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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본 님의 서재입니다.

통 큰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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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본
작품등록일 :
2021.08.14 07:55
최근연재일 :
2022.02.11 05:58
연재수 :
1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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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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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글자수 :
604,752

작성
21.08.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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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1> 저 자는 누구일까?

...




DUMMY

반태오는 오늘 날씨와 앞에 펼쳐진 풍경을 가벼운 영어로 말했고, 하동리에게는, 보이는 경치와 기온은 어떤지 영어로 말해보라고 했다.


하동리는 아주 유창하지는 않지만 차근차근 영어로 말했다.

어느 정도는 학습이 되어 있는 영어 구사자였다.


반태오는 아내 서현진이 영어를 이처럼 잘 했나 기억을 더듬어봤다.

아니었다.

어느 정도 알아듣고 간단한 말은 했어도, 이처럼 긴 문장을 구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이 여자는 서현진이 아니란 말인가.

서현진이 아닌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



복잡한 생각을 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그리 뜨겁지 않은 밝은 햇살이 이 작은 산악도시 전체를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반태오는 하동리를 태운 휠체어를 천천히 밀며 거리로 나갔다.

신사복이나 말끔하게 차려있는 시티풍의 옷이 아닌 가벼운 산책이나 등산복을 입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오고갔다.


입구를 빨간색 페인트로 아기자기하게 장식한 카페 겸 레스토랑 앞을 지나가려는데 음악이 흘러나왔다.


바흐의 무반주첼로 조곡이었다.

반태오가 좋아했고 아내 서현진도 덩달아 좋아했던 첼로곡이다.


주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내와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거실에 틀어놓곤 했던 느린 듯 포근한 이불 속 같은 정겨움이 묻어 있는 첼로 솔로곡.


“혹시······ 이 첼로곡 들어봤어요?”


어떤 의도를 갖고 물어본 것은 아니다.

문득 추억이 돋아 반태오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하동리가 뒤를 돌아보더니 음악에 귀를 잠시 기울였다.

반태오는 하동리의 표정을 살폈다.


하동리는 뭔가를 캐치하려는 듯 미간을 좁히고 눈을 깜박이며 귀를 기우렸다.

반태오는 휠체어를 천천히 밀었다.

하동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음악을 알았거나 좋아하는 음악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음악을 듣는 순간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혹은 들어본 음악이란 말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하동리는 즉시 말은 내뱉지 못했다.


하동리는 음악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들어보지 못했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하동리가 난처해지려는 걸 피하려고 반태오는 얼른 무반주 첼로조곡이 흐르는 그곳을 떠나려고 휠체어를 밀었던 것이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리엔트 호텔 사장 비앙은 하동리가 프랑스 국적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해도 유럽 어느 나라에서 살고 있지 않았을까.


교통담당 경찰 드방은 하동리의 사고 차는 스위스에서 렌트한 차라고 했다.

하동리는 스위스 국적이 아닐까?


“저런 건물이나, 걸어 다니는 서양 사람들이 익숙한가요?”


하동리는 가벼운 웃음을 얼굴에 꽃처럼 피우며 반태오를 돌아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하동리는 유럽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인가?


하동리는 한국 국적도 프랑스 국적도 아니다.

유럽에도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스위스 국적도 아니란 말인가.

하동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



거리를 걷다가 카페에 들러 커피와 간단한 빵을 먹으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한적한 풍경을 감상했다.


새하얀 구름과 그 아래 짙푸른 숲과 암벽들, 그리고 설산들.

그 아래로 날아오는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복잡한 생각들이 스르르 사라졌다.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 터라 계단이나 산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피했다.


슬슬 저녁 무렵이 다가왔다.


“내가 저녁을 만들어드릴까요?”

“당신이 저녁을 만든다고요?”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음식을 만든다니······.

‘음식을 만들 수 있겠어요?’라고 물어보면 상처를 주는 질문일 것이다.


“뭘 만들어주려고요?”

“음······, 음식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머릿속에 만드는 법은 있을 것 같아요. 흠흠흠.”

“그래요? 기대되는데요. 재료를 사러 가야겠군요?”


반태오와 하동리는 중국마트로 갔다.

하동리는 이런 저런 재료들을 지목했고, 반태오는 재료들을 트레이에 담았다.


종이박스에 담긴 식재료를 들고 휠체어까지 밀면서 숙소까지 오기엔 벅차보였다. 둘은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뭘 해줄 건지, 기대가 되는데요?”

“음식 이름은 나도 몰라요. 그냥 생각이 떠올랐어요. 기다려 봐요.”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그러면 좋지요. 흠흠흠.”


