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iedpiper 님의 서재입니다.

재 속에서 타오른 불꽃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로맨스

piedpiper
작품등록일 :
2023.12.15 16:24
최근연재일 :
2024.05.03 18:00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4,699
추천수 :
187
글자수 :
353,152

작성
24.04.19 18:00
조회
21
추천
1
글자
12쪽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6

DUMMY

시모니스는 우아하게 꾸며진 대기실에 앉아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미간에 잡힌 세로주름을 어쩌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이 상황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데, 물론 보통의 어머니라면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을 만나기 위해 미리 일정을 고지하고 대기해야 한다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은 이전에는 시아버지인 황제 슬하에서 직접 양육받는 황손이었다면, 지금은 황제가 직접 봉한 카이사르였다. 현 제국에 그 경칭을 받은 자가 적지는 않지만, 황제가 자기 가문원 중에서 골라 책봉한 카이사르는 황제가 천명한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시모니스는 그 사실에 기쁘다기보다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기묘한 심정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남편이 평생을 안달하고도 얻지 못해 결국 미쳐버리게 만든 이름이었다. 남편이 일으킨 추문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속에 떨어질 뻔 했던 가문은, 남편이 죽이려다 실패한 아들이 더 큰 영예를 얻음으로써 되살아났다. 어머니로서는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그 아들은 그녀에게 남과 다를 바 없는, 아니 남보다 더 거리감이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노빌리시마 시모니스, 카이사르 필라레토스 전하께서 입실을 허하셨습니다.”


그녀는 상념중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황실의 일원이자 카이사르의 어머니답게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천히 치마를 쓸며 자리에서 일어나 젊은 환관의 안내를 받았다.


“어서 오시지요, 어머님.”


필라레토스는 빼곡이 황금빛 별 모양 자수가 들어간 청금석처럼 짙은 푸른 웃옷에, 황실의 자색 망토를 두르고 한 쪽 어깨에는 망토를 고정하기 위한 황금 걸쇠를 차고 있었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에는 금 테두리를 두른 피알레(Phiale)형 자색 모자가 얹혀 있었다. 황족의 대표다운 완벽한 예장이다.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어머니를 향해 마저 말을 건넸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어머님.”


그녀는 저도 모르게 경어로 그 말을 받았다.


“··· 그러지요.”


아들이 그저 황손이었던 시절에는 조금 어색한 사이인 것도 아랑곳않고 친밀한 척 평어를 썼었는데, 카이사르의 의장을 갖추고 황궁에 앉아있는 아들에게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쓰린 속을 들고 온 용건 탓이라 생각하며 아들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어쩐 일로 어머님께서 황궁을 방문하셨는지요?”


“어미가 아드님을 뵈러 오는 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필라레토스는 어머니의 삐뚜름한 어조에 소리내지 않고 웃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 본인보다 지위가 높아진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런 속내를 이리 쉽게 들키는 것을 보면, 어쨌든 그의 어머니는 영악한 편은 못 되었다. 시모니스 역시 부지불식간에 우아하지 못한 모양을 보였다고 생각했던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수습하듯 말을 꺼냈다.


“그··· 물론 양 폐하께서 카이사르 전하를 누구보다 귀히 여기고 양육하신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만, 저 또한 전하를 직접 낳은 어미입니다. 전하의 혼인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는데, 저도 어미로서 의견 한 마디 정도는 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런 참견을 되도록 배제하려고 조모가 대놓고 황손비를 뽑는다고 간택령을 내리지 않은 것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필라레토스는 마음 속 깊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황실 내에서 황자인 남편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발언권이 별로 없다.


“그야 어머님께서 소자를 낳은 친모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에 따른 공경을 받아 마땅하지요.”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만 늘어놓았을 뿐,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시모니스는 그 말에 힘을 얻은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각 가문에서 적령기의 소녀들이 입궁하였다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어미인 제가 한 번도 선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될 말입니까?”


필라레토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들은 그저 고모님이 하가하신 후, 쓸쓸하신 조모의 마음을 달래려고 입궁한 이들일 따름입니다.”


