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27. 체스말과 대국자
두 번째 가면이 제린의 얼굴에 씌워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쑈가 시작되는거다. 로비안의 손짓에 단검 하나가 날아가 벽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사기꾼이 웃으며 말했다.
“이젠 여섯 번이네.”
로비안의 단검에 산채가 폭발하자 제린은 몸을 날렸다. 흐릿하게 잔상만 보일 정도의 속도. 로비안은 그와 동시에 횃불에 불을 붙였다. 누가 보더라도 대군이 매복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휘이잉-
횃불이 붙은 나무들이 동시에 흔들린다. 검은 연기에 흩날리는 불빛.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산적들 모두가 기억하는 얼굴.
“실버 비스트!”
산적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진열을 갖추지 못하고 서로 부딪히기 바빴다. 생각하기 싫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천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던 산채를 부셔버린 남자. 그 괴물이 이 산채를 노리고 쳐들어 온 것이다.
그리고.
실버 비스트의 손짓에 수십개의 화살이 동시에 날아오기 시작했다. 말들은 굉음에 도망쳤고 그에 맞춰 산적들의 움직임은 둔해졌다.
“도망치지 마라!”
칼의 지휘도 소용없었다. 그의 손짓에 움직이는 건 휘하의 몇몇 뿐. 그나마도 날아온 화살에 허둥지둥 도망치기 바빴다. 실버 비스트의 가면 뒤로 스산하게 웃는 모습이 보인건 착각이었을까?
“두번째.”
콰아앙-
로비안의 두 번째 단검이 벽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구석 쪽에 몰린 산적들은 몸을 웅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한명도 다치거나 죽은 놈이 없다는 것이겠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근데 왜 돌격해 오지 않는거지?’
화살을 피하며 칼은 머리를 굴렸다. 지금 군대를 푼다면 별 피해 없이 산채를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날아오는 것은 화살과 폭발하는 단검뿐이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에서 대체 왜 시간을 끄는 것일까?
콰아앙-
이번엔 단검 두 개가 동시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흙먼지가 올라오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을 즈음, 칼은 검은 그림자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이언 마스크!”
은빛 가면의 검사.
검집에서 뽑지 않은 검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검이 아닌 검집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 검집이 부하 세명의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키는 모습을.
‘대단한 솜씨야. 하지만.’
칼은 인상을 찌푸리며 은색가면의 검사를 바라보았다. 검은 연기가 막사 곳곳에 피어오르며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마치 타타르 요새의 마지막을 보는 것처럼 허무하게 무너진 자신의 성채. 하지만 그 순간에 칼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까부터 느꼈던 그 위화감과 의문.
쏴아아-
실버 비스트의 손짓에 화살이 하늘 위에서 쏟아졌다. 그 화살을 피하면서 칼은 아까의 그 의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철저하게 피하면서 날아오는 화살. 그리고 검은 절대쓰지 않는 검사.
‘잠깐만?’
그는 주위에 부하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까부터 쓰러진 병사들은 전부 같은 부위에 같은 높이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낮은 높이에서 검집을 올려친 공격. 아까 봤던 그 은색 가면이라면 그런 공격을 할 수 밖에 없으리라. 작은 키에서 효율적인 공격을 하려면 그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저렇게 작은 검사가 흔한가?
그제야 칼은 동시에 두명 이상의 적을 본적이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저 위에 마법사 한 놈. 그리고 돌격해 들어오는 은색 가면 한 놈. 만약 저 습격이 처음부터 저 둘만 있었던 거라면?
콰아앙-
네 번째 단검이 폭발하며 도망칠 출구까지 막아버렸다. 칼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어차피 저 뒤에 앉은 마법사 놈은 건드릴 방법이 없다. 진짜 실버 비스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마법사인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저 은빛 가면이라면.
분명 굉장한 실력자다. 하지만 아까부터 단 한차례도 검을 뽑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도 날린적이 없는 살수. 만약 이쪽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해볼만한 모험이야.’
저기 실버 비스트도 마찬가지다. 아까부터 단 한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한 적이 없다. 계속 가벼운 폭발마법으로 자신들을 한군데 몰아세우기만 했으니까. 역시 단 한명도 죽이지 않은 채로 말이다.
전부다 합세해 은색 가면의 검사만 잡는다.
그게 자신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해답이었다. 결심한 칼은 손짓으로 병사들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우왕좌왕 하는 병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간 오히려 더 통솔하기 어려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을 맞춰 후퇴해라. 아군을 붙잡아.”
이미 절반 정도는 기절해 있거나 전투 불능 상황. 칼은 뒤로 후퇴하며 정신을 못차리는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물론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저 위에 마법사 놈이 계속 귀찮게 화살을 날려대고 마법을 난사해 대는 통에 말이다.
‘저기 저 놈만 없었어도.’
병사들을 모을만하면 저기 저 위에서 훼방을 놓는다. 그것도 대단한 방법이 아닌 화살과 단검을 이용해 모이는 것만 철저하게 방해하는 식으로.
하지만 적어도 그 덕에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 나무 뒤에 오른 횃불과 흔들리는 나무들은 전부 다 거짓이라는 것. 저기 마법사는 혼자 뿐이다.
‘대체 왜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는 거지?’
은빛의 검사가 다시 돌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흩어진 병사들은 검사의 먹잇감이 되어 쓰러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애초에 저 마법사는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런 귀찮은 방법을 쓰지 않아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라는 말. 대체 왜 이런 방법을 쓰는거지?
'할 수 있는게 이것 밖에 없으니 그렇지.'
가면 뒤의 마법사는 사악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 작가의말
아마 프로필을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제린은 검사치곤 키가 작아요. 심지어 마법사인 로비안 보다 작다는. ㅇㅂㅇ 그정도 핸디캡이 좀 있어줘야 밸런스가 맞겠지.
연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1주일은 안지났으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덧) 로비안도 마법사였지....... 잊어 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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