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말괄량이화가와 수행기사(2)
"제린경하고 가면 재밌을 것 같거든요."
레이나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제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차피 말로 설득할만한 재능도 없는데 자신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된다고 딱 자를만한 이유도 의지도 없기도 했고.
사실 레이나라는 사람이 궁금하기도 했다.
마탑의마도사, 천부적인 재능의 화가, 힐데브란트의 조카.
어느 하나하나 따져보면 대단하지 않은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 아가씨는 자신을 수식하는 어떤 것에도 얽매지 않는다.
항상 자유로웠고 또 항상 웃었다. 고민 따위는 없는 것처럼 말을 내뱉고, 항상 즐겁게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는 빠져들 줄도 안다.
그게 정말 부러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는 항상 고민했고, 자신의 눈앞에 놓인 벽을 보며 고민하고 부딪히며 살아왔으니까.
그러는 과정 중에 웃는 날도 분명히 있었지만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더 많았다. 아마 자신의 옆에 형과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그래서일까.
한번 배워보고 싶었다. 레이나가 말하는 것처럼 다른 풍경을 보는 게 성장의 지름길이라면 그녀만큼 다른 풍경은 없을 테니까.
제린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레이나의 손을 풀며 말을 뱉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랄 만큼 여유롭고 자연스럽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삼촌한테 허락받고 오라는 것 빼곤 뭐든지요!"
"설마 허락도 받지 않고 온 겁니까?"
"....... 앗, 들켰다!"어처구니가 없어 오른손을 이마에 짚었다. 보통 생각이 행동보다 먼저 나와야 정상인데 이 아가씨는 아무래도 반대인가 보다.
그래도 부끄러운 것을 아는지 레이나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을 뱉었다.
"그래도 전하한텐 허락을 받고 나왔어요! 카를 전하라면 얼마든지 삼촌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허락받은 거나 마찬가지죠."
"......"
"카를 전하는 걱정하지 말라고 여행경비까지 내주셨다가요. 여기 통행증까지 해서."
당당하게 내민 통행장에 카를의 인장이 찍혀 있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니다.
제린은 순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힐데브란트의 얼굴을 떠올렸다.
말로 대꾸해서는 이길 수 없는 자의 슬픔. 자신은 너무 잘 알고 있는 입장이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직접 카를에게 따질 수도 없고. 제린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네, 힐데브란트님의 허락은 나중에 받는 걸로 하죠. 왠지 속는 기분이지만."
"잘 생각했어요."
"제 조건은 간단해요.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물론 공짜로요."
마지막 말에 레이나의 실망하는 표정이 떠올랐다면 착각일까?
제린은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여행하는 동안 실력을 쌓고 싶고, 성장하고 싶어요. "
"제가 그리는 그림이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죠."
자신도 놀라울 만큼 말투에 자신감이 넘쳐났다. 제린은 레이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전 그동안 검만 쥐고 살았어요. 치열하게 살았지만, 그건 정말 좁은 의미에서 치열함이었죠. 항상 같은 환경에 비슷한 사람, 또 같은 일만 하며 살았으니까요. 레이나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장 영감이 필요할 사람은 아마 저일 겁니다."
"그 영감이 제 그림인가요?"
"맞아요. 게다가 레이나님은 정말 좋은 눈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때 그 그림만 하더라도 그랬지.'
레이나는 정말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처음에는 그녀의 그림 실력 그 자체에 감탄했었다. 선이 생명을 탄생시키고 세상을 창조하는 그 순간.
마치 세상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 혼자만 남은 듯한 존재감.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고 잠시 그녀의 재능에 질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고 나면 더 대단한 건 그녀의 전달력과 관찰력이었다.
검술에 문외한인 그녀가 자신도 모르고 있던 허점을 정확하게 화폭에 담아냈으니까. 그것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그녀의 재능이라면 분명 자신이 놓친 것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걸 지난번처럼 흡수 할 수 있다면 자신은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그걸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해야 할 일이다.
더군다나 레이나 자체로도 여행에 도움이 될만한 마도사니 따질 이유가 없기도 하고.
"부담을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전적으로 영감을 레이나님께 의지할 만큼 무책임한 인간은 아니니까요."
"난 그럴 생각이었는데."
둘은 레이나의 말에 웃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사실 제린경 부탁이 아니더라도 전 그림을 그렸을 거에요. 긴 여행을 하면서 느낀 건 분명 있을 테고, 난 그런 걸 글로 적는 건 못하거든요. 그리고."
"?"
"제린경은 정말 좋은 모델이기도 하거든요. 지켜보는 것도, 그걸 화폭에 담는 것도 즐거운. 그런 모델을 만나는 것도 화가의 행운이니까."
레이나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순간 제린은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같이 웃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아무래도 이런 칭찬에 대답하는 건 익숙하지 못했으니까. 어설픈 자신의 말솜씨로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쁜 칭찬이기도 했으니까.
'형이었다면 좀 더 멋진 대답을 할 수 있었으려나?'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 형의 언변이 부럽지는 않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기 생각이 전달됐을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잘 부탁합니다."
"저도요."
말괄량이 화가와 애송이 수행 기사가 손을 마주 잡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향해 걸었다.
마치 목적지가 어디이고, 어떻게 가야 할지를 오랫동안 의논해왔던 동료처럼.
레이나의 입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제린이 그 노래를 받았다.
길고 긴 노랫소리가 나뭇가지에 노랫소리가 흔들거렸다.
화가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고, 기사는 그 앞에서 장면을 만들었다. 화공은 이 이야기의 첫 모습을 저 기사의 뒷모습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흔들리는 어깨, 그리고 그 위로 흔들거리는 머리카락.
신기했다. 별 것 없는 장면인데도 한순간 한순간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 이래서 모델이 중요하다니까.'
역시나 화가의 결론은 엉망이었다.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 주셔서 기쁩니다. 사실 댓글이 한두개 달릴 생각도 했었는데......
후속작을 쓸지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외전을 더 이어 쓰거나 아니면 에니아의 이야기를 써볼까 고민중입니다. ㅇㅂㅇ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