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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piper 님의 서재입니다.

재 속에서 타오른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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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piper
작품등록일 :
2023.12.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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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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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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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6

DUMMY

황제는 편안히 앉아서 어린 딸이 기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필로미나는 여러 점의 전용 식기와 잔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꺼내온 것은 연한 장밋빛을 띈 수정을 깎아 만든 것들이다. 분꽃처럼 짙은 분홍색과 안개처럼 드문드문 퍼지는 흑색 반점을 가진 장미휘석과 달리, 합환수의 꽃술 같은 연분홍색의 장미석으로 만든 잔들은 영롱하고 투명한 분홍빛을 띄고 있었다. 황제가 자신의 딸을 위해 장인들에게 주문한 명품들이다.


소녀는 허리께에 칠보장식을 얹은 장미석 술잔을 아버지의 앞에 갖다드리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서는 감귤류를 좋아하시지요? 꿀에 절인 오렌지 과육에 포도주 조금, 그리고 박하 잎을 섞었어요. 향 한 번 맡아 보세요.”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고는 인사치레를 건넸다.


“그래, 내 딸이 아비 취향을 정확히 아는구나.”


“그럼요. 손님의 기호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다과를 주관하는 여주인의 기본 소양이거든요!”


필로미나는 뿌듯한 얼굴로 아버지의 말에 화답한 다음, 총총걸음으로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황제와 그 자녀들만 함께 하는 아주 조촐한 다과회였다. 이제 네 살 먹은 로마노스 황자는 아직 홀로 높은 의자에 앉히기 불안하여 황제가 무릎 위에 앉혀두고 있었고, 황제의 대자인 히에로테오스는 필로미나의 곁에서 포도알을 그릇에 담는 것을 돕고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제 앞으로 날라져 온 포도알 한 줌과 손바닥만한 장미석 사발을 뚱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필로미나가 가진 식기들은 대부분 소꿉놀이용이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크기의 사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제대로 된 사교 활동을 할 만한 나이가 되면, 실제로 어른들이 쓰는 것과 같은 크기의 그릇을 갖게 될 것이다. 황녀의 오라비는 조그마한 그릇에 담긴 포도알 네 개를 잔 째로 한 입에 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오라비가 어떤 폭력적인 충동에 시달리는지 알 도리 없는 필로미나는 쾌활한 목소리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저 이 그릇을 밀리 언니에게도 보여주었거든요, 제가 밀리 언니가 입은 의상에 맞춰 준비한 그릇들이라고 말하니까 언니가 참 좋아했어요. 언니도 분홍색 치마에 금자수가 놓인 옷을 입고 있었거든요.”


거리낌없이 명랑한 어조는 예전과 그대로였지만, 어린애 특유의 과장스러운 몸짓은 많이 줄어 있었다. 어린 황녀는 자신보다 몇 살 많은 소녀들 사이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소녀다운 천진성과 귀부인다운 우아함의 균형을 맞춰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래서 황제는 어버이다운 미소를 지었다.


“너는 요즘 리키아 공녀의 이야기를 자주 하더구나. 그녀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네! 사실 다른 공녀들은 제게 별로 관심이 없는데, 밀리 언니는 항상 저랑 같이 있어주는걸요. 게다가 밀리 언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제가 하는 공부나 저랑 같이 노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아요.”


테오필로스는 왜 멜리테의 존재감이 그렇게나 옅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른 공녀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도 별로 없고, 황태자를 마주칠 수 있는 기회에 적극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어린 황녀나 왕자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가 얼굴을 모를 법도 하다. 거기에 너울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다니지 않는가.


“애 보기를 좋아하나보네.”


필로미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히에로테오스가 끼어들어 변호에 나섰다.


“아냐, 형. 리키아 공녀는 공부하는 것도 좋아하고, 또 자기는 필로 누나의 공부친구로 왔으니까 되도록 우리랑 같이 지내는 것이 본분에 맞는 일이라고 했어.”


필로미나는 부황이 품에 안은 막냇동생에게 자기가 만든 음료를 먹여주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로마노스 황자는 시큼하고 화한 맛에 약간 얼굴을 찌푸렸으나, 익숙해지고 나서는 잘 받아먹었다. 필로미나는 미소를 지으며 흐뭇하게 막냇동생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뭔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 그러느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말하려무나. 너희들의 소망을 이뤄주는 것은 아비에게 다시없는 기쁨이란다.”