반태오는 하동리를 싱크대 옆 조리대 앞으로 옮겨줬다.


하동리는 먼저 소고기를 얇게 한 입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잘라 그릇에 담았다.

그 담은 소고기에 간장과 마늘, 파, 후추, 참기름, 설탕, 식초를 버무려 만든 소스를 입혔다.


반태오는 옆에서 하동리의 손이 되어 주었다.

재료들과 그릇들을 하동리가 요구하는 대로 조리대 위에 올려줬다.


“불고기를 할 모양이지요?”

“이걸 불고기라고 부르던가요?”

“양념에 잰 고기를 불에 구을 것 아닌가요?”


하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에 굽는 거니까 불고기 아닐까요? 흠흠흠.”

“맞을 것 같네요.”

“다른 재료들로는 뭘 만들 건가요?”

“저기 냄비를 이리 줘보세요.”


하동리는 냄비에 물을 담았고, 반태오에게 가스레인지에 올리라 시켰다.


물이 끓자, 면을 냄비에 넣고 조금 후 바로 꺼내 찬물에 헹궜다.

물에서 꺼낸 면은 꽉 짜서 그릇에 담았다.

다시 물에 달걀을 넣고 삶았다.


불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조금 전 간을 해뒀던 소고기를 볶았다.

양념 베인 소고기 익는 냄새가 고소하게 거실을 채웠다.


“와, 맛있겠는데요.”


하동리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소고기를 익혔다.


익힌 고기를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올렸다.


“한번 먹어봐요. 어떨지 모르겠어요. 손에 익은 대로 만들어봤는데.”


반태오는 간이 잘 배 익은 소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와, 맛이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데요. 일반적으로 먹던 소고기 불고기와 맛이 달라요.”


다시 한 점을 입에 넣으면서 반태오는 행복한 눈으로 하동리를 바라봤다.


“자, 한 점 먹어봐요.”


반태오는 하동리가 볶는 불고기를 입으로 불어서 식힌 뒤 하동리 입에 넣어줬다. 하동리도 자신이 볶은 불고기의 맛이 괜찮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동리는 반태오에게 마트에서 사온 동치미 국물과 소고기 육수를 그릇에 담아달라고 하였다.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육수가 담긴 그릇에 담고, 조금 전 삶은 면을 같이 담았다.

그 위에 아까 삶은 달걀을 보기 좋게 썰어 고명으로 올렸다.

식초와 겨자를 그 위에 뿌렸다.


“이거 냉면 아니에요?”


반태오는 하동리가 냉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동리는 불고기와 냉면을 요리한 것이다.


“한번 먹어봐요? 다른 고명이 더 들어가야 하는데, 임시로 만들어서 어떨지 모르겠어요. 흠흠흠.”


불고기와 냉면이라······.

아내 서현진이 이런 맛의 불고기와 냉면을 만들어준 일이 있던가, 떠올려 봤다.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적어도 최근에는 없었다.


불고기와 냉면을 만들 줄 아는 이 사람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이 음식은 한국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인데.


“음, 맛있어요!”


면을 한입 입에 넣고 씹으며 반태오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프랑스에 와서 이런 한국 음식을 먹을 줄이야. 하하하.”


하동리가 더 없이 친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손놀림은 분명 한국 사람인데, 왜 한국 국적이 아닌 거지?

일본 사람인가?

아니면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


불고기와 냉면을 깨끗하게 비운 뒤에 반태오는 설거지를 하였고, 커피를 끓여 테이블에 하동리와 같이 앉았다.


“그런데 이런 음식 만드는 건 어떻게 기억이 났어요?”


하동리는 반태오가 끓인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며 뭔가 생각을 하려는 듯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손과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고 할까요? 평소에 내가 가끔 만들었던 음식이었나 봐요.”

“가족들에게요?”


잠시 생각해보던 하동리는 고개를 역시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누구에게 해줬는지요. 당신에게 해주지 않았을까요?”


하동리가 반태오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그런가요?”

“당신은 기억할 것 아니에요?”

그, 그러게요.”


‘나는 당신의 진짜 남편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줘야 하는데······.


‘당신도 내가 당신 남편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요?’

이런 질문도 해야 하나······.


반태오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하동리를 바라봤다.

천천히 김을 불어가며 커피를 마시는 하동리 모습이 왜 그렇게 사랑스러울까.


반태오는 이 여자와 이곳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차오르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



다음 날도 반태오와 하동리는 산책을 나갔다.

역시 기다렸다는 듯 하늘은 맑은 햇살을 두 사람에게 뿌려줬다.


따뜻했으며 공기는 시원했다.

