리를 참 좋아하기 때문에 내 말은 일종의 계시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천 번의 삶을 살면서 느낀 건데, 사람들에게는 키워드가 있다.

상혁이 삼촌한테 '순응시험에 필요하다'고 하면 준비물을 챙겨주듯이, 이청룡에게는 '시장'을 언급하면 조건을 잘 맞춰준다.


"그럼, 기회가 되면 다음에 뵙죠. 저희끼리 나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세요."


스카우터들끼리 논쟁하도록 남겨두고, 아직 얼어 있는 친구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직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김용재가 속닥거렸다.


"진심이야? 우리끼리 팀 하자고?"

"싫으면 너희도 내일 오후 2시까지 톡해. 오늘은 일단 헤어지자고. 집에 가서 할 일도 있고."

"어어?"

"내일 봐."


딱히 우리끼리 밥을 먹을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다들 돌려보내고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싫다는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오후 2시 30분.


"이제 네 사람 다 계약 완료된 겁니다."

"네."


우리는 청룡 길드에서 계약을 마쳤다.

각 길드가 보낼 계약 조건은 어차피 다 알고 있었기에 검토하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청룡에서는 나에게 S급 3년 차 정도의 조건과 내가 제시한 특수 조건들을 맞춰주었고, 염상현에게는 S급 신입 중간 정도, 나머지에게는 A급 신입의 조건을 맞춰주었다.

우재유와 김용재가 서로 소근거렸다.


"좋은 거겠지...?"

"아마?"


내 계약에 엉겁결에 휘말린 세 사람이었으나 조건이 너무 좋았기에 딱히 따지진 못했다.

다만 자기들이 얼마나 좋은 조건에 들어온 건지 몰라서 엄청 기뻐하지도 않았다. 어린애들은 자기가 사회 들어가자마자 다 엘리트 되고 연봉 1억 넘고 그럴 줄 아니까.

그건 나 정도 되는 인재에게만 허락되는 초특급 특권이다.

이청룡 길드장이 말했다.


"완명 씨가 조건에 명시한 대로, 3월부터 정식 입사하고 헌터 활동을 진행하기로 했어요. 여러분이 들어갈 게이트는 수익률이 낮아도 성장하기 좋은 곳 위주로 고를 거고."

"이청룡 길드장님만 믿겠습니다. 조건도 잘 맞춰주셨잖아요."

"그렇지. 완명 씨는 물론이고, 상현 씨도 일반적인 S급 신입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야. 다른 친구들도 A급에 준하는 조건이고...."


이청룡이 다소 아깝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돈을 쓰고 나니 약간 후회가 밀려오는 듯했다.


"시장원리에 맡기신 결과잖아요."

"아, 그렇지."


이청룡에게는 다시 한번 치트키를 사용했다. 이청룡과 계약한 후 시장에 따른 결과가 아니냐고 하면 자기가 손해본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완전히 떨친다. 종교인에게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효과다.

뭔가 개운한 표정이 된 이청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나도 잘 부탁하고. 길드원들하고 직원들이랑 인사하고 회사 구경도 하고 해도 돼요. 이제부터 우리 길드 사람이니까."


회사 시설이 궁금한 기색인 세 친구보다 내가 먼저 대답했다.


"계약하느라 긴장했는지 피곤해서,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오늘만 볼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길드장실에서 나오자 염상현이 불평했다.


"왜 빨리 나옴? 난 구경하고 싶었음."

"근처에 맛집 알거든. 가자."

"그럼 킹쩔 수 없지."


얘네에게는 맛집이 좀 치트키다.

우리는 근처의 맛집으로 향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너희에게 부탁할 게 있다."


가벼운 분위기로 위장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분식집에 자리를 잡았다.

세 사람이 긴장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청룡 길드에 입사시켜주고 S랭크랑 같이 팀 활동하게 만든 다음에 부탁을 한다고..."

"그래."