“음··· 저··· 만약에 제가 이 장미석 그릇들을 밀리 언니에게 주고 싶다고 하면, 언짢으실까요?”


“얘야, 아비가 네게 한 번 준 것들은 오롯이 네 것이다. 네 것을 네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그리고 정녕 신분이 높은 귀인들은 자신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그제야 어린 황녀는 제 나이다운 모양으로 흰 이를 드러내가며 웃었다.


“아, 정말요! 다행이다. 가끔 다른 공녀들이 밀리 언니의 옷차림이 구식이라고 트집을 잡는데, 제가 새 옷을 지어주겠다 하면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 식기들은 언니가 보고 기뻐했으니까 주고 싶어서요. 저는 다른 그릇도 많이 있고.”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러려무나. 그런데 리키아 공녀도 엄연히 대가문의 장녀로 귀한 신분이니 네가 그녀의 생활을 지원해주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아. 오히려 그녀와 리키아 공작가의 명예에 누가 된단다.”


“그러면 장미석 그릇을 주는 것은 괜찮나요?”


테오필로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야, 그건 그냥 애들 장난감이니까.’


물론 그의 아버지는 좀 더 온건한 어조로 딸아이를 어르듯 대답했다.


“아예 그녀가 하급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면 네가 그렇게까지 챙겨주는 것이 큰 영광이 되겠지만, 리키아 공작가도 황제 직속 봉신가문이 아니냐? 그런 가문의 여식이 황녀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돌면, 공작가에서 딸의 양육을 황실에 떠넘기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된단다. 공작가의 위신이 떨어질 일이지.”


필로미나는 둥그렇게 뜬 눈으로 히에로테오스를 돌아보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그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표정과 행동이었다. 황제는 큭큭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히엘은 내 대자가 아니냐. 대부모와 대자녀 관계는 유사 부모자식과 같은 것이라, 아비가 히엘을 맡아 기르는 것이 흠이 되지 않지만, 리키아 공녀는 황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잖니.”


필로미나는 고개를 천천히 갸웃거리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어려워요······”


“그럴 테지. 그러니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아비나 네 유모에게 상의하여 행동하거라.”


“네.”


황제는 싱긋 웃으며 맏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테오, 그러고 보니 미리 말 하는 것을 잊었는데, 이제 곧 에클레시아 소피아에서 제 5차 공의회가 열린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초대 황제가 정교회를 국교로 정한 이래로, 제국의 황제는 제국 종교계의 수장이기도 했다. 물론 종교계의 대표자로서 총대주교가 있기는 하지만, 총대주교 임명권 자체가 황제에게 있다 보니 황제의 권위를 위임받는 형식에 가까웠다.


그래서 황제들은 원치 않더라도 종교계 인사들의 교리 해석에 따른 다툼과 이단 논의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심판할 의무가 있었다. 현 황제 필라레토스 대에는 이러한 공의회가 열린 것이 다섯 차례로, 그의 치세가 아직 이십 년이 안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잦은 편이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바마마.”


“그래. 특별히 이번 공의회 개최 연설은 너에게 맡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안 남았으니 준비하고 있거라.”


“네, 아바마마.”


테오필로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갑작스레 잡힌 연설 일정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도 있으나, 그와 동시에 친구들과 잡았던 약속을 미뤄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 책도 파는 잡화점이라는 곳을 가 보기로 했는데 아쉽게 되었군. 보통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했는데.’


요즘 그의 외유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몇 번씩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기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그의 의지였지만, 그가 사적인 일정을 마지못해 포기하게끔 자꾸 공무를 내려 황궁에 묶어두는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테오필로스는 슬며시 아버지의 기색을 살폈다. 막냇동생을 어르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어떤 특이점도 엿보이지 않았다. 가족에게,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다정하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바마마께서는 내가 자꾸 밖으로 나도는 것을 탐탁찮게 생각하시는 것일까?’’


***


테오필로스는 뒤통수를 나무 줄기에 기대고, 두 다리는 꼬아서 나뭇가지 위에 턱 걸쳤다. 장소가 별로 적절하지 않다는 점만 빼면 ‘널브러져 있다’라는 수식어의 모범적인 예시다. 사순절에 낭독할 연설문은 이미 초안을 잡아 개인 교사들에게 한 번씩 검토를 마쳤고, 마지막으로 총대주교에게 검수를 부탁하러 보낸 참이었다. 하지만 아마 크게 수정할 부분은 없을 테니, 이제는 외운 티가 나지 않게 자연스러운 어조로 연설 연습을 할 차례였다.


