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31. 던져진 주사위
그리고 카를은 보았다.
주사위의 눈이 6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의심조차 하질 않는군.’
카를은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를 주우면서 생각했다. 이미 로비안의 머릿속에는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없다고. 그게 자신에 대한 확신인지, 그도 아니면 그동안의 준비에 대한 확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어느 쪽이어도 나쁠 건 없지만.
카를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주머니에 주사위를 집어넣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는 단 한 번도 운을 믿지 않았다. 그의 삶은 지금까지 확률을 높이기 위한 싸움이었으니까.
상대가 모르게 구덩이를 파고, 가면을 써가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이 녀석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 감이라는 걸 믿어보고 싶어진다. 나이가 들더니 마음이 약해진 거라면 할 말이 없지만.
“신기하군. 전혀 질 것 같지가 않아.”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이미 자신도 판돈을 전부 털어 넣었다. 그 판돈 위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운명까지 얹었다. 그런데 기분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불안감 따위는 조금도 생기질 않는다.
그건 아마도.
그동안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자신감 있게 던진 주사위가 보여준 6. 그건 지금 단 한 번만 일어난 일들이 아니었으니까.
카냐에서도 로히다에서도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타타르에서도.
로비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사위를 던져댔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싸움에서 항상 6을 만들어냈다. 왕국에서 가장 성공한 도박사였던 카를 폰 로히다도 포기한 어려운 싸움들을 이 녀석은 해냈고, 자신의 눈앞에 결과로 보여줘 왔으니까.
왕의 그릇.
로비안은 그걸 스스로 증명했다. 그리고 카를은 왕의 자격을 갖춘 이 남자의 자신감을 믿었다. 이 다음도, 그리고 그 다음도 로비안은 틀림없이 6을 띄울 것이다. 그는 웃으며 로비안의 옆에 섰다.
“아무래도 나도 감이 좋은 모양이야.”
“이제 쓸어 담는 일만 남았군요.”
멀리서 봉화가 솟아올랐다.
검은 연기가 국경선을 타고 수도 쪽을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카를도 로비안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20년간 구하려고 했던 사람.
다시 한 번 뜬 6에 카를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질 수 가없는 싸움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을 들어 페르마에게 소리쳤다.
“가자, 사막으로!”
그는 주머니에 든 주사위를 바닥에 던지면서 생각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멋지게 성공시킬 차례다. 그 역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 눈은 분명히 6일 테니까.
로비안이 의심하지 않았듯, 그 역시 확신했다.
***
안전한 곳에 이르자 무라드는 잠시 낙타에서 내려 그늘을 찾았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했다. 조금만 더 내려갔어도 그가 붙잡고 있는 건 어깨가 아니라 심장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반쯤 그을린 로브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성공 했으니까 된 거야.’
이정도면 치료만 한다면 충분히 나을 수 있다. 조금만 요양을 한다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고. 그는 한숨을 몰아쉬며 통증을 참았다. 일단 마나가 돌아오기만 하면 응급처치는 할 수 있으리라. 조금씩 통증이 잦아졌다.
그리고.
무라드는 입에서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항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에 선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았다.
‘외모만 빼면 딱 카를전하군.’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옷을 자르고 그 위에 챙겨온 약을 바른다. 약한 모습이나 머뭇거림은 전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약부터 챙긴다는 것부터가.
무라드는 그때의 싸움을 생각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카를의 동생이 아니랄까봐 무라드를 보자마자 한 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손에 약과 비상물품만 가지고 뛴 그녀의 명석함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크게 위험해 졌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무라드경이 아니었다면 오빠에게 계속 짐이 됐을 테니까.”
그녀는 나무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나무 그늘을 지워버릴 것처럼 환한 미소로.
20년이나 되는 긴 세월동안 그녀는 한 번도 고향땅에서 눈을 떼 본 적이 없었다. 황제와 카냐는 그녀에게 큰 사랑을 줬지만 이 땅은 결코 그녀의 고향이 될 수 없었으니까.
로히다에는 자신의 추억들이 있었고, 그리던 미래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하나뿐인 가족이 있었다. 그렇게 꼭 데려오겠다는 약속 하나만을 믿고 그녀는 기다렸고, 마침내 그 약속은 이루어졌다.
무려 20년이나 지난 약속이지만.
“카를전하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해가 지는 서쪽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가끔씩 나도 믿음이 흔들리는데, 오빠라고 뭐가 다를까? 어쩌면 오빠도 그냥 편하게 포기하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확신 없는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니까.
“그런데 오빠는 단 한 번도 그런 선택을 해 본적이 없어요.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항상 그 약속을 지킬 것만 생각했죠. 편하게 왕좌에 앉아서 만족하는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네, 보통은 다 그렇게 사니까요. 설사 그런 선택을 하셨다해도 전 비난하진 못했을 겁니다.”
“그런 오빠를 보며 폐하는 그런 말을 했었죠. 정말 바퀴벌레 같은 녀석이라고. 한 번 기회를 잡아 밟아버리면 간단한데 그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요. 그 만큼 집요하고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절대 포기하지 말자고.”
붉은 노을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로히다에 돌아가면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정말 고맙다고. 오빠덕분에 20년의 긴 시간을 타지에서 견딜 수 있었다고.”
“이제 곧 만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녀의 시선이 서쪽을 향했다.
카를은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정말 바퀴벌레처럼, 수많은 위기를 견뎌냈고 목표 바로 앞까지 왔다.
그걸 잡는 걸 도와주고 싶다.
오빠는 항상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젠 자신이 돌려줄 차례다. 카를 폰 로히다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남자니까.
- 작가의말
다행이도 1주일 안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당연히도 구출한 사람은 카를의 동생이었습니다. 휴재 기간이 오래되서 기억에서 잊어버리신 분들이 많겠죠. 마지막으로 언급했던게 아마 챕터 14 뒤집어진 왕관의 의미였던가요?
제국의 황제,아르타나,정진섭,fenix11,백우,만월이,이내바람님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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