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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piper 님의 서재입니다.

재 속에서 타오른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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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piper
작품등록일 :
2023.12.15 16:24
최근연재일 :
2024.05.03 18:00
연재수 :
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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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1
추천수 :
187
글자수 :
353,152

작성
24.03.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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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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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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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2

DUMMY

멜리테는 축 쳐진 걸음걸이로 자신에게 배정된 처소로 돌아갔다. 방에서 공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짐정리를 하고 있던 마르키아는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공녀님?”


“으응······”


“아니, 표정이 많이 지쳐 보이시는군요. 그리 어려운 자리였습니까?”


“아니야. 아, 아니 물론 분위기가 좋았던 자리는 아니었는데··· 나의 기분이 저조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은 아니거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멜리테는 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차분하게 늘어놓은 다음 말했다.


“나는··· 그녀들이 읽은 책들의 이름도 미처 몰랐어. 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어. 제도의 귀족들은 딸들에게도 그 정도의 교육을 하는 건가?”


“그··· 그래도 카린티아의 사마라스 가는 좀 유별난 편입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스칼로테 공녀 헬레네 양이 언급하신 책들도 다 모르거든··· 같이 공부하는 숙녀분들은 헬레네 양과 비슷한 수준까지 진도를 나갔을 텐데, 난 그 조차도 못 따라갈 테니 어쩜 좋지?”


사실 그녀들이 제도에 온 것은 황녀의 공부친구가 되기 위한 것 보다, 황제의 며느릿감으로 선보이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진심으로 공부친구가 되기 위해 불려온 것이라면, 애초에 이렇게 진도 차이가 많이 날 만큼 나이가 제각각인 소녀들을 불러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멜리테는 황태자비가 될 거라는 기대는 별로 없었고, 남들보다 뒤처지는 모습으로 집안 망신을 시킬 것만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르키아는 소녀의 한 손을 감싸 쥐며 달래주었다.


“일단 공식적인 공부 진도는 황녀 전하께 맞춰질 테니, 아무것도 이해 못 할 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녀님도 문법서는 다 떼셨고, 성경과 성인록, 옛 신화와 전설 정도는 제가 가르쳐 드렸으니까요. 그렇다면 남는 것은 역사와 문학, 고전어 정도인데··· 이건 일단 수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먼저 보지요. 저도 해당 내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공녀님께 가르치기엔 제 배움이 얕아서 가르친다고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공녀님께서 그날 배워 오신 내용을 함께 공부할 수는 있지요.”


마르키아는 마지막 문장을 말하면서 생긋 웃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어쩐지 웃긴 상황이었다. 과연 멜리테도 그녀의 말에 살풋 웃어보였다.


“뭔가 반대로 되었네? 그렇다면 내가 황녀 전하와 듣는 수업 내용을 최대한 기억해 볼 게. 내가 돌아오면 같이 공부해줘.”


“그러지요.”


며칠 뒤, 어린 황녀의 수업에는 황제가 친히 다시 불러들인 ‘황태자의 담당 교사들’이 나타났다. 어린 황녀의 학습 진도에 맞춘 수업이라, 같이 수업을 듣는 소녀들이 이해하지 못할 내용들은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 듣는 내용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수업에 집중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교사들은 소녀들이 수업에 집중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가르쳐야 할 대상은 그들을 불러들인 황제의 고명딸과 그녀와 같이 공부하는 황제의 대자(代子)였다. 눈치 빠른 소녀들은 교사들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이후, 게으름을 부리거나 재주껏 수업을 빠져나갔다.


헬레네도 아픈 척을 하며 빠져나간 여동생 메드라를 생각하며 철필로 밀랍서판의 귀퉁이를 긁었다.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황녀 출신 조모를 둔 몸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했다.

아우다타는 저 혼자 또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녀는 황녀가 듣는 수업내용을 거의 아는 것 같았지만, 그다지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수업을 들었다. 그녀는 종종 옆에 앉은 멜리테에게 작은 목소리로 수업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강의실 구석에 놓인 물시계로부터 가냘픈 휘파람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교사는 황녀와 삼왕자에게 과제를 내 준 다음 가볍게 공부방을 나갔다. 아직 어린 두 학생에게는 많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 보다 흥미를 잃지 않고 집중할 수 있을 만큼의 수업을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사가 열고 나간 문 사이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손님이 불쑥 들어왔다.


“안녕, 여러분? 혹시 시간 되시면 저와 함께 간단한 다과라도 같이 하실까요?”


“오라버니!”


“형!”


필로미나와 히에로테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달려 나갔다. 열 네 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걸친 화려한 의상에서부터 대충 짐작했더랬지만, 황녀의 외침으로 그가 황태자임을 확인한 소녀들의 눈이 무섭게 번득였다.