도적 김용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았어... 원하는 게 내 몸이라면..."

"필요 없어 미친 놈아.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건 투자야."

"투자?"

"세 가지를 투자해야 해. 아티팩트를 구매하기 위한 투자, 게이트 활동을 위한 투자, 아웃서울 개척을 위한 투자."


어제 같은 팀으로 활동하자고 했을 때 만큼은 아니어도, 친구들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티팩트는 당연히 사야 하는 거고, 게이트 활동도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지만... 아웃서울 개척? 아직 보더서울도 위험한데 굳이 아웃서울을 개척해?"


친구들은 상식적인 반응을 보였다.


'앞에 두 가지는 안 물어볼 줄 알았다.'


그만큼 아웃서울 개척은 특이한 안건이었다.

게이트 이후, 세상에는 몬스터가 돌아다닌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도시 바깥에는 사람이 살 수가 없다.

한국의 경우에는 서울에 모든 인구가 몰려 있다. 과거의 영광을 좇지만 않는다면, 이미 '서울민국'으로 이름을 바꿨을 것이다. 서울 밖이래봐야 기존 광역시 위치에 작은 군사 요새를 세워두고 각종 자원을 수집하는 게 고작이다.

완전히 망해버린 세상에 영토 회복이라는 건 각성자 이전 시대의 꿈같은 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에겐 꿈이 있었다.


"보더서울은 이미 기업들이 점령했어. 치안도 안 지키는 주제에 치안유지비라는 명목으로 돈이나 뜯어가지."


기업들이 뿌리를 단단히 박아놨기에 틈이 나질 않는다.

또한 빠르게 성장하려면 기업들과 부딪힐 일도 많아서, 보더서울에서 활동하기에는 껄끄럽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요새를 짓고 싶은데, 인서울이든 보더서울이든 기업들이 가만히 냅두지 않을 거야. 아웃서울로 가야 해."

"요새? 요새가 왜 필요해?"

"여러 가지 이유로 필요해. 내 목표는 인서울이 멸망할 정도의 대환난이 오더라도 버틸 수 있는 요새를 건축하는 거야."

"그럴 거면 그냥 인서울에 투자하지?"

"말했듯이, '인서울보다 안전한' 곳을 만드는 게 최종 목적이야. 그리고 우리가 안전한 토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면 한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투자금이 쏟아지겠지. 나는 그걸 너희와 함께 하고 싶다는 거고."


표면적으로는 이런 계획이다.

내부적으로는 조금 다르다.


'내가 인서울에서 싸우면 피해가 막심해서 한국이 궤멸된다고.'


서울의 인프라를 파괴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아웃서울로 나가는 게 낫다.

그리고 정말로 아웃서울에서 내 맘대로 지형을 조작해두면 인서울보다 훨씬 안전하다. 마법진과 아티팩트, 상시 호위까지 붙인 건축물을 지으면, 1급 게이트가 폭발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야생 몬스터로부터 마석과 자원도 획득할 수 있다.

반면 인서울, 보더서울에서는 돈 쓸 일만 가득하고 절차도 복잡하다. 행정이 제대로 된 것도 아니라서 뭐 하나 지으려고 하면 뇌물도 찔러줘야 한다.

특히 강북 쪽은 정부 때문에, 강남 쪽은 집주인들 때문에 뭘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답은 아웃서울이다.


'아웃서울에 전투용 요새를 만든다. 한국이 멸망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성채를.'


나 혼자 초기 자금을 준비하는 건 한계가 있다.

조금이라도 빨리 성채를 만들려면, 세 사람을 끌어들여야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소극적이었다.


"글쎄... 잘 모르겠음. 뭐, 내가 뭘 알겠음? 순응 공부만 한 고딩인데."

"흠... 나는 네가 원한다면 돕기야 하겠지만..."

"솔직히 잘 될 거 같지 않은데."


염상현, 김용재, 우재유의 반응이었다.

