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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piper 님의 서재입니다.

재 속에서 타오른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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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dpiper
작품등록일 :
2023.12.15 16:24
최근연재일 :
2024.05.03 18:00
연재수 :
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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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8
추천수 :
187
글자수 :
353,152

작성
24.04.0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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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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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2

DUMMY

아일리아 황후가 초대한 명가의 소녀들이 도착하자, 황궁은 한 층 더 화사해졌다. 처음에는 황제가 계신 궁궐이라 하여 긴장하고 조심하던 소녀들은, 차츰 뜻이 맞는 이들끼리 무리지어 다니며 황후궁의 안뜰에 봄바람을 불러왔다. 황후는 3층 난간에서 한 무리의 소녀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역시 저 나이대의 아이들은 저런 법이지.”


하지만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이레네 황녀는 새침한 얼굴이었다. 스물 몇 살의 황녀는 금빛 테두리를 단 흰 바탕의 장치마 위로 포도문이 새겨진 심홍색 상의를 걸치고 여러줄의 금사슬 끝에 가늘게 뽑은 금사로 테를 엮어 포도송이 같은 오색 보석을 엮은 손바닥만한 원반형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숨길 수 없는 부귀함이 온 몸으로 드러나는 자태다. 이레네는 창 밖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하지만 어마마마께서는 필라레토스의 반려 될 사람을 구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장차 황후가 될 인물인데 저리 범속해선 안 되지요.”


황후는 지나가는 소녀들을 일일이 트집잡는 딸을 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시고모인 네가 시어미와 시할미 둘을 합한 것 보다 더하구나.”


“어마마마께서도 참··· 이런 일은 한 사람의 안목만으로는 놓치는 부분이 있을 지 모르니, 되도록 많은 이들이 선을 보아야지요. 물론 대가문의 아가씨들을 함부로 여러 사람의 눈 앞에 세울 수는 없으니 선 보는 사람은 그만한 자격을 갖춘 연륜있는 귀부인이라야 하고, 그런 점에서 소녀는 적임자가 아닙니까? 필라레토스는 갓난아이 때 부터 자라는 것을 보아온 조카라 제게도 각별합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요······”


황후는 딸이 중얼거리는 뜬금없는 말의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레네 황녀는 만약 자신에게 황손 또래의 딸이 있었더라면 싶어 아쉬워하는 것이다. 황후는 그저 온화하게 웃으며 딸을 추켜세웠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래서 이 어미가 너를 불렀느니라. 까다로운 네 안목에 드는 아가씨라면 필라레토스도 관심을 가질 테지.”


이레네는 이런 일에는 눈치가 밝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 애가 혼인하기 싫다고 하던가요?”


“아니다. 너도 그 애를 알잖니. 그 애는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 나는 그 애가 이 일 만큼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제 주관을 내보였으면 좋겠구나.”


이레네는 상체를 뒤로 기울여 온 몸을 둥글게 깎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마마마께서도 참··· 어린애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그 나이의 소년들은 그저 화려한 외양에 홀리기 십상이니, 이런 문제는 연만한 어른들에게 온전히 맡기는 것이 현명하지요.”


황후는 결국 앞뒤없는 딸의 호언장담에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호호호, 얘, 도대체 필라레토스는 어리석은게냐, 현명한게냐?”


이레네는 모후의 이런 지적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뻔뻔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음··· 그러니까··· 필라레토스는 물론 현명한 아이지만, 그 나이대의 소년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요소를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


필라레토스는 자신의 공부방에서 황제에게 올라온 상소문들을 읽고 있었다. 그가 읽는 것은 황제 직소로 올릴 수 있는 국가 기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나, 어쨌든 황제께서 꼭 보셔야 한다며 올려진 것들이다. 이러한 서신의 내용이 담고있을 장황함과 허장성세란 예순 넘은 노인에게도 피곤한 것이라, 열 셋의 소년은 잔뜩 인상을 쓰고 서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만의 하나라도 황제가 알아야 할 만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알리는 것이 필라레토스의 과제였다.


‘물론, 할바마마의 비서실에서 한 번 검토된 것들이긴 하지만.’


그의 맞은편에는 아스칼라포스가 자단목 의자 등받이를 끌어안은 자세로 앉아 쉴 새 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형, 형은 어떤 용모를 좋아해? 껍질 벗긴 계란 같은 흰 얼굴에 뾰족한 턱? 아니면 참대나무 속살처럼 부드러운 밀 빛 피부에 약간 긴 얼굴? 아예 유악 바른 테라코타 도기처럼 짙은 피부에 선이 또렷한 이목구비는?”


