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28. 가진 것, 그리고 가지고 싶은 것.
“이제 두 번째로 뭘 해야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쉬운 일이 아닌 것도 잘 알지요. 하지만 그래서 더 힘이 되고 도와주고 싶습니다. 별 것 아닌 힘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말이죠. 불가능한 일이라면,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마르시온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말이죠.”
카를은 그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 것 같았다. 왜 이 남자가 그렇게 강할 수밖에 없는지를. 왜 이 남자와 자신이 다를 수밖에 없는지를.
“역시 아버지가 된다는 건 굉장해. 누굴 부러워해본 적은 없네만 자네를 보면 그렇게 느껴지는군. 좋은 자식들에 좋은 아버지야.”
“전하야 의지만 가지시면 금방이지요. 아직 마흔 살도 되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그럴 기회는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자식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 물론 자네를 보면 그런 생각이 흔들리기도 하네만.”
“이유가 궁금해지는군요.”
자신의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었다. 동생에 대한 죄책감 때문은 더더욱 아니고. 설사 자식을 가졌다해도 그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렸을 것이다.
그건 외부의 사정 때문이 아닌 본인의 결단이었다. 자신을 위한 결단이 아닌 나라를 위한 결단. 왕이 되기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네. 나라의 이름을 성으로 가지고 있는 내가 자식을 가지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 아닐까 하는.”
“.......”
“자식은 선택할 수 없지만 잘난 후계자는 택할 수 있지. 한때 번영했던 타타르가 고작 몇 대의 암군을 거치고 멸망했었던 걸 기억하나? 위대했던 나라가 고작 몇 명의 왕의 의해서 운명이 정해졌어. 그렇다면 내 자식이 이 나라를 끝장낼 암군이 되지 말라는 법 또한 없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단지 내 행복만을 위해 자식을 가지는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하는 그런 생각을 했네.”
카를의 얼굴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마르시온 백작의 포근한 미소와 대비되는 쓴 웃음이.
“그래서 난 후세에도 책임을 지기로 했네. 자신의 성에 로히다를 단 인간은 항상 그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어야 하니까. 너무 고루한 생각인가?”
“아니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카를과 마르시온 백작은 술잔을 부딪쳤다.
쓴 술잔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세상이 구름이 눈앞에서 뿌옇게 흔들린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속을 숨기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이렇게 진솔하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는 것은.
그 둘은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책임한 일인지를. 특히나 자신의 어깨에 많은 것을 올려놓은 카를의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자신 앞에 앉아있는 이 남자를 보며, 카를은 자신의 가면을 완전히 내려놓기로 했다. 그건 어쩌면 저 남자에 대한 존중이기도 했고, 또 진짜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말 자신과 닮았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 남자.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자네는 이해하겠지. 자식들이 자신의 세계고, 우주이고 전부인....... 그런 소중한 것이듯이 내게 이 나라도 마찬가지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
카를의 얼굴에 마르시온 백작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들을 보는 듯한 표정이 눈앞에 각인된다.
“페르마가 내게 묻더군.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긍지와 명예는 중요한 게 아니냐고.”
“제린이 왜 그렇게 그분을 따랐는지 알 것 같군요. 물론 명예로운 기사시긴 하겠지만......”
마르시온 백작과 카를은 같은 생각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가끔 답답해 미칠 것 같지. 그래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그렇게 답해줬네. 그깟 긍지 따위가 나라보다 중요한 왕이라면 죽어버리는게 낫다고.”
“동의합니다.”
목적을 위해선 사소한 건 버릴 줄 알아야한다.
명예 그리고 긍지. 자신을 버려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런 것 따위는 백번이고 버릴 수 있다. 기본적으로 왕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자신의 가치보다 수천, 수만의 백성의 삶과 미래를 앞에 둘 줄 알아야 하는 인간.
그렇기에 그는 비겁한 수를 아무렇지 않게 썼고, 가면을 써가며 상대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단 한번도 자신의 그런 모습을 경멸하거나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그건 아마 로비안을 도우며 같은 짓을 해온 마르시온 백작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중 로비안을 이 수도에서 만났네. 그리고 그 녀석이 해온 행동들도 빠짐없이 관찰했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있지.”
“벌써부터 듣는 게 불안해 지는군요.”
“녀석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망설임이 없어. 그리고 자신도 헷갈릴 만큼 열정적으로 입을 열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던질 준비도 되어있어.”
카를은 설명했다.
녀석은 처음에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가며 입을 놀렸다. 그리고 그게 좀 더 나아가서 되돌아 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자,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눈에 넣기 시작했다.
더 늘어난 소중한 것들.
그 시점부터 로비안이 변했다는 걸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로비안은 예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움직였고, 더 과감하게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요했던 자신의 안락과 안전을 포기하면서까지!
주위를 보듬을 줄 알고, 자신 앞에 무언가를 놓을 수 있는 인간. 그리고 큰 목적을 거리낌없이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는 그것이 로비안이 성장했다는 증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로비안은 더 이상 수준 낮은 사기꾼이 아니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하곤 하네. 그런 녀석이 고작 스무살인데, 만약 서른살이 되고 마흔살이 되면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할까?”
“아마 저처럼 그냥 배나온 아저씨가 될 겁니다.”
“생각해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
카를은 마르시온 백작을 보며 웃는다.
물론 저렇게 욕심 없이 편하게 사는 것이 개인에게는 행복한 일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로비안이 그런 삶을 살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공주, 카냐, 그리고 세임.
로비안은 이미 너무 많은 곳에 얽혀가며 자신의 길을 뚫어왔다. 그런 상황에서 로비안이 자신의 아버지처럼 살아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것도 아니고 파티마의 곁에 평생을 남아있기로 맹세한 남자라면 더더욱 그렇지.
“난 녀석이라면 다를 거라고 생각하네.”
“글쎄요.”
“그리고 그런 능력을 썩히는 것도 아까운 일이야. 난 그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 나라에 미래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지.”
“그 아이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군요.”
“과대평가라. 어쩌면 더 솔직한 평가를 하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카를은 단호한 얼굴로 말을 끊었다.
“난 그 아이가 왕의 재목이라고 생각하네.”
- 작가의말
그러고보니 챕터20의 첫화에 카를이 "왕의 그릇"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더군요. ㅇㅂㅇ. 그냥 그렇다고요.
무려 이틀만에 또 글을 올리고 가다니 요즘은 그래도 성실하게 글쓰기가 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실 하루에 1500자씩 써서 한편 만들었다는.
백우,이내바람,fgm,fenix11님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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