우리들이 나고 자란 세상에서는 비상식적인 얘기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각성자 이전 시대로 말하자면 심해에 도시를 만든다거나, 화성으로 이주하자는 거랑 비슷하게 실현 가능성 0%의 미친 소리였다.

각성자 이전 시대로 말하자면 심해에 도시를 만든다거나, 화성으로 이주하자는 거랑 비슷하게 실현 가능성 0%의 미친 소리였다.


"시간을 줄게. 일단 밥부터 먹자."


나는 이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약간의 수작을 부리기로 했다.

괜히 맛집으로 온 게 아니다.


"여기 마라눈꽃치즈흑당버터크림까르보로제트러플누룽지대왕불닭한우허니버터삼겹살카이막프로틴마약차돌돈가스훈제오리튀김곱창 떡볶이 4인분 주세요."

"그거 맛있어?"

"개맛있어. 장난 아니야."


이것은 입에 넣으면 미각부터 뇌까지 폭발하는 엄청난 음식이다.

1달 뒤 마약으로 규정되어 세상에서 사라지기에 지금만 먹을 수 있는 메뉴이기도 했다.


"너무 맛있엉..."


그리고 수백 번을 그러했듯이, 그들은 황홀경 속에서 노곤노곤 녹아내렸다.

지금이 기회였다.


"앞으로 딱 1년만 나를 따라와. 청룡 길드에도 넣어줬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다들 양볼이 미어터지도록 떡볶이를 넣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1년 만 내가 뿌리는 콩고물 맛을 보게 되면 다른 데로 가지도 못한다.

나는 내가 바쁘거나 귀찮아서 갈 수 없는 게이트의 재료를 모아오게 할 만한 믿음직한 사람들을 얻게 되고, 이놈들은 어디 가서 못 얻을 기연으로 강해지게 된다.

나는 상현이에게 속삭였다.


"특히 너는... S랭크 각성은 했어도, 실제로 S랭크가 하는 전투를 하기엔 위험하다는 걸 꼭 알아둬."


S랭크들이 보여주는 가공할 만한 재능과 실력에 비해, 염상현의 실력은 C랭크에 머물고 있다.

평범한 A랭크랑 싸우면 스탯 차이에도 불구하고 패배할 것이다.

S랭크의 임무를 받았다간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나도 알고 있음. 난 네 제안 좋음."


염상현이 떡볶이를 마저 삼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 거임?"

"아웃서울 요새에 투자하면 되지."

"하지만 돈이 없음."

"그것도 방법이 다 있다."

"완명이는 계획이 다 있구나... 뭔데?"


게이트 이후로 바뀐 건 서울의 영토 뿐만이 아니다.

은행 또한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은행에서 가서, 신의 도움을 빌려야지."


은행은 단순히 돈놀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신의 은총을 행사하는 곳이 되었다.



###



대중첩The Overlay 사건.

게이트와 몬스터, 마법 등 초자연적 힘이 있는 초월超越지구Over-earth가 그런 것이 없던 평범平凡지구Normal-earth가 덧씌워진 사건이다.

초월지구의 존재들은 강력하고 상식을 벗어난 힘으로 일반인을 유린했고, 범원지구는 이에 맞섰으나 비축된 화력과 물량이 떨어지자 금세 몰락했다.

두 지구 간의 충돌은 결국 평범지구가 초월지구에게 굴복하고 보호를 요청하며 끝나게 되었고...

인류를 지배하게 된 초월지구의 존재들을 평범지구에서 태어난 적이 없다 하여 '네버본Neverborn'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중 초기부터 인류에게 호의를 표한 네버본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태고지모신太古地母神 인안나Inana였다.

최초의 시스템조차 인안나의 힘을 빌어 축복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인안나가 없었다면 인류는 완전히 절멸했을 것이었다.

그런 인안나가 인류에게 준 또 다른 축복이 있었는데...