“황녀께서 하가하신지도 오륙년은 다 지났거늘 그 무슨 뜬금없는 핑계란 말입니까? 만약에 그렇다 하더라도 눈에 드는 이가 있으면 자연히 좋은 연분을 맺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런 핑계로 입궁한 소녀들이다보니 제가 직접 보고 평가하겠다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답답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이 일은 상심한 황후를 명분으로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상심은 출가한지 오래된 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비명에 간 장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모니스는 이미 죽어 세상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남편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은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감히 가질 수 없는 불만이기 때문이다.


필라레토스는 일단 흥분한 어머니를 다독이기로 했다. 흥분한 어머니가 자칫 조모를 찾아가 아들의 신붓감 찾는 일에 한 자리 내어달라고 재촉하기라도 하면 조모에게 너무 큰 실례였다.


“어머님, 그리 안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할마마마와 고모님 눈에 드는 처자가 생긴다 해도, 제 신분상 황제이신 할바마마의 재가도 받아야 하고, 말씀하신대로 제 생모이신 어머님의 의견을 묻지 않을 리 없습니다. 지금 그저 아무런 명분도 없는 상태의 소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느라 진을 빼는 것 보다, 눈여겨볼 만한 이가 생기면 그때 가서 찬찬히 살펴보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황후 폐하의 눈에 든 소녀라면 제가 어찌 감히 어깃장을 놓겠습니까?”


필라레토스는 잠시 눈을 지긋이 감고 뜬 후에, 어머니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물었다.


“어머님, 지금 가문의 수장이자 제국의 황후이신 아일리아 폐하의 감식안을 믿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모니스는 숨을 훅 들이켰다. 황제와 황후의 정궁이 아니라고 해도, 이 자리는 황제와 황후가 머무르는 황궁 부지 내였다. 그녀는 어느새 굳은 얼굴을 한 아들을 마주보며 싸늘한 거리감을 느꼈다.


‘그래, 저 애는 내 아들이 아니라 두 분의 손자이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황후 폐하께 그런 참람된 생각을 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분도 어머니시니 황녀 전하의 영향으로 마음 약해지는 구석도 있을 것이고, 저는 그런 점에서 제가 낳은 전하께 혹여라도 누를 끼칠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반평생을 함께 할 반려의 일이 아닙니까? ······ 어미가 소견머리 없는 여인네라 적절한 미사여구로 속내를 꾸밀 줄은 모르지만, 이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필라레토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이신 조모께 불만을 표하는 것은 불충이 될 것이나, 황녀인 고모에게 불만을 표하는 것은 그저 예의의 문제다. 어차피 그의 어머니도 황자비이니 황녀인 고모와의 신경전은 크게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눈감아 줄 수 있는 문제였다.


“어머니께서 우려하시는 바는 알겠습니다. 물론 고모님이 강경하고 주도적으로 구시는 면은 있지만, 그렇다고 양 폐하의 의지를 꺾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할마마마께서도 제 의견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려 하시는 것 같으니, 나중에 간택된 공녀가 어머님 눈에 차지 않으시거든, 어머님께서는 제게 말씀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말에 시모니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무리 아들의 문제라도 그녀가 직접 황후나 황녀와 맞서는 것은 부담이 큰 일이었다.


“아아, 그렇다면 어미도 안심입니다. 그런데 조만간 황후 폐하를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명가의 소녀들이 황궁 내에서 공연을 한다던데요?”


“어머님께서도 참관하고 싶으십니까? 제가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아니··· 아닙니다. 제가 그런 자리에 끼어 뭣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전하께서도 그 자리에 참석하십니까?”


“글쎄요··· 고모님께 그런 제안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할마마마를 위무하는 일이라 하나, 과년한 나이의 미혼 남성이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


시모니스는 그 말에 활짝 웃으며 격한 동의를 표했다.


“아 물론이지요, 전하의 생각이 옳습니다. 과년한 나이의 미혼 남녀는 함부로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법이지요. 카이사르 전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처신이 올곧고 식견이 깊어, 어미가 그 점으로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사이나쁜 시누이의 제안을 아들이 거절했다는 점에 기쁜 모양이었다. 하기사 그녀는 아들의 혼인을 걱정하여 찾아왔다기 보다는, 원래도 데면데면한 아들이 시누이 눈에 드는 규수와 결혼하여 완전히 시누이의 영향력에 포섭되는 것을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


‘내 배로 낳은 장차 황제가 될 아들인데, 그 밉살맞은 황녀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둘 까 보냐? 하지만 좀 전에 말 하는 투로 봐도 그렇고, 이 아이는 조부모를 대하는 것 만큼 고모를 존중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그건 다행이로구나.’