전혀 마음이 동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세밀한 묘사였다. 아무래도 아스칼라포스는 그 대신 황후궁을 기웃거리며 초대받은 소녀들을 힐끔거리다 온 모양이다. 필라레토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잠시 서신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너, 아무리 아직 열 두 살이래도 마냥 어린애가 아닌데, 함부로 귀족 아가씨들만 있는 자리에 기웃거리면 되겠냐?”


“그럼 형이 가던가.”


“나는 더욱 안 될 말이지.”


“그럼 형은 상대가 정해질 때 까지 입 한번 벙긋하지 않을 셈이야?”


“어차피 고모님도 참관하러 오셨다며? 흠··· 고모님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소녀가 있다면 아마 세상 누구도 트집잡을 수 없는 완전무결한 규수임이 틀림없어. 그러니 내가 지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필라레토스는 다시금 시선을 서신으로 떨구었다. 아스칼라포스는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자신의 의형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이레네 황녀는 까다로운 감식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거의 모든 소녀들의 기를 죽여놓은 상태였다.


“그러다 형 장가 못간다······ 어제는 황녀께서 탈로스 가의 영애에게 걸을 때 오른발이 굼떠서 치마 아래로 발목이 드러났다고 호통을 치시고, 오늘은 고전시를 읽는데 아르기로스 가의 영애가 잠시 눈빛이 흐리멍텅했다고 일으켜 세우셨는걸.”


덕분에 소녀들은 이레네 황녀가 있는 자리에서는 영혼은 없지만 부리부리한 눈빛과 정확하게 박자가 딱딱맞는 절도있는 몸가짐을 보여주었다. 황후는 귀부인의 정원이라기보다 사열중인 병영 한가운데처럼 되어버린 황궁 분위기를 보며, 딸을 돌려보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필라레토스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저 혼자 낄낄 웃었다.


“형··· 뭐가 웃기냐. 형이 그 때 그 상황을 안 봐서 그래. 얼마나 분위기가 별로였는데.”


“뭐, 그래도 할마마마께서 계신데 고모님께서 선을 넘진 않으셨을 거다. 그러니 상관없지 않으냐. 어차피 누가 내 반려가 되든, 그녀는 앞으로 인척으로서 ‘우리 고모님’을 감당해야 한 단 말이야. 차라리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놓는 편이 낫지.”


필라레토스는 다시금 눈을 돌려 읽던 서신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아스칼라포스는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쭉 내밀고 턱 끝을 의자 등받이 위에 척 얹은 다음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형, 형은 정말로 누구와 결혼해도 상관이 없어?”


필라레토스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눈 두덩이를 꾹꾹 문지르며 허심탄회한 어조로 대답했다.


“조모님이 고르시는 신부감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어.”


“황후폐하께서 어떤 사람을 고르실 줄 알고?”


“그야 나도 잘 모르지. 하지만 할마마마께서는 내 반려가 장차 어떤 역할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인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으시지 않겠나.”


“아 그래?”


열 두 살의 소년은 도전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형은 그럼 누구를 만나도 사랑하고 아끼며 살 자신이 있다 그거지?”


꽤 직설적인 질문에 필라레토스는 살짝 당황했다. 어느새 그의 말투가 제 나이 또래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 아니, 그게 뭐, 왜 질문이 그렇게 되냐? 그게 ······.”


필라레토스는 잘못 대답했다간 희대의 바람둥이로 몇 년은 놀림당하는 것이 아닌가 지레 걱정하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의 대답 여하와 상관없이 아스칼라포스는 두 손을 전차경기장의 응원단처럼 신나게 휘두르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휘유! 누구를 만나도 사랑할 자신이 있다고 했겠다! 이야, 형이 그 정도로 야망이 넘치는 사나이인 줄은 몰랐어! 굉장해! 휘익!”


필라레토스는 결국 자리에서 와락 일어나 의동생을 잡으러 달려나왔다. 물론 그 전에 아스칼라포스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몸을 굴려 달아난 뒤였다.


“야! 임마! 이리 안 와?”


“싫어, 나 바빠! 형은 누구랑 결혼해도 상관 없다 했으니, 그냥 잠자코 내가 골라주는 신붓감이랑 결혼해!”


필라레토스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펄쩍 뛰며 외쳤다.


“뭔 헛소리야! 내 나이 만큼도 안 먹은 어린놈이 무슨 보는 눈이 있다고 남의 신부감을 골라주냐!”