"대지 여신금융투자신탁 은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필멸자 분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바로 대지 여신금융투자신탁 은행Earth Goddess's Fianace-Investment Oracle大地 女神金融信託信托 銀行이었다.

대지은행에서는 여신이 보증하는 금융거래와 신탁을 통한 투자 및 대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화폐를 보증할 힘이 몰락한 세상에서, 여신의 이러한 헌신을 통해 화폐 가치가 보장되고 경제활동에 믿음이 생겼으니 어찌 은총이 아니랴.

나는 복채 삼아서 갖고 온 산고블린 마석 몇 개를 내밀며 신관에게 말했다.


"신탁을 받으러 왔습니다. 저 말고, 이쪽 세 명한테 대출이 가능한지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필멸자 분들, 신룡의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대지은행 내부는 신성한 벽돌과 장엄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신관은 무슈후슈라는 용의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왔다.


"조각상의 입에 손을 넣어주세요. 전생에 선하게 살아 영혼이 고결하신 분이라면 대출 한도는 높되 금리는 낮게 나올 것이고, 아니라면 반대로 나올 것입니다. 준비되시면 신룡 정보 조회의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염상현이 제일 먼저 조각상의 입에 손을 넣었다.


"인안나시여, 여기 신룡 무슈후슈의 힘을 빌어 이자의 영혼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당신의 미천한 종이 정의로운 대출 심사자가 되는 것을 허락해주시옵고 정보를 조회하도록 도와주소서..."


파아앗...

화륵!


신관이 기도문을 외우자, 무슈후슈 조각상의 여섯 부위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불길은 신관에게 깃들어서 염상현이 전생에 어느 정도 착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신관이 먼 곳을 응시하며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룡 점수 6등급이시군요. 필멸자께서는 연수익의 96%까지 대출이 가능하십니다."

"높은 것임요?"

"1등급이 제일 높고, 10등급이 제일 낮은 겁니다."

"아... 등급을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함요?"

"기본적으로 전생의 선업을 측정하는 것이라서... 이번 생에서 덕을 쌓고 다시 태어나시는 게 가장 확실하지요. 꾸준히 지모신께 기부하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한 삼십 년 정도?"


신룡 점수는 올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재유와 김용재를 고른 것이기도 했다.

얘들은 전생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신룡 점수가 높게 나온다.

이어서 우재유와 김용재도 차례로 신룡 점수를 조회했고, 염상현보다 훨씬 높은 각각 3등급과 2등급이 나왔다.

염상현이 투덜거렸다.


"엥? 난 6등급이고 너흰 왜 2, 3등급임?"

"니가 전생에 개천민이었나 보지."

"천민은 나쁜 짓 못 함. 귀족이었을 듯. 니네가 천민이었을 듯."

"근데 완명이는 대출 안 받아?"


세 사람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


회귀 4회차 때의 일이다.

세 번의 죽음을 겪으며 초반 재산의 중요성을 깨달은 나는 대지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 했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나도 무슈후슈의 입에 손을 넣고 신용정보를 조회했다.

나의 신성함 정도면 100억은 너끈히 대출받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인안나시여, 여기 신룡 무슈후슈의 힘을 빌어 이자의 영혼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꺄아아아아악!"


신관이 신성력을 발휘하다 말고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고오오오...


무슈후슈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올라오더니, 신관에게 깃들어 내 전생의 악업을 보여주는 듯했다.


"세, 세상에 이런 악이... 아아악! 피! 죽음! 어둠! 고통! 절망! 부그르륽..."


풀썩.


신관 입에 흰 거품이 올라오더니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텁!


동시에 조각상의 입이 닫혀서 내 손을 가두었다.

은행 보안 성기사들이 총과 칼을 뽑아들고 달려왔다.


"당신 뭐야? 거기 가만히 있어!"

"아니, 난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 사람 무슨 마약이라도 하나 봐요. 신관이 마약해도 되는 거예요?"


다른 신관들도 다가와서 쓰러진 신관과 나를 살펴보았다.