그녀는 제법 만족한 얼굴로 어머니답게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학업에 대해 호들갑스러운 칭찬을 쏟아부은 뒤 돌아갔다.


***


엘라이아도라는 숨 찬 것도 잊고 무아지경으로 달렸다. 속도를 늦춰도 되는 구간에 들어섰음에도 그녀는 오히려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두 세 바퀴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이제 눈 앞에 보이는 분수대만 제치면 열 바퀴를 다 뛰는 셈이었다. 소녀는 환희에 차서 더욱 힘을 내어 달렸다. 아스칼라포스는 소녀가 목표지점을 통과하자마자 신이 나서 펄쩍 뛰며 외쳤다.


“아가씨! 성공이에요! 열 바퀴!”


“우, 우와아!”


엘라이아도라는 환희에 차서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르다가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입을 막은 두 손으로도 소녀의 기쁨과 환희는 다 가릴 수 없었다. 아스칼라포스는 자신이 더 신이 나서 곁에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제 다른 아가씨들이 연습하는 자리로 가 보실까요?”


“하, 하지만 이렇게 땀 범벅이 된 상태로 가도 될까요? 옷도 좀 갈아입고 얼굴도 씻고 나야···”


아스칼라포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라면 방금까지만 해도 열 바퀴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땀 범벅인 제 모습을 드러내길 꺼리지 않겠지만, 이 소녀는 어쨌든 귀족 가문의 아가씨이고 이 소녀가 상대할 이들도 그렇다.


‘하기는 말쑥하게 차리고 왔다고 못 믿겠다고 나온다면, 황후궁 소속의 궁인인 내 말을 못 믿는다는 소리냐고 따지면 되겠지.’


가짜 환관 소년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소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래요! 어차피 제가 심판관으로 아가씨의 위업을 보증하니, 괜찮을 거예요!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가씨는 준비를 마치고 이 정원으로 다시 와주시겠어요?”


“응! 좋아요!”


격한 운동을 마친 뒤라, 소녀는 약간 휘청거렸지만 지켜보고 있던 유모의 부축을 받으며 제 처소로 돌아갔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은 흐트러져 느슨하게 묶여 있었고, 뺨은 빨갛게 달아올라 터질 것 같았지만 소녀는 넘치는 활력과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재 속에서 타오른 불꽃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2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2 24.05.03 11 2 12쪽
61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1 24.04.28 13 2 14쪽
60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0 24.04.27 17 2 13쪽
59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9 24.04.26 15 2 13쪽
58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8 24.04.21 23 2 13쪽
57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7 24.04.20 19 2 13쪽
»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6 24.04.19 22 1 12쪽
55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5 24.04.14 24 2 12쪽
54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4 24.04.13 27 1 13쪽
53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3 24.04.12 25 2 12쪽
52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2 24.04.07 30 2 12쪽
51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 24.04.06 33 1 13쪽
50 철학, 하지 않겠는가 -7 24.04.05 29 3 12쪽
49 철학, 하지 않겠는가 -6 24.03.31 30 2 13쪽
48 철학, 하지 않겠는가 -5 24.03.30 28 2 13쪽
47 철학, 하지 않겠는가 -4 24.03.29 31 2 13쪽
46 철학, 하지 않겠는가 -3 24.03.24 33 3 13쪽
45 철학, 하지 않겠는가 -2 24.03.23 29 2 12쪽
44 철학, 하지 않겠는가 -1 24.03.22 28 4 14쪽
43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6 24.03.17 34 4 12쪽
42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5 +1 24.03.16 35 3 14쪽
41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4 24.03.15 36 2 13쪽
40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3 +1 24.03.10 41 4 13쪽
39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2 24.03.09 41 2 12쪽
38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1 24.03.08 46 3 12쪽
37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5 24.03.05 47 3 12쪽
36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4 24.03.05 44 2 13쪽
35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3 24.03.03 49 2 13쪽
34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2 24.03.01 59 3 13쪽
33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1 24.02.18 62 6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