황제가 될 황자로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그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은 과제였다. 대중 앞에서 펼칠 기예로 마상무예와 연설 중 하나를 택하라면 그는 차라리 대본 없는 즉석 연설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방만한 자세로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할 정도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정 내키지 않는다면, 어차피 연설 연습이야 금방 마칠 수 있을 테니 훌쩍 나갔다 들어와도 좋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어쨌든 그가 주어진 과제만 완벽하게 해결한다면 그의 사생활까지 크게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거기에는 자식들에게 자애로운 아버지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앞으로도 고난과 시련이 예비된 영광의 길을 걸을 아들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아아······”


그가 저도 모르게 한숨처럼 내뱉은 외마디 소리에 화답하듯, 누군가의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앗······!”


테오필로스는 깜짝 놀라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나무 위라는 점만 제외하면 어디 가서 흠 잡힐 데 없는 귀공자다운 자세였다. 한 열 보쯤 떨어진 거리에서 도망갈까 말까 머뭇거리는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당혹스러우나마 공손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이오세프 공자님.”


그는 지금쯤 아버지에게 붙들려서 장부를 쓰고 있을 진짜 ‘이오세프 공자’를 생각하며 피식 웃어버렸다.


“저는 작위가 없는 평민 집안이라 그런 굉장한 호칭을 쓸 수 없는데요, 리키아 공녀.”


“아 예··· 어, 그럼 저,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거의 저택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을 귀족 소녀라면 또래 귀족 소년은 물론이고 평민을 접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 눈앞의 평민 소년은 무려 황태자와 친분이 있어 황궁을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흠, 그렇다면 함부로 하대하지 않는 것이 조심스러운 처신이기는 하지.’


하지만 소녀에게선 그저 아직 낯이 설어 어색한 상대에 대한 수줍음만 보였다. 왁 하고 소리만 질러도 놀라서 토끼처럼 뛰어 도망갈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는 방긋 웃으며 대범하게 제안했다.


“그냥 이오세프라고 부르세요. 어차피 공녀께선 제게 하대하셔도 될 신분이시잖습니까.”


소녀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해 어떤 가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소년의 물음에 소녀는 그제서야 배시시 웃으며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어쩐지 이런 제안을 최근에도 들은 것 같다 싶어 그랬습니다.”


“황궁에서 친구를 사귀신 모양이군요.”


“제가 감히 그렇게 여겨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멜리테는 어린 황녀와 삼왕자의 올망졸망한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만약에 제가 가까워지자는 제안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제안을 던진 사람은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상처를 받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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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어린 카이사리사, 작은 황후 -1 NEW 6시간 전 2 1 12쪽
62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2 24.05.03 12 2 12쪽
61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1 24.04.28 13 2 14쪽
60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0 24.04.27 17 2 13쪽
59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9 24.04.26 15 2 13쪽
58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8 24.04.21 23 2 13쪽
57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7 24.04.20 20 2 13쪽
56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6 24.04.19 22 1 12쪽
55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5 24.04.14 24 2 12쪽
54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4 24.04.13 27 1 13쪽
53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3 24.04.12 25 2 12쪽
52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2 24.04.07 30 2 12쪽
51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 24.04.06 33 1 13쪽
50 철학, 하지 않겠는가 -7 24.04.05 29 3 12쪽
49 철학, 하지 않겠는가 -6 24.03.31 30 2 13쪽
48 철학, 하지 않겠는가 -5 24.03.30 28 2 13쪽
47 철학, 하지 않겠는가 -4 24.03.29 31 2 13쪽
46 철학, 하지 않겠는가 -3 24.03.24 33 3 13쪽
45 철학, 하지 않겠는가 -2 24.03.23 29 2 12쪽
44 철학, 하지 않겠는가 -1 24.03.22 29 4 14쪽
»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6 24.03.17 35 4 12쪽
42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5 +1 24.03.16 35 3 14쪽
41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4 24.03.15 37 2 13쪽
40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3 +1 24.03.10 41 4 13쪽
39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2 24.03.09 42 2 12쪽
38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1 24.03.08 46 3 12쪽
37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5 24.03.05 48 3 12쪽
36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4 24.03.05 44 2 13쪽
35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3 24.03.03 49 2 13쪽
34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2 24.03.01 59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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