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28. 가진 것, 그리고 가지고 싶은 것.
2.
‘역시 피는 못 속여.’
카를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얼굴엔 특유에 여유로움이 흘러넘치다 못해 뚝뚝 떨어질 정도다. 아마 왕궁에서 제일 눈치 없는 페르마라 해도 누군지 한 번에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다.
마르시온 백작.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남자는 단 한 번도 본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항상 무대 뒤에서 숨어서 움직였고, 자신을 숨겼다.
그런 이 남자가 자신의 부름에 응한 건, 상당히 의외라고 할만 했다. 그건 아마 더 이상 연기를 하기 지쳤거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할 일 많은 사람을 오가라 해서 미안하군.”
“술 마시는 것도 일이라면 일이지요. 요즘은 그 일밖에 없어서 문제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여기서도 그 일좀 같이 해줘야겠네.”
눈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술상에 백작은 나온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술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른다.
“그동안 자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성의 표시 한 번 하지 못했군. 미안하네.”
“뭐, 제가 한 일이 있겠습니까? 다 제 자식 놈들이 한 일이죠. 제가 한 일이라야 백작작위를 날로 먹은 것 하나 밖에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겸손할 필요가 있나? 내가 알기론 자네 인생에서 날로 먹은 건 백작작위 하나뿐인데.”
그 깐깐한 페르가논 후작을 설득한 것만 포함하는 게 아니었다. 별 생각 없이 조사를 해 본 이 남자의 이력은 정말로 특이했으니까.
고아에 별 볼일 없는 용병.
귀족이 고위귀족으로 올라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급 용병이 귀족으로, 그것도 별 견제를 받지 않고 살아남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아무 지원도 받지 않고서 말이다.
카를은 뜨겁게 데워진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표정에서 로비안의 얼굴이 대비된다.
분명 닮았지만 로비안과는 다르게 이 남자에게선 뚜렷한 목표가 보이질 않는다. 눈빛은 흐릿하고, 여유로운 표정 뒤의 얼굴은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고요하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카를은 반쯤 허리를 빼고 앉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왜 자네를 불렀을 것 같은가?”
“글쎄요. 뇌물치곤 이 술이 그리 비싸보이진 않고.”
“자네와 한 번 대화를 해보고 싶었네. 그리고 거래를 할 만한 사람인지도 알아보고 싶었고. 물론 가장 필요한 정보 하나는 얻지 못했네만.”
“그게 뭡니까?”
따듯한 술잔에 술이 다시 채워졌다.
“자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
“......”
“만약 내가 자네의 처지에서 귀족이 되었다면, 그 자리에서 그냥 머무르고 있지는 않을 걸세. 권력이라는 게 워낙 달콤한 놈이라서, 사람을 계속 살살 유혹하거든. 더 많이, 더 크고 대단한 놈을 달라고 말이야.”
“흥미롭군요.”
“그런데 자네는 달라보이는군. 욕심이 없는건가, 아니면 겁이 많은건가?”
“글쎄요.”
마르시온 백작은 배를 두드리며 여유롭게 웃는다. 잠이 올 것 같은 사람 좋은 얼굴로.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다른 선택지를 넣지요. 능력이 부족해서. 뭐, 그런 이유면 충분하겠죠.”
“로히다에서 제일 부자인 가문의 금고를 말 한마디로 털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세상에 능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알고 계셨군요.”
“알다시피 내가 유능한 부하가 좀 많아서 말이야.”
마르시온 백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귀족이라는 거. 생각보다 쓸모 있더군요. 생각할 수 없었던 걸 가질 수도 있고, 팔자에도 없는 대장 노릇도 할 수 있고. 그런데 그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제 인생에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그게 언제인 줄 아십니까?”
“궁금해지는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이쪽은 하급 용병 나부랭이고, 저쪽은 높으신 분인걸 알았을 땝니다. 장인이 그런 말을 하시더군요. 귀족이라도 될까 말까인데 겨우 용병 나부랭이가 될 것 같으냐고.”
“보통이라면 포기하고도 남을 일이네만.”
“그래서 그 귀족이라는 걸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정말 많은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말이지만, 마르시온 백작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냈다. 검술도 대단할 것 없는 일개 하급 용병이, 비록 무너져가는 시골 영지와 남작의 작위를 얻은 것이다.
“전 작위가 단 한 번도 목적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난 후엔 뭐, 이대로 편하게 독거노인으로 죽으면 그걸로 됐다라고 생각했는데.”
마르시온 백작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큰 아들 놈이 술만 퍼마시고 놀고먹는 게 혈압이 올라 수도로 보내 버린 잘못에 이 고생을 하고 있지요. 생각해보면 그 놈도 아비 닮은 것 빼고는 잘못한 게 하나 없는 놈인데......”
“지나치게 많이 닮았지.”
마르시온 백작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마치 좋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 아들놈이 하루하루 바뀌는 것을 봤습니다. 족제비처럼 살살 피하려고만 하던 놈이 꼭 해야겠다는 눈빛으로 기를 쓰고 무언가 하는 것을 말이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에서도 녀석이 웃더군요. 마치 내가 처음 귀족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처럼 말이죠.”
“조금은 알 것 같군.”
“전하가 제가 뭘 원하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으니 말씀드리지요. 전 별 것 없습니다. 로히다가 전쟁에 승리하고, 전하의 복수가 성공하고...... 그런 것 보다는 그냥 제 아들놈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부정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제 목적이고 삶의 이윱니다. 또 죽은 아내의 부탁이기도 하고요.”
“......”
카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르시온 백작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쯤은 그도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눈빛에선 생명이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이제 두 번째로 뭘 해야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쉬운 일이 아닌 것도 잘 알지요. 하지만 그래서 더 힘이 되고 도와주고 싶습니다. 별 것 아닌 힘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말이죠. 불가능한 일이라면,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마르시온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말이죠.”
- 작가의말
생각보다 글쓰는게 오래걸렸습니다. 그래도 복귀하고 15편이나 꾸준히 달렸으니 연중은 안할것 같다는 확신이 듭니다. ㅇㅂㅇ.
사실 전 로비안보다 저 두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안타깝게도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좀 자주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오늘도 성원해 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