***


황제는 흡족한 표정으로 화기애애한 식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원래 가능한 한 저녁 식사는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저희들끼리 떠드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에게 큰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요즘 화젯거리가 많아서 먹기보다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황제는 본인이 친히 끼어들어 장남을 향해 물었다.


“그래, 테오. 오늘 가서 네 아우의 공부친구들을 만나보니 어떻더냐. 네 감상을 한 번 말 해보거라.”


황태자는 부황을 바라보며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대답했다.


“제 감상이요? 뭐 딱히··· 아니, 고결한 가문의 우아한 숙녀분들이지요, 물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우리 애기 동생에게는 조금 수준 높은 상대가 아닌가? 하는 정도? 하하하.”


말 나오는 꼴이 그의 아들은 고작해야 저보다 몇 살 어린 소녀들에게 정말로 ‘동생 친구’정도의 인식만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그것이 아직 미성년인 아들의 천진난만함으로 느껴져, 그래도 아직 품 안의 자식이구나 하는 안도감과 조바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우스울 정도로 모순적인 감정이라 그런 감정을 품는 자신이 생경하면서도 놀라운 것이다.


‘나는 내가 타인의 미숙함을 참아줄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자식들의 미숙함은 오히려 나로 하여금 앞날을 기대하게 만드는구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로군.’


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갖게 만들었던 소녀를 생각하며 쓸쓸히 미소 지었다.


‘그대와 나의 맏아들이 벌써 혼인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자랐소.’


황제는 죽은 아내의 몫까지 부모노릇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아들에게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런 판에 박힌 말 말고. 뭔가 좀 특별히 눈에 가는 인물은 없더냐?”


“음··· 글쎄요? 헬레네나 메드라는 원래부터 종종 봤었고, 특별히 눈에 띄는 인물이라 하시면 역시 카린티아에서 온 아우다타 사마라 공녀 정도일까요? 나이에 비해 굉장히 조숙한 아가씨더군요.”


황제는 한 쪽 입꼬리를 찡긋하며 웃었다. 딸애에게 들은 인상도 그렇고, 좀 더 자라 사람보는 안목이 있는 아들의 입에서도 저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카린티아의 아우다타는 어린 나이에도 존재감이 상당한 소녀인 모양이다.


“그러냐? 대화는 좀 나누어보았느냐?”


“하하, 뭐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마침 철학 수업이 끝난 다음에 방문한지라, 아무래도 수업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더군요. 제 생각에 철학은 필로미나나 히에로테오스에게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필로미나는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렵지 않아! 오늘 배운 건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만난 이야기였는걸?”


테오필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황을 행해 말을 이었다.


“뭐, 아무래도 어린 아이들에게 곧장 철학의 개요를 가르치긴 어려우니 마기스테르(Magister) 루카스도 이해하기 쉬운 일화 위주로 수업하는 모양입니다.”


“내가 진작에 한 번 언급하였느니라. 내가 두 아이를 학자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지만, 필로미나는 황녀이고 히에로테오스는 왕자이니 배워서 익힐 수 있는 영역에서 두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뒤쳐져선 안 된다. 최고가 되라고는 하지 않겠으나, 상대가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정도는 이해하고 기죽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지.”


황제는 아들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딸을 전면에 내세웠다가, 자신의 귀여운 딸이 남의 집 딸들에게 기죽어 돌아오게 만든 것을 뼈아프게 반성했다. 그래서 그는 쉬운 수업으로 자신감을 찾은 꼬마들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뒤늦게야 다시 장남의 일을 떠올렸다.


“아 참, 그런데 넌 카린티아 공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테오필로스는 그냥 지나간 줄 알았던 화제가 다시 언급되자 별스럽다는 듯 손가락으로 볼을 긁으며 대답했다.


“그냥 철학자들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좋아하는 철학자를 가볍게 물어보았을 뿐입니다. 그녀는 ‘무릇 남의 위에 설 자라면, 당연히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하고, 가볍게 근거 없는 희망에 들뜨지 않으며, 끊임없이 단련하는 것을 지상가치로 치는 스토아 철학이야말로 귀족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 그 자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그러면 좋아하는 철학자는 아무래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겠군요?‘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황제는 픽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더냐?”


“네. 조금 더 친했더라면 제가 정답을 맞혔으니 제게 줄 상을 빚진 거라는 농담이라도 했을 텐데, 아무래도 초면의 아가씨이니 그렇게까지 허물없이 굴 순 없죠.”


“너무 그리 예의를 차리는데만 급급하지 말고, 앞으로도 종종 마주치며 살피도록 해라.”