아스칼라포스는 유연한 동작으로 필라레토스가 휘두르는 손을 피해 공부방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아, 형은 잠자코 구경이나 하셔! 형은 형의 신부감에 관심이 없더라도, 나는 나의 새 형수님에 관심이 무진장 많으니까! 만약 내 마음에 안 드는 형수님이 들어오면 난 앞으로 형이랑 마음놓고 어울리지 못 할 것 아니야?”


“네가 골라주는 신부감을 내가 어떻게 믿어!”


“형은 나 좋아잖아! 그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할거야!”


“야, 앞으로 얼마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 애초에 넌 사지 멀쩡한 사내녀석이 어떻게 아가씨들 있는 자리에 끼어들라고!”


“그런건 나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까!”


“야이, 그 망할놈의 계획 당장 불지 못해!”


아스칼라포스는 안뜰에 면하여 절반 정도는 햇빛에 달궈진 긴 회랑을 풀숲의 다람쥐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며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놀라운 재주를 선보였다. 물론 황궁에서 황손 전하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 소년왕이다보니 주변의 궁중인들이 재빠르게 길을 터 준 덕이다. 필라레토스는 아스칼라포스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나오는 ‘장래의 형수님’이라는 단어에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새빨개진 얼굴을 괜히 한 팔의 소매로 훔치며 의동생의 뒤통수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임마, 체신머리 없이 빨빨대고 돌아다니지 말고, 너도 와서 공부나 좀 해! 너야말로 아이기나의 왕이잖아!”


제국 황제의 손자이자 존귀하신 카이사르의 악에 받친 표효가 무색하게도,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이기나 왕국 소년왕의 뒤통수가 알록달록한 줄무늬 대리석 기둥 너머로 사라졌다.


***


히에로테오스는 잠 다 깬 눈에 의아함을 가득 담아 황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아바마마가요? 그런 분이었어요?”


황제는 껄걸 웃으며 어린 대자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눈 앞의 어린 소년은 여섯 살에 갓 황궁에 도착하여 모든 것을 낯설어하던 아스칼라포스를 떠올리게 했다.


“뭐, 그 녀석이 지금은 결혼해서 제 가정이 있으니 제법 가장 흉내는 낸다만··· 원래는 말 못할 개구쟁이였지.”


황제는 오래간만에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읊조렸다.


‘이놈,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렷다?’


그리 생각하니 황제는 자기 슬하에 두고 키우는 어린 대자에게 몇 마디를 더 덧붙여주고 싶어졌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 네 어머니나 형들도 못 들어봤을 게다. 네 아비가 점잔 떠느라고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히에로테오스는 큰 눈을 더욱 크게 치켜떴다. 저도 모르게 꽤나 흥분해버린 어린아이는 조금 수줍은 듯 배시시 웃으며 슬쩍 눈을 아래로 깔았지만, 겨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채근했다.


“저··· 그래서 대부님은 우리 아바마마께서 골라주신 분과 결혼하신 거예요?”


황제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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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2 24.05.03 11 2 12쪽
61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1 24.04.28 13 2 14쪽
60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0 24.04.27 17 2 13쪽
59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9 24.04.26 15 2 13쪽
58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8 24.04.21 23 2 13쪽
57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7 24.04.20 19 2 13쪽
56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6 24.04.19 21 1 12쪽
55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5 24.04.14 24 2 12쪽
54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4 24.04.13 27 1 13쪽
53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3 24.04.12 25 2 12쪽
»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2 24.04.07 30 2 12쪽
51 진흙 연못 위의 흰 오리 아가씨 -1 24.04.06 33 1 13쪽
50 철학, 하지 않겠는가 -7 24.04.05 29 3 12쪽
49 철학, 하지 않겠는가 -6 24.03.31 30 2 13쪽
48 철학, 하지 않겠는가 -5 24.03.30 28 2 13쪽
47 철학, 하지 않겠는가 -4 24.03.29 31 2 13쪽
46 철학, 하지 않겠는가 -3 24.03.24 33 3 13쪽
45 철학, 하지 않겠는가 -2 24.03.23 29 2 12쪽
44 철학, 하지 않겠는가 -1 24.03.22 28 4 14쪽
43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6 24.03.17 34 4 12쪽
42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5 +1 24.03.16 35 3 14쪽
41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4 24.03.15 36 2 13쪽
40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3 +1 24.03.10 41 4 13쪽
39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2 24.03.09 41 2 12쪽
38 훌륭한 귀부인의 소양 -1 24.03.08 46 3 12쪽
37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5 24.03.05 47 3 12쪽
36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4 24.03.05 44 2 13쪽
35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3 24.03.03 49 2 13쪽
34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2 24.03.01 59 3 13쪽
33 정쟁의 결론은 정략혼 -1 24.02.18 62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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