나야 무해하게 생긴 19살짜리 남자애에 불과하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기조차 힘들었다.

신관 한 명이 신성력을 발휘해 사태를 파악해보려 했다. 내 손이 여전히 무슈후슈에게 물려 있었기에 기도문만 외우면 됐다.


"확실히 외상은 없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인안나시여... 꺄아아아아아아! 이 사람, 전생에... 아아악! 너무 끔찍해! 빨리 쫓아내요! 아니,죽여! 죽여야 해! 이런 악을 세상에 풀어놓을 수 없어요!"

"...저 그냥 갈게요. 대출 안 받아도 되니까..."

"죽어어어어어!"

"아이, 씨."


퍽!


내가 실성해 덤벼드는 신관을 쓰러뜨리자, 분노한 보안요원들이 총기를 발사했다.


타타탕!


사살 당한 건 처음이었다.


---


"...나는 청룡 길드에서 싸게 빌렸어. 계약 조건에 있었잖아."

"아, 그랬지."


회귀를 반복할수록 편해지는 게 있고, 불편해지는 게 있다.

순응시험은 편해진다면, 여신금융투자신탁 이용은 불편해진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신탁을 맡은 신관이 실성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불살 루트도 도전해 보고, 착하게 살아서 두 번 정도 더 시도해봤으나, 결과는 오히려 더 나빠졌다.

왠지 모르겠다. 나름 착하게 사는 거 같은데...

뭐, 이런 건 사소한 문제다.

나는 신관에게 본론을 꺼냈다.


"바로 투자 신탁을 받아주세요. 세 명 다 영혼담보대출에 청년목줄채움공제 적용해주시구요. 각종 증빙 서류는 청룡 길드에서 해주실 겁니다. 단체 신탁으로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금액이 커서 연계 신탁으로 가겠습니다. 인안나시여..."


번쩍!


신관의 눈이 빛나고, 그 음성에 위세가 깃들었다.


[필멸자여, 너희는 탐욕스레 집어삼키는 땅으로 갈 지어다. 너희는 초근목피의 추장을 죽이고, 그 씨앗을 거두어 오라. 떠날 때는 황소의 축복으로 떠나되, 돌아올 땐 수탉의 축복을 받으리라. 이는 봄의 신탁이니.]

"...무슨 뜻임?"


모호한 신탁 내용에 친구들이 당황했다.

신관이 강신 상태에서 벗어나 설명했다.


"2호선을 타고 옛 홍대입구 지역 9번 출구로 나가시면 '고블린 초원' 상설 게이트로 가는 길이 보일 겁니다. 그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고블린 치프틴의 마석을 가져오시면 됩니다. 선수금으로 총 대출금의 8.34%를 드릴 거구요, 돌아오시면 추가로 16.67% 더 불출해드립니다. 이런 임무를 다해서 4번 수행하시면 됩니다. 스마트폰으로 신탁 원문이랑 해설 전송해드릴게요."

"아, 예. 친절한 상담 감사합니다..."


고대 신탁이라면 모호하겠으나, 요즘 신탁은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나는 성스러운 체험에 정신을 못 차리는 친구들을 곧바로 정신차리게 해줬다.


"선수금으로 아티팩트부터 사러 가자."

"아티팩트!"


아티팩트.

헌터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말이다.

김용재가 빠르게 물었다.


"좋은 거 살 거지? 근데 압구정 헌터리아 같은 곳에선 1년치 연봉 부어도 무기 하나 못 산다고 들었는데."

"첫째, 너희 그런 거 들고 다니면 뒷골목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둘째, 그거 바가지야. 셋째, 우리가 살 아티팩트도 상당히 좋은 거야."

"어디서 살 거길래?"


회귀 천 번을 거듭하면서 한국의 모든 상점을 둘러본 나다.

그런 내가 인정한 최고의 가성비 가게가 있다.


"금기의 아티팩트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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