차들이 많지 않았고, 사람들도 바쁘게 걷거나 뛰지 않았다.

평평한 길을 찾아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걸었다.


“나도 얼른 걸어보고 싶어요.”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깁스를 풀 날이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기억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걷거나 뛰는 동작을 아예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음식을 만들거나 영어를 잘 하는 것도 머리에서 기억이 나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저절로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걷거나 뛰는 것도 아주 잘 할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요. 아주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하하.”


그렇게 두 사람이 한담을 나누며 걷고 있을 때였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는데 반태오의 눈을 거스르게 하는 사람이 있어 신경이 쓰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어느 때부턴가 어떤 사내가 계속 반태오와 하동리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여러 번 골목을 돌고, 급히 다른 도로로 회전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때마다 그 사내가 뒤에서 혹은 저 멀리 옆에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사내는 등산용 벙거지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있었다.

키가 컸고, 날렵해 보이는 인상이다.

아시아계 사람처럼 보였다.


지난 번 사고 장소와 병원에서 퇴원할 때 봤던 통통하면서 다부진 체격의 사내는 아니었다.


하동리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반태오는 등쪽이 딱딱해지면서 긴장이 몰려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저 자는 누구일까?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사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이쪽을 바라보며 계속 따라오는 모양새가 뭔가 있어 보인다.


저 사내가 신경이 쓰여 산책길이 영 불편했다.


‘당신은 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거요?’


당장 사내를 쫓아가 물어보고 싶었다.


하동리도 저 사내가 감시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을까 싶어, 반태오는 마음이 조렸다.


반태오는 모른 척하고 휠체어를 숙소 쪽으로 밀었다.

하동리에게 사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너무 민감하게 신경을 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 사내와 동선이 겹쳐서 그리 된 것을 괜히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베일에 싸인 하동리와 함께 하다 보니 예민해졌다는 생각.


의식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우연한 일로 치부하려는 의도는 다음날 무색해지고 말았다.


다음날도 하동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어제 일이 신경 쓰였지만 개의치 않으려 했다.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쯤 시간을 보냈을까.

어제 신경 쓰이도록 눈에 띄었던 사내가 반태오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 사내는 아닌 것처럼 행동했지만, 예민한 눈을 가질 수밖에 없는 반태오는 그 사내를 찾아냈다.


그 사내는 어제 입었던 옷과 다른 종류의 옷을 입고 있었다.

반태오는 다리가 서서히 굳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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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 삼십육계. 21.09.15 65 2 12쪽
25 <25> 뭔가에 뒷머리를 맞았다. 21.09.14 65 3 12쪽
24 <24> 하동리는 나쁜 사람일 수 있어요. 21.09.13 66 2 12쪽
23 <23> 오리엔트 호텔 출근하는 날. 21.09.09 70 3 12쪽
22 <22> 당신은 내 남편이 맞습니까? 21.09.08 80 3 12쪽
21 <21> 정치적인 목적으로. 21.09.07 83 2 12쪽
20 <20> 반태오는 내 남편입니다. 21.09.06 85 3 12쪽
19 <19> 파리에 신혼여행을 왔어요? 21.09.03 82 4 12쪽
18 <18> 누구를 감시하는가. 21.09.02 85 2 12쪽
17 <17> 저, 최 실장입니다. 21.09.01 84 2 12쪽
16 <16> 통통한 근육질 사내 21.08.31 84 2 12쪽
15 <15> 누가 있는지 살펴볼게요. 21.08.30 89 3 12쪽
14 <14> 트럭이 쫓아온다. 21.08.27 94 2 12쪽
13 <13> 떠오르는 거 있어요? 21.08.26 88 2 12쪽
12 <12> 두 사람 교통사고는 같은 유형이다. 21.08.25 101 3 12쪽
» <11> 저 자는 누구일까? 21.08.24 103 3 12쪽
10 <10> 대체 하동리는 누구일까. 21.08.23 107 3 12쪽
9 <9> 당신의 기억을 찾아주고 싶어요. 21.08.22 126 3 12쪽
8 <8> 기억을 잃어버렸다면서요. 21.08.21 141 3 12쪽
7 <7>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21.08.20 150 3 12쪽
6 <6>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21.08.19 181 3 12쪽
5 <5> 기억나지 않는다. 21.08.18 241 4 12쪽
4 <4> 당신과 함께 있을 거야. 21.08.17 318 2 12쪽
3 <3>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21.08.16 384 4 12쪽
2 <2> 당신 곁에 내가 있잖아요. 21.08.15 506 3 12쪽
1 <1> 꽈아광! 21.08.14 88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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