“무엇을요?”


“누가 네 신부감으로 걸맞은지 말이다.”


“... 네에?”


황제는 놀라서 굳어버린 아들의 얼굴을 보며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뭘 그리 놀라느냐? 애초에 아비가 그저 필로미나 심심하지 말라고 귀족가의 여식들을 불러 모았을 것 같으냐? 다 이런 기회에 적당한 가문의 소녀들을 모아놓고 한 번 살펴보는 것이지. 뭐 만약에 네 마음에 끌리는 이가 없다면 다른 기회를 살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자 어디선가 날카로운 금속음이 쨍강 하고 들려왔다. 황제와 황태자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필로미나 황녀가 제법 노한 표정으로 제 손에 든 금수저를 식탁 위에 내리치듯 놓아버린 모양이 보였다. 아홉 살 소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힘주어 치켜 올린 눈으로 아버지와 오라비를 한 번 씩 노려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며 외쳤다.


“그럼 제게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는 아바마마의 말씀은 거짓말이었어요? 소녀는 그저 핑계였을 뿐이군요! 실망이예요! 전 이제 처소로 돌아가겠어요! 아무도 따라오지 마세요!”


“누나! 같이 가!”


히에로테오스가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은 대부의 얼굴 표정을 재빠르게 확인하고는 쪼르르 달려 누이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필로미나는 그를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돌아보지 않고 제법 힘이 실린 걸음걸이로 오케아노스 홀을 빠져나갔다. 황제는 딸이 아예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딸이 앉아 있던 자리에 대기하고 있던 환관에게 물었다.


“저 애들이 얼마나 먹었나?”


“후식은 아직 안 드셨습니다.”


“음. 그럼 본식은 다 먹은 것이지?”


“네, 폐하.”


한결 안심했다는 얼굴로 제 자리에 고쳐 앉는 아버지를 보던 테오필로스가 찜찜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바마마···? 소자라도 잠깐 나가보아도 되겠습니까?”


“훗··· 설마 지금 저 애들을 달래러 가려는 게냐? 그만두어라.”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더 토라질 텐데요.”


“저 애는 아비에게 토라졌으니, 내가 직접 가 봐야지. 하지만 지금은 되었다. 잔뜩 뿔이 나 있을 테니까, 하하하. 어차피 먹을 만큼은 먹었다 하니, 조금 기다렸다가 제 감정이 좀 가라앉았을 때쯤 가서 달래주는 편이 효과적일게야.”


테오필로스는 부황이 철없는 여동생의 투정에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달래줄 맘이 있는 것도 확인하고는 안심하며 자리에 앉았다. 황제는 그런 장남을 바라보며 놀리듯이 말을 덧붙였다.


“너도 이참에 잘 배워 두어라. 앞으로 반려를 얻어 평온한 가정을 꾸리려거든 여심을 달래는 법은 잘 알아 두어야 하는 법이지. 여동생과 반려가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습해 볼 여지는 있지 않겠느냐?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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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1 24.04.28 13 2 14쪽
60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0 24.04.27 17 2 13쪽
59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9 24.04.26 15 2 13쪽
58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8 24.04.21 23 2 13쪽
57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7 24.04.20 19 2 13쪽
56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6 24.04.19 22 1 12쪽
55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5 24.04.14 24 2 12쪽
54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4 24.04.13 27 1 13쪽
53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3 24.04.12 25 2 12쪽
52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2 24.04.07 30 2 12쪽
51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 24.04.06 33 1 13쪽
50 철학, 하지 않겠는가 -7 24.04.05 29 3 12쪽
49 철학, 하지 않겠는가 -6 24.03.31 30 2 13쪽
48 철학, 하지 않겠는가 -5 24.03.30 28 2 13쪽
47 철학, 하지 않겠는가 -4 24.03.29 31 2 13쪽
46 철학, 하지 않겠는가 -3 24.03.24 33 3 13쪽
45 철학, 하지 않겠는가 -2 24.03.23 29 2 12쪽
44 철학, 하지 않겠는가 -1 24.03.22 29 4 14쪽
43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6 24.03.17 34 4 12쪽
42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5 +1 24.03.16 35 3 14쪽
41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4 24.03.15 36 2 13쪽
40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3 +1 24.03.10 41 4 13쪽
»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2 24.03.09 42 2 12쪽
38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1 24.03.08 46 3 12쪽
37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5 24.03.05 47 3 12쪽
36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4 24.03.05 44 2 13쪽
35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3 24.03.03 49 2 13쪽
34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2 24.03.01 59 3 13쪽
33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1 24.02.18 62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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